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의 선택’과 긴 기다림, 29년 만에 보답받다

2023. 11. 29.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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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2023년 프로야구 통합우승 순간, 팬들이 느낀 감정은
LG 선수들이 11월 13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023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5차전 KT와의 경기에서 우승을 확정 짓고 환호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당신에게 LG란 무엇인가요?”

소위 ‘뼛속까지 LG팬’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물었다. LG는 어떤 의미이기에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을 열광시키는 것일까.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고지혜씨(32)는 처음으로 LG 경기를 봤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고씨의 아버지는 대구 사람이라 본토 ‘삼성팬’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도 LG의 팬이 된 것이다.

■LG팬 셋이 떠올린 LG에 빠져든 그 순간

고씨는 “중학교 때 처음 야구장에 갔던 날 봤던 팀이 LG였다. 그때는 LG가 야구를 못 했던 시절이라 친구들이 ‘LG팬 하지 마라’고 말렸다. 그런데도 나는 집이 잠실구장이랑 가깝고 서울 사람이니까 LG팬을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사실 고씨가 LG팬이 되기로 한 건 선수들이 보여준 경기력이 아니었다. 그는 “외야에서 경기를 보는데 야구를 보던 다른 아저씨들이 먹을 걸 엄청 주면서 잘해줬다. 그때 ‘의리가 있는 구단이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선택이 잘못됐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고씨는 “삼성이 이긴 경기를 데려가지 그랬냐”며 아버지 탓으로 돌렸다. 그때마다 고씨의 아버지는 “네 팔자가 그런 걸 어떡하느냐”며 웃었다.

이경환씨(37)는 아버지에게 ‘영업’을 당해 LG팬이 됐다. 그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잠실야구장을 방문한 해가 딱 1994년이었다”라며 “그날 선발이 ‘야생마’ 이상훈이었다. 스트라이프 유니폼도 멋지고 장발의 머리 스타일도 정말 멋졌다”고 했다.

이날 선발 등판한 좌완 투수 이상훈은 몸쪽 직구를 과감하게 꽂아넣었다. 이씨의 마음속 스트라이크존에도 이상훈의 직구가 강렬하게 꽂혔다.

그때부터 이씨는 매일 아침 신문을 기다리게 됐다. 경기 기록지를 찾아보면서 LG가 승리한 날은 하루종일 기뻤고, 진 날은 반대로 우울했다. 초등학교 진학 후에는 그 유명한 ‘어린이 회원’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처음으로 야구장을 갔던 어린 꼬마는 이제 자신을 닮은 아기에게 LG 유니폼을 입히고 경기를 볼 만큼 자랐다.

또 다른 LG팬인 홍다진씨(32)는 지인의 초대로 우연히 LG의 경기를 처음으로 관전했다. 홍씨는 “2007년이었다. 처음으로 잠실구장을 갔는데 LG와 삼성 경기였던 것까지 기억한다”고 했다.

정확히 며칠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날 경기는 LG가 이겼다. 승리한 팀이 안겨주는 기쁨이 몸 전체를 감돌았다. 그리고 홍씨는 LG와의 사랑에 빠졌다.

그해 LG는 정규시즌 5위를 기록했다. 당시만 해도 8개 구단 체제였기에 사실상 하위권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홍씨는 매 시즌 LG의 경기를 챙겨보는 열혈팬이 됐다.

LG의 우승 순간, 당신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티켓 예매 사이트 인터파크가 아이돌 공연이 아닌 스포츠 경기로 북적거린 건 흔치 않은 일이다. 11월 6일 한국시리즈 티켓 예매가 시작된 날 LG팬은 모두 티켓팅에 뛰어들었다. 접속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허다했다. 대기 인원이 10만명까지 육박하기도 했다.

고씨도 티켓팅에 당연히 참전했다. 인터넷 속도가 빨라야 예매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PC방까지 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두 허탕을 치고 말았다.

그때 운명처럼 친구의 연락이 왔다. 아이돌 EXO의 팬인 친구라 평소에 티켓팅에 익숙해 있었다. 고씨는 “친구에게 인생이 걸린 일이라고 했더니 그 친구가 EXO팬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서 아예 단톡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표를 구했다고 연락이 왔다. 친구에게 절을 올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구한 5차전 티켓. 2023년 11월 13일은 고씨가 영원히 잊지 못할 날짜가 됐다. LG는 KT를 6-2로 꺾고 7전4선승제의 한국시리즈에서 4승1패로 우승을 차지했다.

고씨는 다른 LG팬들과 밤새 술을 마시며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남편조차 “오늘은 집에 안 들어와도 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홍씨는 그 힘들다는 티켓 경쟁을 뚫고 스스로 표를 구한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홍씨가 직접 ‘직관’을 했던 1차전에서 LG는 2-3으로 아쉽게 패배했다. 5차전 중 유일한 패배를 했던 경기였다. 홍씨는 자신이 한국시리즈 현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우승을 확정 지었던 5차전에는 지인들과 식사를 하며 TV로 경기를 관람했다. 홍씨는 “함께 있던 지인들이 LG팬은 아니었지만, 다 같이 어깨를 끌어안고 승리의 기쁨을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이씨는 지인의 도움으로 우연히 3차전을 직접 현장에서 봤지만, 나머지 경기는 모두 집에서 지켜봤다. 5차전이 열리던 날은 잠실구장 근처라도 가볼까 했지만, 아기가 어려서 집에서 우승을 지켜봤다. 그리고 꿈에만 그리던 순간을 바라보았다. 이씨는 “신민재 선수가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았을 때는 오히려 담담했다”고 떠올렸다.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잠들었던 이씨는 다음날 운전을 하다가 펑펑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스포츠 캐스터들이 우승 당시 콜을 모아둔 영상을 보다가 오열을 했다. 그중에서 ‘1994년 가을 당신은 누구였습니까? 오늘날 당신은 누구입니까? 긴 세월에도 포기하지 않고 간직해온 가슴속 깊은 곳의 외침. 29년의 메아리. 2023년 통합우승은 LG 트윈스입니다’라는 멘트를 듣고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LG의 우승이 사실상 결정됐던 순간. LG 중견수 박해민이 11월 13일 열린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4회 대타 김민혁의 안타성 타구를 잡아내고 있다. 데일리 MVP에 선정된 박해민은 이 순간 우승을 직감했다고 했다. 정지윤 선임기자



■이 맛, 또 맛보게 해주라

사실 LG는 그동안 ‘잠실 라이벌’ 두산이 우승하는 순간을 마냥 지켜보기만 했다. 29년 동안 타 팀들이 우승컵을 들어올릴 때 변두리에서 관전하는 입장이었다.

고씨는 “우승해보니 정말 좋더라. 하루하루가 좋더라. 겨울에는 야구를 하지 않아서 찾아볼 게 없었는데, 요즘에는 뒷이야기라던지 인터뷰 등 볼 것이 풍성해서 좋다”고 웃었다.

삼성 팬이었던 아버지도 LG팬으로 끌어들였다. 고씨는 “아버지가 삼성을 ‘탈덕’ 하고 처음으로 LG팬이 된다고 했다. 이제는 부녀 LG팬이다”라고 했다.

‘우승의 맛’을 오래 보고 싶은 바람이 크다. 고씨는 “그동안 고통받은 시간이 더 컸다. 29% 세일 같은 건 필요가 없다. 꾸준히 한국시리즈에 가 달라”고 말했다.

이씨도 “10년 안에 한 3~4번은 더 우승해 줬으면 한다”라면서도 “우승은 하늘이 준다는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매번 우승은 못 해도 한국시리즈에 연속으로 진출할 수 있을 정도로 왕조로서 남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내 아이가 또 아이를 낳아 함께 좋아하고 사랑하는, 세대를 이어 사랑받는 야구단이 됐으면 한다”며 아낌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홍씨 역시 “이 기운 그대로 모아서 내년에도 부상 없이 모든 선수가 즐겁고 행복한 야구를 했으면 좋겠다”라며 “올해 멤버 그대로 모두 다 내년에도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인대를 LG에 바쳤던 한 사나이의 이야기

여기, 생방송에서 눈물을 흘렸던 한 남자가 있다. 이동현 SBS 스포츠 해설위원은 LG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 짓던 날,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베이스볼S> 방송을 하고 있었다. 우승 소감을 묻는 질문에 자신도 모르게 ‘울컥’ 했다. 평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방송을 했던 이 해설위원은 처음으로 눈물을 살짝 내비쳤다.

몸은 방송국에 있었지만, 경기를 뛰었던 선수들만큼 많은 축하 인사를 받았다. 이 위원은 현역 시절 팀에 인대를 바친 선수였다.

경기고를 졸업한 뒤 2001년 1차 지명으로 LG 유니폼을 입은 이동현은 2004년, 2005년 그리고 2007년 3차례나 오른쪽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았다. 인대가 거의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LG에 모든 걸 바쳤다.

그만큼 선수 시절 희생을 했기에 이 위원은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선수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이 위원은 한국시리즈 5차전이 끝나자마자 투수 최동환에게 연락했다. “동환아, 너무 고맙다. 묵묵하게 빛이 안 나는 곳에서 자기 자리 잘 메워준 게 고맙다”라는 내용을 담았다.

최동환은 한국시리즈에서 추격조로 활약했다. 우승 순간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제 일을 했던 선수 중 하나였다. 이 위원은 그의 그런 모습을 잘 알았다. 그는 “시즌 초반 팀이 어려울 때 최동환, 최성훈 등이 어려운 상황을 막아줘서 버텨준 덕분”이라며 “잘하는 선수들은 당연히 잘한다. 하지만 서포트해주는 다른 선수들의 역할을 잘 안다. 그 선수들이 정말 고생했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인대를 바쳤던 자신이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도 스쳐지나갔다. 이 위원이 현역 생활을 접은 지는 4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4년 동안 몸을 잘 만들어서 버텼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만감이 교차했다”면서도 “선수가 아닌 팬으로서 우승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했다.

이 위원을 울컥하게 한 건 한 팬이 들고 있던 피켓이었다. 각종 미디어에서 우승을 일궈낸 선수들에게 집중할 때 한 팬이 박용택과 이 위원의 사진을 함께 붙여 만들어 우승의 순간을 함께했다. 해당 팬은 SNS에도 사진을 올리며 29년간 함께 해 고맙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이 위원은 “먹먹한 감정이 들더라. 내가 LG에서 19년을 뛰었는데, 그 당시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고 했다.

다시금 후배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연신 반복했다. 이 위원은 “LG팬들이 가장 아픈 부분이 우승을 하지 못했다는 것 아닌가. 그 아픔을 후배들이 깨줘서 우승을 못 한 선배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짐을 덜어준 것 같다”고 고마워했다.

통합 우승 행사에서 이제 새로운 왕조 건설을 꿈꾸는 LG /LG 트윈스 제공



■LG 우승 신드롬은 계속된다

말 그대로 ‘신드롬’이다. LG가 우승을 확정 짓던 날 트위터 실시간 검색어는 LG 우승 관련 해시태그로 도배됐다.

LG와 관련된 것이면 무엇이든 값이 치솟았다. 대부분의 사람이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읽게 되면서 종이신문의 가치가 떨어졌다. 하지만 LG가 우승을 확정 지은 다음날 종이신문은 없어서 못 구할 정도의 ‘희귀템’이 됐다. LG 우승을 1면에 다룬 신문이 모두 동이 났다.

온라인상에서는 중고 마켓에 신문이 올라오기도 했다. 1부에 1000원 하는 스포츠신문이 중고시장에서는 웃돈을 얹어 팔렸다.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에 스포츠신문 4부를 20만원에 판매한다는 게시글도 올라왔다.

LG가 우승을 앞두면서부터 특정 가전이 ‘반값으로 나온다더라’는 등의 ‘카더라’ 소식도 전해지기 시작했다. LG그룹은 LG 우승을 맞이해 가전 29% 할인 등의 이벤트를 진행했다. TV, 냉장고, 청소기 등 15개 제품군에서 각각 500대씩 총 7500대의 LG 가전제품을 29% 할인된 가격으로 선착순 구매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21일 오전 10시 LG전자 온라인 몰에서 구매가 시작됐다. 가전제품은 가격이 만만치 않기에 타 품목보다 매진이 쉽지 않다. 하지만 2시간 만에 LG그룹이 내놓은 할인 가전이 모두 동이 났다. 홈페이지에서 해당 상품을 구매하는 페이지가 열리자마자 2만명에 가까운 대기자가 몰려 접속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LG 계열사들이 다양한 판촉을 내놓으면서 경제활성화까지 기대된다는 관측도 나왔다.

잠실구장에서 유광점퍼를 입고 ‘무적 LG’를 함께 외친 구광모 회장은 ‘광모형’으로 거듭났다. 그간 야구계에는 구단주들이 주목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SSG의 구단주인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팬들과의 소통을 통해 ‘용진이형’이라 불리기를 바랐다. 그 전에 앞서 NC의 구단주인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가 ‘택진이형’이라고 불리며 구단주의 친근함에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구광모 회장이 ‘형’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는 선수단 회식 자리에 동행했다. 그리고 통합우승 행사에서는 고 구본무 선대 회장이 1995년에 직접 마련한 오키나와산 아와모리 소주로 함께 축배를 드는 등 선수단과 기쁨을 아낌없이 나누기도 했다.

LG의 우승은 단순히 한 팀의 우승에만 그치지 않았다. 오랜 염원이 풀렸다는 것만으로 관련된 모든 업계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LG 역시 자신들이 얼마나 사랑받는 팀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다음 시즌을 바라보는 LG 선수단의 책임감이 더 커졌다.

김하진 기자 h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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