[기고] R&D 군살 빼기, 국가혁신 계기 돼야
내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삭감 편성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국회 논의과정이 남아있지만, 1960년대 과학기술입국 이래 국가 R&D 예산이 줄어든 적이 1991년 단 한번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과학기술계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이번 예산 편성안이 현장의 혼란과 연구 단절을 초래하고 장기적인 과학기술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시각에선 양적 팽창으로 인한 부작용과 군살을 제거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성과를 창출하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라고 본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과학기술의 사회적·국가적 역할을 되짚어 보고 국가 차원의 전략형 R&D 투자 혁신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격화되는 기술패권 경쟁에 대응하고 대내적으로 인구 감소와 축소 사회, 저성장·고물가의 경제, 양극화된 교육 및 노동시장 등 사회·경제·문화적 변화에 대처할 장기적 안목의 국가 R&D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한 시점에 있다.
우선 우리가 직면한 문제의 근본적 해결 수단으로 과학기술의 역할과 투자전략에 대한 정부와 연구 현장 간 간극을 줄여 수용성을 높이는 것이 핵심이다. 기존의 틀을 획기적으로 바꿀 정책적 대안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2000년대 초반까지 '정부는 R&D, 민간은 양산' 시기였다면 이제는 민간 R&D 투자 규모가 70조원을 넘어 정부 R&D의 두 배가 넘는다. 이제 정부의 투자는 미래 성장잠재력 확충, 국가안보, 공공 인프라, 그리고 민간투자의 마중물 역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예산 규모보다는 부처별로 쪼개진 R&D 예산을 어디에, 어느 수준까지, 얼마나 투입할 것인지 등 통합적 조정 및 운용이 더 중요해진 상황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 역량을 고려한 몇 가지 정책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정부와 민간의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 생산기술은 민간이 주도하되 고위험-고수익 기술과 한계 기술은 정부의 마중물 역할이 필요하다. 기술 잠재력은 커도 여력이 부족한 중소·벤처기업을 위한 투자는 지속되어야 한다. 다만, '나눠주기'나 '뿌려주기'는 배제하고 철저한 기술 수준 평가를 통해 정말 우수한 기업이 선별되어야 한다.
현장의 규제는 혁파하고 금융·세제 지원 등 제도 개선도 병행해야 한다. 정부의 R&D 투자는 반도체, 바이오 등 전략산업이나 탄소중립, 재해·재난 대응 등 민관협력이 필수적인 영역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
둘째, 기초연구는 세계와 경쟁하면서도 협력할 수 있는 수준의 연구를 지향하고 이를 통해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후속세대를 육성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한정된 인적·물적 자원으로 모든 분야의 연구 수준을 높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잡화상식을 배제하고 우리나라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며 고급 연구인력 양성에 있어 박사후연구원의 연구 단절 없는 성장지원이 확대되어야 한다. 기초연구를 통한 과학기술 혁신은 기존의 우수연구자뿐 아니라 신진연구자의 지속적 수혈을 통해 이루어지고 학문 발전과 신산업 창출로 이어질 것이다.
셋째, 과학기술은 물론 모든 분야의 혁신에 있어 지속가능성이 핵심이다. 예산 증감은 장기적인 청사진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번 논란의 중심은 예산 삭감에 대한 청사진이나 근거에 대한 이해당사자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해당사자들의 공감을 기반으로 법, 제도, 조직, 시스템이 함께 변화되어야 혁신이 연구 현장에 안착될 수 있다.
일례로, 공공 연구기관들의 역량이 민간보다 상대적으로 월등했던 시대에 탄생한 연구과제중심제도(PBS)는 정부 출연연의 임무중심 역할 수행에도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만큼 개선 논의가 시급하다. 미래를 이끌어갈 MZ세대 연구자도 논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실질적 소통이 절실하다.
내년도 정부 예산안이 국회에 제출돼 논의 중이다. 국회에서 변경될 여지는 있지만 R&D 예산이 삭감되면 새로운 연구과제는 줄고 기존 과제도 축소나 중단 등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모든 변화에는 고통이 수반된다. 뼈를 깎는 고통 없이 진정한 혁신은 없다. 문제는 이러한 정부 R&D의 '군살 빼기'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다.
정부 R&D 투자는 일시적으로 축소될 수 있지만 기술패권 경쟁 심화로 장기적으로는 확대될 수밖에 없다. 이제는 국가전략형 R&D로의 정책의 틀에 대한 철학과 방향, 지속가능성 등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시야를 멀리 두고 긴 호흡의 장정을 시작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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