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웅과 임윤찬, 자식보다 낫네

최여정 작가 2023. 11. 25.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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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최여정의 다정한 안부]
콘서트장 전체에 방석 깐 임영웅
“귀한 손님으로 환대받은 기분”
일러스트=김영석

서울 동대문역 근처에서 모임이 끝난 뒤 저녁을 먹기 위해 어느 노포 백반집을 찾아갔다. 붉은색 궁서체 간판이 오래된 맛집다운 신뢰감을 주면서 허기를 더욱 자극한다. 수명을 다한 전구가 온 힘을 짜내 발광하는 불빛이 어둑한 가게 현관문을 여는데, 마치 ‘나니아 연대기’의 옷장 문을 연 것처럼 환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가게의 원래 벽지는 무엇이었을까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사면 벽과 천장까지 한 치의 여백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붙여 놓은 크고 작은 포스터 수십 장의 얼굴이 일제히 우리를 반긴다. 임영웅이다.

식당 의자에 앉아 찬찬히 가게를 둘러보고 있으려니 더욱 감탄이 나온다. 전기를 켜고 끄는 콘센트 위에도 손톱만 한 임영웅 스티커가 하트를 날리고 있고, 뜨거운 지난여름 식당을 찾은 손님들의 더위를 식혀주던 철 지난 에어컨의 썰렁한 빈 몸통을 감싼 대형 브로마이드에는 빨간 스웨터에 립글로스를 반짝이는 임영웅이 윙크를 하고 있다. 이 정성스러우면서도 놀라운 솜씨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궁금해하던 차에 주방으로 통하는 문이 덜컥 열리며 ‘어서들 오슈’ 인사 소리가 들린다. 6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백반집 여사장님이다.

자연스레 식사 자리 대화는 임영웅으로 모아졌다. 임영웅 노래, 들어본 적 없고 임영웅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도 본 적 없었지만 ‘노년층 팬덤의 히어로’, ‘국민 손주’ 같은 수식어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어른들의 덕질’, ‘임영웅 팬덤 영웅시대’ 같은 연구 논문까지 나오는 현상이 꽤나 흥미롭던 참이었는데, 그날 함께 식사한 70대 퇴직 국문과 여교수님에게서 답을 얻었다.

가수 임영웅

“나이가 들면서 신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거든요. 젊을 때 잘나가던 친구들도 점점 삶에 의욕이 없어지는 거야. 그런데 요즘 내 또래 친구들이 임영웅 전국 콘서트에 다 따라다니는 걸 보면, 노년의 외로움을 건강하게 해소하도록 돕고 활기를 주는 그에게 상을 줘야 할 판이죠.” 60~70대 노인들이 남사스럽게 무슨 ‘팬질’이냐고 욕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자식들도 잘 찾아오지 않는 독거노인 시대에 임영웅이 자식보다 낫다더라, 라며 모두 웃었다.

‘자식보다 나은’ 사람이 하나 더 있다. 임윤찬이다. 트롯계에 임영웅이 있다면 클래식계에는 임윤찬이 있다. 젊은이만의 분출구인 줄 알았던 지극한 팬심이 중장년층의 메마른 가슴에도 꿈틀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한 주인공이다. 2022년 6월,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최연소(18세) 우승을 한 임윤찬을 향한 팬덤 역시 신드롬급이다. “아기가 아직 어려서 육아를 도와주시는 아주머니가 계시거든요. 그런데 며칠 전에는 집에 들어오시자마자 임윤찬 피아니스트 곡부터 틀고 일을 시작하시더라고요.”

얼마 전에 만난 한 유명 클래식 칼럼니스트의 전언이다. 찬바람 맞으며 임영웅 전국 콘서트를 함께 완주하고 이전에는 모르던 클래식곡의 매력도 임윤찬 피아노 연주로 새삼 깨달으며 두근거림과 활력, 삶의 위로를 얻는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오른쪽)이 지난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지휘자 마린 올솝과 협연하는 모습. 당시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크레셴도’는 올해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였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마침 임영웅과 임윤찬을 무대에서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연말 콘서트 예매 오픈이 시작되자 팬들은 뜨겁게 호응했다. 지난 10월 서울을 시작으로 내년 초 광주까지 이어지는 ‘임영웅의 I’M HERO’ 콘서트와 역대 클래식 콘서트 최대 규모라 할 수 있는 임윤찬의 서울 롯데콘서트홀,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 연속 공연 모두 매진. 콘서트 규모나 어마어마한 관객 동원도 놀랍지만, 특히나 임영웅 서울 콘서트가 끝난 뒤 함께 전해지는 뒷이야기들에 혀를 내둘렀다. ‘콘서트의 주인공은 가수’라는 규칙을 완전히 뒤엎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팬심’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하고 이해했나. 악동 같은 이미지의 어느 대형 팝스타는 한 시간이 넘도록 무대에 등장하지 않아 팬들의 애간장을 끊어놓기 일쑤이고 약속된 곡들을 채 부르지도 않은 채 콘서트를 끝내는 일도 허다했다. 나를 보러 오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하는 무언의 규칙 속에서도 팬들은 오히려 환호로 응답하지 않았나. 하지만 임영웅은 달랐다.

콘서트에 다녀온 어머니들의 마음을 홀랑 빼앗은 주인공은 방석이었다. 서울 콘서트 무대인 KSPO DOME 1만5000석 전부 방석을 깔아두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대접받은 공연은 처음이다” “나이가 드니 엉덩이에 살이 없어서 배기고 아픈데 푹신한 방석을 그냥 주더라”라는 칭찬이 쏟아졌다. 여기에 더해 전국 콘서트마다 방석 색깔을 달리해 컬렉팅 재미까지 주니 ‘임영웅 방석 전부 수집 완료’라는 태그를 붙인 인증 사진으로 카톡 프로필 사진을 바꾸고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밖에 없다.

여자 화장실 앞에 길게 늘어선 ‘어머님 팬’들을 본 임영웅이 간이 화장실을 추가로 더 설치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며, 콘서트장 밖에서 부모님들을 모시고 가려고 기다리는 효성 깊은 자식들까지 잊지 않고 대기 장소까지 만들어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 콘서트 나도 한번 보고 싶네 라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임영웅에게 홀딱 반한 이유는 그냥 ‘관객’이 아니라 ‘환대받는 손님’이 된다는 것. 감동한 어머니는 다음 주에 있을 지방 콘서트 원정 관람을 위해 가방을 싸고 있을 것이다. ‘아들아, 엄마는 콘서트 보러 친구들이랑 부산 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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