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연기와 공 사상 깊이 파고든 더없이 지혜로운 분”

한겨레 2023. 11. 27.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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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가신이의 발자취] 도남 김성철 교수를 기리며
고인의 빈소 모습. 조현 종교전문기자

고인 책 ‘중론…’ 읽고 벅찬 환희심
한국불교 중관사상 논의 본격화시킨
저술 통독하며 중관사상에 매료

“교학과 삶 일치시킨 재가 수행자
지혜 너머 자유로움까지 보셨죠”

여기, 더없이 훌륭한 한 사람이 있었다. 지금, 더없이 지혜로운 한 사람이 적멸의 세계로 들어갔다. 도남(圖南) 김성철!

23일 오후 3시25분 김성철 선생에게 전화했다. 선생의 소개로 한 청년이 출가하고자 내가 사는 실상사를 찾아왔기에 오랜만에 안부 인사를 하고 싶었다. 오랜 신호음에도 받지 않았다. 5시54분 전화화면에 한 통의 소식이 올라왔다. 김성철 교수(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명예교수)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 부고 화면이 흐릿하다. 의식이 먹먹하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말이 이런 경우일까? 실감할 수 없는 사실이라니, 난데없는 소식이라니.

출가 수행자인 나는 재가 수행자인 도남 선생과 인연이 각별하다. 형색의 차이를 두지 않고 서로 믿고 존중하는 사이였다. 내가 공부하다 어느 구절이 풀리지 않으면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그러면 선생은 매우 자세하게 설명해주곤 했다. 세미나장에서도 격의 없이 대화하며 함께 법을 공부하는 기쁨을 누렸다. 만남의 횟수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렇게 선생과 나는 늘 ‘법을 나누는’ 도반이었다.

대략 2004년에 ‘김성철’이란 이름이 나의 삶으로 들어왔다. 선생과 일면식도 없는 나는 먼저 전화를 걸었다. 선생이 쓰신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을 읽고, 벅찬 환희심에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선생에게 나를 소개하고, 좋은 책을 내주셔서 고맙다고 말했다. “늘 연기(緣起)와 공(空)에 대해 나름 천착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이 책을 읽고 의미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그동안 미진했던 것들이 많이 풀렸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 나가르주나 ‘중론’ 공부에 이제는 자신감이 생길 것 같습니다.” 첫 전화에 선생의 음성은 매우 수줍어했다. 이후 공사석에서 선생과 인연이 이어졌다. 이렇게 만남은 ‘법’으로 시작되었고 ‘법’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선생이 입적한 지금 이후로도 선생이 남긴 여러 저작으로 나와 선생의 ‘법의 나눔’은 이어지리라.

선생의 책은 당시 불교계와 학계에 신선한 감동을 주었다. 선생의 책으로 한국불교에서 중관사상에 대한 논의와 천착이 본격적으로 발화되었다. 선생의 번역서 ‘중론’도 여러 번 탐독했다. 이 책은 매우 어렵다는 정평이지만, 나는 ‘중론’ 입문서라 할 수 있는 선생의 책 덕분에 중관사상에 매료되었다. 이후, 선생이 쓰신 많은 저작을 탐독하였고, 나의 공부에 탄력이 붙었다. 연기-공-해탈-자비의 연결고리가 확연해졌다. 논리에 의한 이해, 논리로부터 자유로움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래서 지금도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황망한 가슴을 가다듬고 고요히 생각해 본다. 선생의 책에 담긴 행간을 그려본다. 선생이 전공 중관사상과 불교학에서 추구한 뜻은 인간의 자유와 인간에 대한 자비의 구현이라고 생각한다. 선생은 번역서 ‘중론’ 후기에 이렇게 썼다.

‘공(空)이란 수행이라는 수단에 내재함과 동시에 그 목표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올바른 공관(空觀)의 토대 위에서 수행 생활을 할 때 우리의 분별심(分別心)은 차츰 정화되어 가고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리게 된다. 그리고 인식이 변하면 그 존재가 변하게 된다.’

인간은 망념으로 또 다른 망념을 만들고, 삶의 오류와 고통에 속박된다. 그 속박에서 풀려나려면 연기와 공성의 확연한 이해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선생은 간파했다. 종교의 존재 이유는 인간의 고통 해방이며, 그 고통에서 풀려나려면 인식의 오류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다고 정치한 논리로 전개하고 설명했다. 지혜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이렇듯 선생은 평생 지혜를 추구했고, 지혜 너머의 자유로움을 보았던 것이다.

선생은 겸허하면서 당당했으며, 유연하면서도 사유의 골간은 튼튼했다. 교학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수행자였다. 지금, 수줍은 듯 온화한 얼굴이 떠오른다.

선생과 개인적인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선생이 전화를 주셨다. 학교에서 가르쳤던 제자 한 사람이 매우 영특하고 품성이 좋은데 출가를 희망한다고 했다. 스승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나에게 보내고 싶다했다. 참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에게 이런 신뢰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붓다는 말씀하셨다. 일체가 무상하다고, 왜 그런가? 인연으로 생겨나고 인연으로 멸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와 삶의 이치가 이러하다. ‘인연생 인연멸’이기에 생명의 실상은 공적(空寂)이다. 이 공적의 세계가 ‘무량수(無量壽) 무량광(無量光)’의 아미타불이고 그곳이 정토 세계이다. 선생은 평생 공적한 세계에서 노닐었으니 이미 공적정토(空寂淨土)에 왕생하심은 한치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생은 그러하더라도 남은 벗들의 이 애틋함은 가눌 길이 없다.

도남 김성철 선생이시여! 여기 누가 부르고 있습니까? 지금 누가 듣고 있습니까?

법인 스님/실상사 한주· 전 조계종 교육부장·전 참여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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