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지폐 모델, ‘성균관 관계자’들이 휩쓸었네요

박종인 기자 2023. 11. 2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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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세종부터 신사임당까지
지폐 모델 살펴보니
21세기 대한민국 지폐 모델은 모두 조선 왕국 국립학교 '성균관 관계자'다. 5만원권 성균관 학부모(신사임당), 1만원권 성균관 '이사장'(세종), 5000원권 성균관 학생(이이), 1000원권 성균관 출신 성균관 교장(이황). /박종인 기자

조선 왕국 돈인가 대한민국 돈인가. 21세기 대한민국에 유통되는 각종 지폐 인물 모델은 100% 조선 시대 사람들이다. 공통점이 여러 개 있다. 모두 ‘성균관 관계자’, 그리고 ‘성리학자’에다가 ‘문인(文人)’.

우선 조선 시대 국립대학교에 해당하는 성균관. 1만원권 모델 세종은 당시 국립대에 해당하는 성균관 ‘이사장’, 5000원권 모델 이이는 성균관 학생, 1000원권 모델 이황은 모교 성균관 출신 성균관 교장(대사성)이다. 그리고 5만원권 모델 신사임당은 성균관 학생 이이 학부모. 신사임당을 제외하면 세 사람 모두 문인이다. 100원 동전 모델 이순신은 이들 성균관 출신 문인과 달리 군인이다. 100원 동전을 포함해 액면가를 기준으로 하면 학부모 > 이사장 > 학생 > 교장 > 군인 순으로 서열을 매길 수 있다. 도대체 언제 이들을 모델로 돈을 찍어냈을까. 답은 박정희 정부 시대다.

5‧16 군사쿠데타 1주년인 1962년 5월 16일 100환짜리 지폐가 나왔다. 앞면 모델은 저축통장을 들고 있는 모자(母子)였고 뒷면은 독립문이었다. 1970년 11월 30일 100원짜리 동전이 나왔다. 모델은 이순신이었다.

1972년 7월 1일 5000원권 지폐에 ‘성균관’ 졸업생 이이가 등장했다. 뒷면은 서울 소공동에 있는 한국은행 본점 그림이 실렸다. 1973년 6월 세종이 1만원권 모델로 등장했다. 세종은 4‧19 직후인 1960년 8월 15일 1000환권 지폐 모델로 나온 이래 꾸준히 대한민국 지폐에 등장했다.

세종이 나오고 석 달 뒤인 1973년 9월 1일 이순신이 500원권 지폐에 등장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지폐에 처음 등장한 군인이다. 뒷면에는 아산 현충사 풍경이 실렸다. 그런데 이 500원권 지폐가 1982년 6월 12일 동전으로 대체됐다. 군인 이순신은 사라지고 모델은 학(鶴)으로 바뀌었다.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서명한 오백원 시쇄권.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1975년 8월 14일 1000원짜리 지폐가 발행됐다. 이때 등장한 모델이 이황이었다. 뒷면에는 도산서원이 그려졌다. 또 2년 뒤 새로운 5000원권이 나왔다. 앞면은 옛 모델 이이와 동일했고 뒷면 그림은 한국은행 건물에서 이이가 태어난 강릉 오죽헌으로 대체됐다. 2006년 이 오죽헌 그림은 이이 어머니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로 대체됐다. 이 초충도 작가가 신사임당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2007년 1000원권 지폐 뒷면에 있던 도산서원 그림이 ‘계상정거도’로 대체됐다. 이 또한 정선이 그린 도산서원 풍경화다.

그리고 2009년 6월 23일 신사임당을 모델로 한 5만원권 지폐가 탄생했다. 1970년대에 집합한 성균관 출신 인물들에 이어 성균관 학생 이이 어머니가 액면가 최고 지폐 모델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 지폐 전속모델 이이와 이황. 조선 시대 대표적 당파인 서인과 동인 계보를 만든 인물들이다. 두 사람 모두 성균관에서 공부한 학생들이다. 이이는 열세 살에 이미 과거에 장원급제한 모범생이었다. 각종 과거에 아홉 번 수석을 차지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던 인물이다. 이황은 성균관 졸업 후 쉰한 살에 모교 교장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조선 시대 인물, 그중에서도 ‘성균관 관계자’들이 대한민국 지폐에 등장한 이유는 박정희와 깊은 관계가 있다. 쿠데타 성공 직후 박정희는 이렇게 주장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네 민족이 걸어온 고난의 역사 속에서 교훈과 힘을 찾아내라’는 말로 우리 가슴속에 울려 퍼진다. 우리 민족사는 상처투성이의 영광이지만 그 안에도 주옥(珠玉)이 있고 보화(寶貨)가 있다.”(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갈 길’, 동아출판사, 1962, p97) 박정희는 세종과 성리학과 이이와 이황, 화랑도와 이순신을 ‘계승해야 할 보화’로 꼽았다.

박정희는 성리학이 끼친 해악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성리학을 비판했지만 이들 학자를 키워낸 학문으로서의 성리학은 인정했다. 또 세종에 대해 한글로 민족고유문화를 육성하고 문화·정치의 국립연구소인 집현전을 활용한 인물로 평가했다. 또 ‘국난 극복을 위한 애국 전통’으로 신라 화랑도를 꼽고 ‘그 화랑도를 조선에서 찾는다면 동양 해전(海戰)의 귀감 이순신 장군’이라고 평가했다.(박정희, 앞 책, p104)

박정희는 1963년 1월 21일 이순신 묘를 사적으로 지정하고 1967년 3월 18일 현충사 또한 사적으로 지정했다. 이순신 묘가 사적으로 지정되던 날 이이가 태어난 강원도 강릉 오죽헌도 보물로 지정됐다. 1969년 5월 31일에는 이황을 모신 경북 안동 도산서원을 사적으로 지정했다. 1970년 5월 27일 세종릉인 경기도 여주 영릉을 사적으로 지정했다. 박정희는 1973년 5월 30일 경주에 화랑교육원을 세우고 1978년 6월 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을 개원했다. 설립 목적은 ‘한국학의 진흥과 민족 문화의 창달’이니 세종이 만든 ‘문화·정치 국립연구소 집현전’과 취지가 같다.

이들 네 인물 관련 장소 성역화 작업과 ‘성균관 관계자들’이 대한민국 지폐 모델을 휩쓸어간 시기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 ‘전통 아닌 전통’이 21세기까지 이어지더니 5만원권에는 성균관 학생 학부모 신사임당이 등장했다. 500원 지폐에 나왔던 군인 이순신은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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