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D집다] 식물의 언어를 배우는 사람, 농부

관리자 2023. 11. 27.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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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작물을 갈무리하고 이듬해 농사를 내다보며 밭을 정리하는 절기, 소설이 어느새 지나갔다.

우리 밭에서는 검은콩 '서리태'가 나를 끝까지 기다려주었다.

콩은 농부의 땅을 비옥하게 했고, 어머니처럼 나를 먹여 살리고 씨앗을 남겼으며, 나아가 지역의 문화를 이끌었다.

뽕나무나 느릅나무의 뿌리껍질도, 다래 덩굴과 쇠무릎이나 갈대와 칡과 맥문동의 뿌리도, 생강나무 가지도, 작두콩의 꼬투리도 철마다 달라지는 작물의 약성에 따라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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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작물을 갈무리하고 이듬해 농사를 내다보며 밭을 정리하는 절기, 소설이 어느새 지나갔다. 우리 밭에서는 검은콩 ‘서리태’가 나를 끝까지 기다려주었다. 급한 일들을 먼저 처리하느라 콩이 뒷전으로 밀린 까닭이다. 씨앗으로 모종 내어 아주심고, 긴 장마에 뿌리가 녹을까 애태웠던 콩이었는데, 기특하게도 뒤늦게까지 내 곁을 지켜줬다.

기실 콩과의 인연은 십수년 전 채식하던 시절부터 시작됐다. 채식을 시작하며 의존했던 든든한 양식이 귀농 후 첫 소득작물이 됐고, 씨앗농사를 지을 때도 팥바구미가 곧잘 생기는 팥보다 콩은 저장하기 수월해 꾸준히 재배하게 됐다. 돌아보면 재배가 수월했던 콩 덕분에 ‘농사를 계속 짓겠노라’ 확신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농부가 작물을 선택하는 것 같지만, 어쩌면 거꾸로 작물의 선택을 받는지도 모른다. 콩은 농부의 땅을 비옥하게 했고, 어머니처럼 나를 먹여 살리고 씨앗을 남겼으며, 나아가 지역의 문화를 이끌었다.

글쎄, 내가 생명을 빚지고 있는 식물은 콩뿐만이 아니다. 약초꾼의 집안에 시집온 인연으로, 나는 10여년 전부터 약용작물을 채취하고 경작해왔다. 사실 우리가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산천에 약초 아닌 풀이 별로 없을 정도로 흔하다. 예부터 허리와 무릎이 아프거나, 비염으로 기침하거나, 피부가 간지럽거나, 치매 증상으로 고생할 때면 가까운 식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뽕나무나 느릅나무의 뿌리껍질도, 다래 덩굴과 쇠무릎이나 갈대와 칡과 맥문동의 뿌리도, 생강나무 가지도, 작두콩의 꼬투리도 철마다 달라지는 작물의 약성에 따라 쓰였다.

매달 1회씩 지역에서 ‘풀학교’가 열리곤 하는데 그곳에서 수많은 약용 풀, 일명 허브를 만나는 수업은 ‘은인을 만나기 위한 과정’이라고 배웠다. 은인은 다름 아닌 궁합이 맞는 풀을 이른 것이다. 만일 나에게 은혜를 베푸는 식물을 만난다면 목숨을 살리고 연장할 터이니 마땅한 비유였다.

농부는 촘촘한 생태계 그물망에 작물·곤충·토양·미생물·사람·동물 등의 사이를 잇는 결절점으로서, 농생태계를 수호하기도 하지만 다른 종과 먹고 먹히는 경합을 벌인다. 안타깝게도 근현대에 들어서서는 농업이 우리의 조상, 우리의 스승, 우리의 자매인 식물들을 몰라보고 괴롭힘으로써 우리 자신의 지속 가능한 삶터를 얼마나 파괴했는지 낱낱이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가 제 무덤을 파거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어리석음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지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야 할 때다.

생명의 가치는 돈으로 셀 수 없건만,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원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쩔 도리 없이 눈앞의 이익을 놓지 못한다지만, 경제(economy)는 살림살이(oikonomia)에서 기원한 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제적인지 알기 위해서는 애초에 살림살이가 지속 가능한지부터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인간은 언제까지 식물을 쥐락펴락하는, 허울뿐인 최상위 포식자를 자처하고 있을까. 하늘과 땅의 도움으로 결실을 맺는 식물 덕분에 우리가 살아간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이들이 더 많아지길 바랄 뿐이다. 필자는 이제 알알이 영그느라 고생하신 우리 밭 검은콩님에게 가봐야겠다. 공손한 마음으로, 총총.

박효정 농부와 약초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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