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하늘나라에서 앵두나무 심으셨을 것”[그립습니다]

2023. 11. 2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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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가셨다.

일곱 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집 밖에 앵두나무와 대추나무를 심으셨다면서 베란다에서라도 그 나무를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올겨울에도 꽃은 피고야 말겠지만, 만약에 지금 여기에 꽃이 피지 않는다면 아버지가 계신 그 나라에 분명히 새로 앵두나무를 심으신 것이라고 믿고 싶다.

아버지 그 나라에 대추나무도 앵두나무도 다시 심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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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립습니다 - 임경범(1930∼2023)
2년 전 아버지(앞줄 가운데)의 마지막 가족여행으로 부여에 갔었다. 나(맨 오른쪽)를 포함한 4녀 1남 형제들이 환한 웃음으로 부모님이 뒷바라지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했다.

아버지가 가셨다. 2월의 첫 토요일 나는 우연히 임종의 순간을 지키게 되었지만, 황망한 그 순간을 차마 예감하지 못했었다.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아버지의 죽음이 엄청나게 슬프지도 억울하지도 않았지만 준비도 없이 제대로 된 인사를 못 드렸다는 사실이 너무 괴로웠다.

아버지는 꽃을 좋아하셨다. 베란다에 손수 만들어 놓은 선반 위에 갖가지 꽃나무 화분을 올려놓으시고 날마다 흙을 만지고 물을 주는 게 노후의 즐거움이셨다. 아버지는 92세에 위암수술을 하셨는데, 고령이었지만 성공적인 수술 덕분에 남은 일 년을 고통 없이 살다가 떠나실 수 있었다. 수술을 견뎌내신 아버지는 집착에 가까울 만큼 꽃을 사랑하셨다. 워낙에 꽃 키우는 것을 좋아하셨지만 아버지에게 꽃은 삶에 대한 희망이 아니었을까.

돌아가시기 얼마 전 갑자기 앵두나무가 심고 싶다고 하셨다. 일곱 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집 밖에 앵두나무와 대추나무를 심으셨다면서 베란다에서라도 그 나무를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 배달된 앵두나무 묘목은 그냥 나무막대기의 모습이었다. 저 막대기 속에서 과연 싹이 날까 꽃이 필까 의심할 정도였는데 놀랍게도 열흘 만에 푸른 싹들이 작은 입술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날이 작년 12월 18일이었다. 그리고 꽃이 피는 건 순간, 며칠 뒤에는 아침에 일어나니 앵두꽃이 피었다고 흥분된 목소리로 소식을 전해주셨다. 정말 앵두나무 막대기 위에 선녀처럼 흰 꽃이 사뿐히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마치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기뻐하셨고 하루에도 몇 번씩 시골집 이야기를 하셨다.

임경범(林慶範),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는 육군 상사로 제대를 하셨다. 아버지가 남기신 노트에는 군인생활에 대한 기록이 전부였다. 따져보면 아버지의 구십 년 인생에서 군인으로 있었던 시절은 이십 년에 불과했지만 마치 군인으로 일생을 보내신 분 같았다. 아버지의 수첩은 전쟁에 나갔던 스무 살의 기록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1950년 9월 8일 제9연대 3대대 입대. 9월 21일에는 US군 편입과 동시 미 2사단에 배속되어 낙동강전투 및 밀양 창녕 경계지역 전투에 참여 후 전세가 호전되어 전진. 1950년 11월 24일 평안도 덕천지구에서 실종-

세상 물정도 모르던 시골 청년은 낙동강에서 평양으로 포항으로 제주도로 다시 부산으로 서울로 옮겨 다녀야 했다. 노트에는 지루한 전쟁이 끝나고도 군인으로 남기를 선택하셨던 이십 년 동안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 20년 후 노트에는 -1971년 11월 30일 면역- 이라고 쓰셨다. 아버지는 정말 면역(免役)을 하신 걸까. 스무 살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짊어졌던 역에서 벗어나 홀가분해지셨을까. 그러나 하나의 역이 끝난 다음에는 또 다른 역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그 역을 또 짊어지셨고 이겨내야 했을 것이다. 역과 면역의 과정이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것이 삶이라고 이해하셨을까.

아버지의 앵두나무는 다시 갈색 막대기가 되어버렸다. 올겨울에도 꽃은 피고야 말겠지만, 만약에 지금 여기에 꽃이 피지 않는다면 아버지가 계신 그 나라에 분명히 새로 앵두나무를 심으신 것이라고 믿고 싶다. 아버지 그 나라에 대추나무도 앵두나무도 다시 심으세요. 그립습니다. 아버지의 앵두나무.

임희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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