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늘 발목까진 똥, 그 똥이 어쩌다 허리까지 차오르면…

임인택 2023. 11. 24.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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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표 폴 오스터의 역작
장편 ‘선셋 파크’ 이후 10년만
한 인물의 네 가지 삶 복원
“선택한 길과 선택 안한 길
같은 시각 같이 걷는 게 현실”
이토록 기발한 문학적 구현
미국 작가 폴 오스터(76)가 10년 만에 펴낸 2017년 장편 ‘4 3 2 1’이 이달 국내 번역 소개됐다. 폴 오스터의 가장 방대한 작품으로 작가의 실제 삶이 씨줄날줄이 되고 있다. ⓒLotte Hansen, 열린책들 제공

4 3 2 1(전 2권)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l 열린책들 l 각 권 2만2000원

조심해야 한다, 이 소설. 조금 과장하자면, 일단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마지막 문장까지 끌려가지 않을 재간이 없을 것이다. 소설 1권이 806쪽, 2권이 735쪽이다. 작가의 숱한 작품 가운데 단연 길다. 과장이 아니다.

또 조심해야 한다. 구성된 순서대로만 읽자면 혼선이 가능해진다. 뭐 하자는 거지? 뒤죽박죽된 게 삶이란 말인 게지? 그게 작가의 의도일 리는 없다. 꼭 띄엄띄엄 읽길 권장 드린다. ‘뉴욕 3부작’ 등으로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폴 오스터(76)의 경이로운 신작 ‘4 3 2 1’(전 2권)의, 말하자면 사전 주의사항이다.

작가 자신의 실재한 삶과 미국 현대사라는 팩트를 바탕 삼은 한 인물의 삶이 네 개의 시나리오로 유장히 펼쳐진다. 1947년 3월 미국 뉴어크에서 태어난 아치볼드 아이작 퍼거슨이 그 주인공이다. 20대로 성장하기까지의 삶이 퍼거슨 1, 퍼거슨 2, 퍼거슨 3, 퍼거슨 4의 경우로 갈려 나가는 독특한 형식이 곧 제목이다. 다만 네 퍼거슨의 네 가지 유년, 이후 네 가지 학창시절, 이후 네 가지의 20대가 한꺼번에 차례로 소개될 뿐이다. ‘퍼거슨 1’의 생애를 먼저 골라본 뒤 다른 퍼거슨을 만나보는, 그러면서 그들의 삶은 언제 어디서 갈리는지 견줘보는, 독법을 번역자부터도 1년 넘게 따랐던 까닭이다.

삶은, 어떤 원인은 어떤 결과이고 우연과 필연만큼은 뒤죽박죽 섞여 있다. 예측을 불허한다. 네 가지 퍼거슨을 상정해본들 지금의 퍼거슨-폴 오스터의 나이가 된다, 살아 있다면 말이다-은 하나일 것이다. 지금 퍼거슨은 또한 미래 있을 법한 여러 퍼거슨 중 하나(의 시작)일 것이다.

‘미국인 퍼거슨’의 시초부터가 이러한 삶의 본질을 폴 오스터답게 풍자한다. 네 퍼거슨이 공유하는 유일한 공통의 과거인데, 바로 이름의 연원이다. 유대계 청년 이사크 레즈니코프가 열아홉에 러시아를 탈출해 20세기 첫날 뉴욕항에 도착한다. 도움 안 되는 이름 대신 미국식 “록펠로”로 개명하라고 동포가 권한다. 2시간을 기다려 입국심사 차례가 되었을 땐 생각이 나질 않는다. 청년은 자기 머리를 때리면서 “이크 호브 파게센(잊어버렸습니다)!”이라고 이디시어로 말하고, 직원은 ‘이커보드 퍼거슨’으로 적는다.

퍼거슨의 또 다른 시원이자 절대적으로 중요한 인물인 로즈의 사례도 그렇다. 퍼거슨을 꿰뚫어 보는 아름답고 현명한 어머니 로즈. 21살 로즈에게 서른 가까운 스탠리가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청혼한다. 로즈는 최소 열여덟 가지를 고민한다. 스탠리의 많은 장점을 허무는 사이사이 세 가지는 죄다 “아니, 스탠리를 사랑하지 않았다”이다. 러시아에서 900일간의 레닌그라드 전투가 막 끝났던 1944년 1월말이었다. 로즈의 고민이 108가지로 번뇌했을지언정, 결혼 작정까지 달라지진 않았을 테고, 그럴수록 한 결론에만 ‘봉착’했을 거다. 이 결혼을 선택(안)한들 “그다음은, 누가 알겠는가?”

퍼거슨 1의 삶을 보자. 이민 2세대 스탠리는 가전 판매상으로 비로소 기반을 잡는다. 중산층 로즈가 앞서 꼽은 스탠리의 장점 중 하나다. 퍼거슨은 이들 부부가 세 아이를 유산한 뒤에야 차례를 맞는다. 책과 음악을 즐기는, 아디오스(잘 가), 트라이포드(삼각대) 같은 특정 단어에 매료되는 감각적 아이. 외가 덕분이지 싶다. 영문학 교수가 되는 이모 밀드러드의 조카 선물이 그랬다. 임신 중 로즈에게 책을 읽힌 이도 언니 밀드러드다. (책과 음악에 대한 향취를 폴 오스터가 풀어내는 방식은 소설 밖 소설에 대한 욕구를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어린 퍼거슨은 “어떤 질문에는 대답이 없”다 느끼고,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이 있고, 가끔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들보다 훨씬 더 생생할 수 있음을 이해”해간다. 뉴욕주 최초의 대학으로 1968년 가장 격렬한 학생운동 현장이 된 컬럼비아 대학에 진학(1965)해서도 학교 기자로 활동하고, 졸업 뒤 첫 직장으로 신문사를 선택하는 경로는 바로 이 우연과 필연이 노정한 것이리라.

다만 이런 줄거리는 의미가 크지 않다. 천박하고 방탕한 두 형들 때문에 스탠리가 곤경에 빠지고, 야구 유망주였던 퍼거슨이 교통사고로 왼손 엄지 마디를 잃고, 대학생 때까지 5년을 내리 사랑한 단 한 사람 에이미와 끝내 결별한 일들을 주요 생애(의 갈림길)로 설명할 수 있는 퍼거슨 1에게 6살 때 나무에서 낙상해 크게 다친 일(퍼거슨 2), 형제의 배신에 의한 아버지의 죽음(퍼거슨 3), 밀드러드 이모의 의붓아이 노아와 한때 남편(작가)이 준 기억(퍼거슨 4) 따위는 얼마나 별개 인물의 별개 사건이었을까.

폴 오스터는 여기서 두 가지를 표명하는 듯하다. 바로, 삶의 ‘졸가리’가 아닌 ‘군더더기’의 복원, 그리고 존재(세계)와 존재(세계)의 서로 압착된 상관성이 그것이다. 1950~60년대 한국·베트남 전쟁, 대통령 암살, 인종 갈등, 타살 등 현대사 옆에 개인사를 붙인 이유이고, 퍼거슨의 개인사와 개인사를 평행 시킨 이유이다. 퍼거슨 2가 6살 때 “자신은 그대로인 채 다른 일들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고, 성인이 된 퍼거슨 1이 세계와 개인 사이 분리된 듯 이어진 ‘동심원 이론’을 제기한 이유다. 마침내 이 소설 속에서 작가가 되어 ‘4 3 2 1’을 쓰는 퍼거슨 4는 작품에 대해 아예 이렇게 말한다. “…선택받은 길과 선택받지 못한 길들을 같은 사람이 같은 시각에 걷고 있다는 그 평행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그들의 그림자 같은 사람들, …현실은 일어날 수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를 위해 자신의 과거에 대한 섬세하고 치열한 관찰자로서 폴 오스터가 견지하는 자세와 그렇게 발굴해낸 ‘유약한 삶’의 의미들은 도드라진다.

소설엔 “최초”와 “가장”과 같은 최상급 표현이 실로 많고 특히 퍼거슨 1, 3, 4에 고루 걸쳐 있다. 2에는 없냐고? 퍼거슨이라는 인물의 최초 소멸을 담은 게 2다.

문학, 예술, 저널리즘, 진보적 세계관 등에 대한 그의 시선은 예리하고 생동감 넘친다. “진실을, 모든 진실을, 오직 진실만을 말하라. 바보 같은 진실은 바보같이 말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진실은 마음에 들지 않게 말하고 슬픈 진실은 슬프게 말하라”라는 르몽드 창간인 위베르 뵈브메리의 격언이 태도로서 이야기로서 이처럼 형상화된 소설이 있을까.

그래서 진실은 무엇인가. “눈부시게 독특”하다는 평가와 함께 2017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던 이 육중한 소설에서 딱 한 대목을 ‘선택’해야 한다면? 야구를 포기한 퍼거슨 1에게 고등학교 때 코치 마티노가 한 말이다.

“얘야, 모두들 매일매일 발목까지 똥에 담그고 사는 거지. 하지만 가끔씩, 그 똥이 무릎이나 허리까지 차오르면 말이야. 그냥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는 거야. 너는 잘 나아가고 있는 거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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