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아처럼…’ 피겨 부츠 조여맨 목동링크의 겨울

장필수 2023. 11. 2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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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체육, 현장을 가다]
서울 양천구 목동실내빙상장에서 15일 오후 피겨스케이팅 상급반 수강생들이 동작 연습을 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황혼을 따라 춤추는 그늘 길어지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만나게 될까.’

아이유의 ‘정거장’ 멜로디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자, 사각사각 소리가 은반 위에 하나둘 내려앉았다. 열정 만큼은 ‘포스트 김연아’ 못지않은 사람들의 스케이팅이 목동 아이스링크장의 찬 기운을 데우기 시작한 것이다. “내 안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인생의 활력소를 찾기” 위해 피겨 부츠 끈을 바짝 조인 이들의 겨울은 올해도 후끈하다.

종합예술 피겨에 진심인 사람들

15일 낮 12시 서울 양천구 목동 아이스링크장에 모인 23명의 수강생은 20대부터 40대 후반까지 다양했다. 정빙 차가 빙판을 정리하고 코치가 휴대용 블루투스 스피커를 작동시키자, 발라드 노래가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선곡은 그때그때 달라요. 팝송을 듣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캐럴도 틀어요.” 선율에 몸을 맡긴 이들은 들뜬 얼굴로 서로에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은반 위로 하나둘 올라섰다.

“나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 숨겨져 있던 우아한 모습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피겨의 장점이에요.” 장혜진(35)씨는 ‘피겨를 추천하는 이유’를 묻자 단 한 줄로 정리했다. 필라테스 강사인 그는 아이스링크장을 찾은 지 2년이 채 안 됐지만, 서울시 생활체육 대회에서 우승한 이력이 있을 만큼 피겨에 진심이다. “피겨는 종합예술”이라고 말하는 그는 “대회에서는 운동 능력은 기본이고 미적 요소도 점수에 포함되기 때문에 의상과 음악, 표정, 쇼맨십까지 신경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수업을 듣기 위해 매번 부천에서 목동까지 이동해야 하지만, 장씨는 “대회에서 단독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짜릿한 경험”만큼은 다른 종목에서 얻을 수 없는 색다른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처음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1년 이상 피겨화를 신게 될 줄 몰랐다. 내 안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면서 자신감도 생겼다”고 말했다.

장씨가 속한 고급반 수강생 중에선 속칭 ‘고인 물’들도 많다. 프리랜서 쇼호스트인 김원영(49)씨는 취미로 피겨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유연성과 근력을 동시에 기를 수 있는 종목을 찾던 중 티브이(TV) 속 김연아의 올림픽 경기를 접한 게 입문한 계기가 됐다. “여름에는 시원해서 좋고, 겨울에는 쾌청한 느낌이 들어요. 발레에서 피겨 스케이트가 나왔잖아요. 음악과 함께 자세를 잡으면 행복해지는 느낌이에요.” 우아하게 스파이럴(한쪽 다리를 엉덩이 높이 이상으로 올려 한쪽 발만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기술)까지 구사하는 김씨는 최근 조카들을 포함해 주변 사람들에게도 피겨의 재미를 알리고 있다.

서울 양천구 목동실내빙상장에서 15일 오후 피겨스케이팅 초급반 수강생들이 동작 연습을 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수준별 맞춤, 저렴한 수강료에 만족도 쑥

강습의 내용은 급수별로 다르다. 고급반이 스핀, 점프 등 다양한 기술을 배우는 데 초점을 맞춘다면, 초급반은 빙면을 적응하는 데 중점을 둔다. 6개월 동안 크로스와 백크로스 등 활주의 기본기를 익히는 과정이 지나면, 스핀과 점프의 기본 단계를 배우는 중급반으로 넘어갈 수 있다.

대학생 정경윤(21)씨는 고급반 수강생인 친구의 권유로 아이스링크장을 방문했다가 피겨에 푹 빠졌다. 정씨는 “선생님이 틀린 자세나 팔 방향을 섬세하게 알려주신 덕분에 새로운 기술을 배워나가며 성취감을 얻는다. 피겨가 인생의 활력소가 됐다”고 말했다.

국가대표 출신 등 국제경험이 풍부한 강사진에게 저렴하게 배울 수 있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성인여성피겨반을 찾는 이들은 조금씩 늘고 있다. 이보람 코치는 “코로나19 이후로 수강생이 줄었지만, 재택 근무와 온라인 수업이 활성화되면서 신청자가 늘어 오후반이 새롭게 편성됐다”고 설명했다.

미국에서 처음 피겨를 접했던 키아라 펠리자로(25)씨도 주 3회 수업에 강습료가 월 8만원이 채 안 된다는 설명을 듣고 서둘러 초급반을 등록했다. 펠리자로씨는 “미국에서는 한 번 수업에 20∼30달러를 냈는데, 여기는 한 달에 70달러밖에 안 한다. 정말 저렴하고 수업량도 많아 매우 만족스럽다. 함께 연습하는 친구들 또한 영어에 능숙해 수업을 듣는 데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며 두 엄지를 살짝 추켜올렸다. 연고 없는 타지에서 일하다 보니 친구를 사귈 기회가 없었지만, 피겨를 시작하며 새로운 인연들도 얻게 됐다.

목동 아이스링크장은 다른 아이스링크장과 달리, 강습 공간이 지상과 지하로 나누어져 있다. 대회가 열리더라도 수강생들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수업을 받을 수 있다. 서울시 공공체육시설인 목동 아이스링크장은 29일 무료 개방해 이용객을 대상으로 강습도 진행한다. 피겨가 어렵다고? 직접 해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장필수 기자 fe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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