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국과 함께하는 명작 고전 산책] <77> 산해경

서부국 서평가·‘고전식탁’ 저자 2023. 11. 2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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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종 괴수·요괴·神 총망라…고대중국 신화집이자 지리서

- 허난성 뤄양을 중심으로 서술
- 오방으로 굽어본 산·바다·하늘
- 18경, 한자 3만1000자로 풀어
- 최소 2000년 전… 지은이 미상

- 자연숭배와 사후세계 믿음 등
- 현실·환상 넘나드는 백과전서

- 진나라 땐 500년간 유통 금지
- 영화 ‘헤어질 결심’에 등장도

75회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 수상작 ‘헤어질 결심, 2022’(박찬욱 감독)를 본 이는 여주인공 서래(탕웨이 분)가 지녔던 책 한 권을 기억한다. 그녀는 외할아버지(계봉석)가 필사한 이 책에 자기 글을 보탰다. 원서는 ‘산해경(山海經)’. 고대 중국 지리서가 21세기 은막에 나타났다.

‘헤어질 결심’은 산에서 시작해 바다에서 끝나는 서사를 보이는데 이는 산해경 서술과 비슷하다. 허난성 뤄양(洛陽)을 중심에 두고 오방(동·서·남·북·중앙)으로 땅과 하늘을 살펴본 바를 3만1000여 자 한자로 풀었다.

모두 18경이다. 산경(山經)으로 시작해 5경(남산·서산·북산·동산·중산경)이 잇따른다. 다음은 해경(海經), 8경(해외남·서·북·동경, 해내남·서·북·동경). 이어서 대황경(大荒經)인데 4경(대황동·남·서·북경), 마지막은 해내경(海內經)이다. 고대 중국인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였다고 믿었다. 중국 땅덩어리 안쪽이 해내, 바깥쪽을 해외.

산해경에 나오는 괴수들과 여러 신. 관흉국 사람은 가슴에 구멍이 뚫렸고, 반인괴수 카이메이쥬는 사람 얼굴이 아홉 개다.


▮고대 중국 산하를 돌아본 산해경

산해경은 고대 중국 산하를 굽어봤다. 산(산맥) 강(바다) 나라(종족)들이 나온다. 얘기 갈래는 지리 신화(전설) 요괴 괴수 신 신선 천문 제사(祭事) 동식물 의료 광물(귀금속) 무속 역사 종교에 이르니 백과전서다. 자연을 숭배하고 두려워한 고대 중국인이 겪은 현실과 환상이 넘실거린다. 사후세계를 믿으며, 하늘과 소통하고, 무병장수를 빌었다. 고대 중국인이 그려낸 요괴·괴수·신이 1200종을 넘는다. 인어 불사조 봉황 비익조는 현대인에게도 익숙하다.

고대 중국엔 어떤 식물이 살았는지 실마리를 준다. 약효나 쓰임새가 신통하다. 단속(丹粟)은 주홍색 좁쌀인데 신선들이 서너 알 먹고도 배 두드린다. 만태(曼兌)는 섭취하면 지혜를 얻으니, 학동이 좋아했을 듯하다. 여드름을 치료하는 초목도 보인다.

산해경은 기서(奇書)다. 내용도 그렇지만, 누가 언제 어디서 지었는지 알 수 없다. 2000여 년 전 역사에 등장한 건 확인된다. 도연명 고염무를 포함한 옛 중국 시인들은 산해경을 소재로 시를 지었다. 한자 문화권에 잘 알려졌다. 조선 시대 박지원 이덕무 같은 문인이 읽었다. 신흠(‘독산해경’) 정약전·이청(‘자산어보’)은 저술에 끌어다 썼다. 상상력이 상품인 현대에서도 마찬가지다. ‘헤어질 결심’에서 보듯.

이 산해경은 500여 년간 사라졌었다. 기원전 526년 초나라에서 흘러나와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로 넘어간 후 그렇게 됐다. 진시황 손을 탄 탓. 중국 산천 지리를 기록한 산해경을 ‘극비 보안 문헌’으로 분류해 궁궐 내에 감췄다. 500여 년 후 진을 무너뜨린 한나라가 산해경을 파냈다. 전한 유흠이 내용을 정리하고 후한 왕충과 조엽이 주해를 달았다. 이 문헌은 사라졌고, 동진 곽박 주해본은 남았다.

청나라 필원이 편찬한 ‘신교증산해경’, 원가(袁珂)가 편집한 ‘산해경교주’(1949년)엔 내용이 보태졌다. 중국 역사를 띄우는 작업. 중국 창세신화가 두드러졌다. 20세기 들어 서구도 신화학을 연구하면서 산해경에 관심을 두었다.

산경은 산줄기에서 나온 산들이 몇 리를 두고 이어지고, 어떤 동식물이 산다고 반복 서술한다. 영화 ‘헤어질 결심’ 포스터는 이 같은 서술을 활용했는데, 원전 내용을 알지 못하면 첫눈에 이해하기가 힘들다. 포스터가 특정한 산은 서두산(鋤頭山). 지도 그림을 보면, 물길 따라 얘기가 흐르는데 탕웨이가 직접 글을 썼다.

해경 1편(남산경)이 언급하는 첫 번째 산은 직산, 마지막 산은 남우산. 산경에만 26개 산맥, 447개 산을 만난다. 수계는 258곳, 땅 348곳, 식물 525곳, 동물 473곳. 이중 현재 140개 산과 이름이 일치한다. 고대에 지리를 꼼꼼히 조사했다는 방증.

산경 중 동차 2경이다. “고봉산(姑逢山) 정상은 황량해 초목이 자라지 않는다. 하지만 산속엔 황금과 아름다운 옥이 많다. 이곳엔 폐폐라는 여우 비슷한 짐승이 산다. 이 녀석은 날개가 두 개 달렸고, 기러기 울음소리를 낸다. 폐폐가 나타나면 천하에 큰 가뭄이 든다.”

반인반수는 상상력에서 나왔지만, 당대 소망과 생활상도 배었다. 불을 제어하는 능력을 갖춘 괴수에서 지역성이 읽힌다. 거주지나 숲에 불이 자주 나 주민은 방화(防火)를 소망했을 터이다. 사람 얼굴을 한 물고기는 어족은 알을 많이 낳고, 생장이 빠르다. 인면어(人面魚) 토템이 생겼다. 어민은 물고기처럼 후손이 번영하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농업 지역에서는 가뭄(홍수) 풍년(흉년)을 예고하는 괴수가 나온다. 고대 중국인이 앓았던 질환도 드러난다. 치질 불면증 우울증 설사 중풍 같은 질병이 그 예이니 병력과 삶은 같이 걸어 다닌다.

세계 고지도인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원본은 1602년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와 명나라 학자 이지조가 만들었다. 중화사상을 반영해 중국이 중앙에 있다. 타원형 지도이며 중앙이란 공간 개념은 무의미하다.


▮인문·문학성 강한 ‘해경’

해경에 들면 인문·문학성이 강해지고, 나라 얘기가 풍성하다. 신화 역사 토템 풍속에서 자연·인생관이 솟아오른다. 도교나 무속 신앙이 내린 뿌리가 보인다.

해외남경 중 소인국인 주요국(周饒國)을 보자. 주민 평균 키가 7~8치(21~24㎝). 행동이 반듯하고 하루에 1000리를 갈 정도로 재빠르다. 300살까지 사는데 야수도 그들을 해치지 못한다. 해곡(海鵠)이란 괴조만은 피해야 한단다. 주요국인을 잡아채 그 자리서 꿀꺽 삼키니까. 그래도 해곡 배 속에 들어간 주요국인은 죽지 않는다니 중국인은 고대부터 허풍이 세다.

소인국이 나오니 거인국도 등장한다. 해외동경 편이다. 나라 이름이 대인국(大人國). 이곳 아기는 엄마 배 속에서 36년간 자란 후 세상에 나온다. 이미 이때 백발이고 몸집이 크다. 걸어 다닐 수 없어 배로 이동하거나, 구름과 비를 타고 날아다녀 용 종류라고 봤다.

소인국 거인국은 동서양에서 단골인 신화 소재다. 이 계통에 하나가 더 있다. 여인국인데 해외서경 편에서 만난다. 여자국(女子國)으로 불리는데 무함국 북쪽에 자리 잡았다. 국경은 황지(黃池)란 연못으로 둘러싸였다. 두 여인이 동거하며 황지서 목욕해 아이를 밴다. 남아는 3살이 되기 전에 모두 죽어버리므로 이 나라엔 여자만 남는다. 서양 아마조네스 신화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 동서 문명이 갖춘 개성이 대비된다.

식인 얘기도 빠지지 않았다. 사람고기를 먹는 식인국은 해내남경 편에 속한다. 이른바 효양국(梟陽國)으로 이 나라 사람은 입이 큰 검은 털북숭이고 발이 거꾸로 달렸다. 만난 사람이 웃으면 이마가 가려질 정도로 입을 벌려 같이 껄껄댄 후 그를 잡아먹는다. 중국 무협 영화나 수호지 같은 영웅호걸 소설에 나오는 식인 얘기는 그 원류가 산해경인 셈이다.

중국 신화는 후속 편집 문헌에서 점점 분량이 늘어난다. 여러 신이 등장하는데, 신농만큼은 빠지지 않는다. 신농 후손들이 사는 나라가 호인국(互人國). 그들은 비를 다루는 신통력을 지녔다. 구름과 안개를 몰고 땅과 하늘을 오르내린다. 사람 얼굴에 양손이 달렸고, 몸통은 물고기를 닮았다니 신화가 아닐 수 없다.

산해경 마지막인 18편(해내경)에 조선(朝鮮)이 등장한다. 동해 해내, 북해 모퉁이에는 조선과 천독국(天毒國)이 있다고 썼다. 이 나라 백성은 물가에 살며, 어질고 착해서 살생하지 않는다. 조선은 고대 지명으로 현재 북한 평양 일대를 말한다.

동서양 신화는 현대 들어 재해석돼 옷을 갈아입었다. 산해경은 오래전부터 그 교과서였다. 이 중국 고전은 온갖 소재를 단조롭게 설명하기에 아기자기한 감흥을 느끼기는 어렵다. 읽는 이에게 지루함을 주기도 한다. 그 대신 ‘꿈보다 해몽’이라고 현대 감각으로 들여다보면 의외로 굵직한 교훈을 건진다.

가령, 우(禹) 신화는 물길을 잘 다스려야 나라가 유지된다는 ‘치수지국(治水之國)’을 전한다. 현대는 고대보다 문명이 발달했는데 치수도 같은 수준에 올랐을까. 의문이 든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가 물난리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인명·물자 피해가 반복된다. 이런 생각을 이어가게 하는 산해경은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현대인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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