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강 칼럼] 처지 바꿔 생각해보자

한겨레 2023. 11. 2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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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칼럼]그분의 수많은 글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노인 목수 한분이 땅바닥에 집을 그렸습니다. (…)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습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거꾸로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렸습니다. (…)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지붕부터 그려온 나의 무심함이 부끄러웠습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조합원들이 지난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네거리에서 ‘노조법·방송법 즉각 공포! 거부권 저지! 민주노총 총파업·총력투쟁대회’를 열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노동조합에서 교육해달라는 요청이 왔는데, 강의 시간이 새벽 5시라고 한다. 연락해 온 사람은 설명 끝에 “너무 무리한 부탁 같아서 강권할 수는 없으니 근무시간이 주간으로 바뀐 다음에 다시 일정을 잡아야 할 것 같다”고 했지만, 내가 기꺼이 하겠다고 했다. 나는 어쩌다 한번 부지런 떠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 노동자들은 한동안 날마다 그 시간에 퇴근이나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일하는 사람, 즉 노동자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이렇듯 다르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칠순이 된다. 주변에서는 체력을 생각해서라도 이제 주말에는 일정을 잡지 말고 쉬라고 권하기도 하지만, 사실 주말에만 모일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절박한 사정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다. 주말에 모인다는 것은 평일에 모일 수 없다는 뜻이다. 평일 근무시간 중에 회사 쪽의 근태 협조를 받아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노동조합은 그나마 안정적 노사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주말과 연결되는 금요일 오후나 저녁에 일정을 잡으면 참석자가 너무 적어서 주중 다른 요일에 행사를 하는 노동단체들도 많다.

우리가 지향하는 “노동이 행복한 사회”란 결국 대부분 노동자가 주말에 원하는 여가 활동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나라이니, 주말을 앞둔 금요일 노동단체 행사에 노동자들이 적게 모인다고 해서 “정신이 해이해졌다”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나를 지금 일하고 있는 성공회대로 불러주신 분은 신영복 선생님이다. 그분의 수많은 글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노인 목수 한분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노인이 내게 무얼 설명하면서 땅바닥에 집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에서 내가 받은 충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거꾸로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부터 그려온 나의 무심함이 부끄러웠습니다.”

‘일하는 사람’ 처지에서 생각해보면 이렇듯 다르다. 신영복 선생님도 평생 그 화두로 고민하셨던지 한자 ‘목숨 수’(壽)의 자획을 풀어 설명하는 글에서는 “사일(士一)이가 지식인이고 공일(工一)이가 노동자라면 9촌(口寸) 간이면 촌수가 너무 멀다. 2촌 정도가 좋지 않을까”라고 하셨다.

선생님에 비하면 일천하지만, 일하는 사람의 처지에 서보자는 그 화두는 내가 평생 고민해온 과제이기도 하다. 며칠 전, 내가 아는 범위에서 우리나라 최고 심리상담치유 활동가인 동료와 긴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가 내게 공감과 소통 능력이 탁월해 보인다며 그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공감과 소통의 절벽에 부딪혀본 경험이 너무 많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답했다.

1980년대 초,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노동운동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노동자들과 대화하다가 “너는 대학생이니까…”, “너는 지식인이니까…”, “너는 배운 놈이니까…”, “너는 ‘먹물’이니까…” 그런 말을 듣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대화가 거의 불가능했다. 고민 끝에 생각해낸 방법이, 노동자들이 쓴 책과 노동야학의 졸업 작품집 등에 있는 글을 있는 대로 모아놓고 같은 단어에 대해 노동자들의 정서가 표현된 문장들을 칼로 오려 노트에 붙여보는 것이었다. ‘고향’이라는 단어를 두고 누구는 새벽에 고향 집에서 가출해 기차를 타고 서울로 떠나오던 모습을 떠올리지만, 어떤 이는 한국 농촌 문제를 고민하기도 했다. ‘노동조합’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노동조합이 나한테 도움이 되는 걸까?” 의문을 품는 노동자가 있지만 “노동운동에 일생을 걸겠다”고 다짐하는 노동자도 있었다.

구름, 꽃, 어머니, 고향 등 수많은 단어별로 노동자 생각이 담긴 글을 주제별, 단계별로 오려서 두꺼운 노트에 가지런히 붙여 정리해보는 작업을 일년쯤 했다. 그 경험이 나에게는 ‘일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큰 자산이 됐다.

윤석열 대통령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과 방송 3법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신중하게 고민 중이라고 한다. 새로 발표된 노동부의 노동시간 정책은 이미 과로가 일상화된 업종의 노동시간을 더욱 늘릴 가능성이 크다. 한번만이라도 ‘일하는 사람’ 처지에서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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