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산행기] 건강 기원하며 팔공산으로

박영민 서울시 강남구 논현로 2023. 11. 23.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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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비로봉에서 인증샷을 찍은 필자.

팔공산은 대구광역시와 경북 영천시, 칠곡군, 경산시 등 여러 지역에 걸쳐 있다. 신라시대부터 공산, 중악, 부악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 왔다. 광주 무등산과 부산 금정산과 더불어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산 중 하나다.

팔공산 비로봉(1,193m) 좌우로 서봉과 동봉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곳에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를 비롯해 150여 개의 사찰이 곳곳에 있어 불력이 왕성한 곳이기도 하다.

새벽 5시 30분 지하철 첫차를 타고 수서역으로 이동해 대구로 향하는 SRT 고속 열차에 몸을 싣는다. 오전 8시 10분 내가 탄 열차는 동대구역으로 스르르 미끄러져 들어간다. 역에서 나와 본 대구 날씨는 흐림이다. 폭염 때문에 덥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되레 산행하기에 좋은 날씨다. 나는 곧바로 택시를 타고 들머리인 수태골로 향한다.

오전 8시 50분 수태골 넓은 주차장에 도착한다. 이곳에 위치한 등산 안내소 앞에서 대구 산객 어르신 한 분을 만난다. 어르신께 100명산에 오르기 위해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친절하게 반겨 주신다.

서봉 가는 길을 어르신께 여쭈어본다. 그러자 그는 등산로를 일러주며 어제 내린 비로 장군 바위 리지가 미끄러울 거라 걱정을 해주신다. '그렇게나 위험할까?'란 생각이 들었지만 물러날 순 없다. 일단 올라가서 상황을 보기로 한다.

어르신은 산어귀에서 소나무와 참나무 줄기가 연결되어 자란 연리목을 소개해 주신다. 그러면서 그는 "옛 조상님들은 연리가 나타나면 귀하고 경사스러운 길조로 여겼다"면서 연리목을 어루만지시며 나의 안전한 산행을 기원해 주신다. 나는 그 다정함에 감사했다.

나보다 발걸음이 빠르신 어르신을 보내드리고 천천히 팔공산으로 접어든다. 잠시 후 오른쪽 계곡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폭염이라 몸도 마음도 지쳤던 요즘이었는데, 시원하게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니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등산로 따라 있는 우거진 참나무 숲길 사이로 안개가 자욱하다. 그 아래 키 작은 며느리밥풀꽃들이 정겹게 피어 있다. 또 이곳에는 싸리나무와 잎이 제법 넓은 쪽동백나무, 오리나무, 활엽수림이 숲을 가득 메우고 있다.

고도를 조금씩 높일수록 경사가 가팔라진다. 불규칙하게 놓인 가파른 바위 계단을 따라 오른다. 잠깐 편한 자드락길이 이어지나 싶으면 다시 또 힘들고 고된 길이 나타난다. 나를 거침없이 막아서는 듯하다. 누군가 내게 팔공산에 오르는 건 쉽지 않다고 했는데 정말이다. 과거 수많은 민초들이 짚신에 신갈나무잎 깔고 팔공산을 오르내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어느덧 동봉 1.9km 이정표 앞이다. 앞으로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바위가 산안개 속에서 위용을 뽐내고 있다.

지도를 보니 이곳은 암벽 훈련장이다. 대구 산악인들이 훈련하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이 바위를 보며 잠시 자리에 앉아 이온음료와 행동식을 먹는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기에 집에서 가져온 행동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한다.

다시 걷는다. 밤새 내린 비 때문에 바위 계단이 빙판처럼 미끄럽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해서 오른다. 나를 둘러싼 싸리나무, 신갈나무 숲속의 커다란 바위에 폭포수가 흘러내린다. 시계를 보니 산행한 지 어느덧 1시간이 지나 있다.

산객들의 소망을 담고 있는 소원탑을 지나, 비로봉, 동봉, 서봉으로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 앞이다. 명산 인증을 하기 위해 우선 인증 지점인 비로봉부터 오르기로 한다. 그리고 나선 동봉을 거쳐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하기로 계획한다.

대부분의 산은 능선까지 오르기가 힘들지, 능선에 오르고 나서는 쉬엄쉬엄 오를 수 있다. 하지만 팔공산은 다르다. 들머리부터 능선까지 오르기도 힘들고, 이후 만난 능선길도 가파른 바위 계단길이다.

비로봉까지 능선길이 이어진다. 역시 소문대로 비로봉까지 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쉽게 정상을 내어줄 기세가 아닌 것 같다. 나무데크가 계곡을 가로질러 좁은 바위 사이로 들어선다. 시간은 오전 11시. 쉬지 않고 오른 두 시간의 산행 끝에 비로봉을 0.2km 남겨 놓고 있다. 그때, 검은 물체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그 정체는 바로 검은 염소. 관리받은 듯한 매끈한 녀석의 모습을 보니 누군가가 방목하고 키우는 녀석임이 분명하다.

염소 옆으로 한 무더기의 참나리꽃이 자리하고 있다. 활짝 핀 참나리꽃들은 지친 산객에게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고 조금만 더 힘내라고 인사하는 것 같다.

비로봉 안내판에 도착하고 큰 바위 뒷길로 오르니 드디어 팔공산 정상, 비로봉 정상석이 보인다. 오전 11시 30분. 산행을 시작한 지 2시간 30분 만에 정상에 선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 포항에서 온 젊은 산객께서 선뜻 기념사진을 찍어주시겠다고 한다. 나는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며, 정상석과 함께 흔쾌히 사진을 찍는다.

고등학교 동기 아들의 결론 축하 플래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는다. 아무나 오르기 힘든 이 멋진 팔공산의 정기를 받아 아들, 딸 잘 낳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기를 기원한다.

제천단을 지나 동봉으로 향한다. 미타봉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동봉으로 오르는 길에 석조 약사여래입상이 떡하니 길목을 지키고 계신다. 나는 약사여래불께 몸이 아픈 친구들이 어서 빨리 나아 함께 산에 오를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한다.

동봉을 지나 철탑 삼거리에서 케이블카를 타는 신림봉까지 내려간다. 행동식으로 챙겨온 빵을 먹으면서 무릎에 에어파스를 뿌리고 하산길 채비를 마친다. 한 시간 남짓 걸린 하산길은 생각보다 훨씬 고되다. '올라오는 길에 힘을 너무 많이 쏟았나?'란 생각이 든다.

지루한 하산길을 걷다 잠깐 뒤를 돌아본다. 분명 아까는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비로봉 정상에서부터 이어진 팔공산의 위세가 한눈에 보인다. 안개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팔공산의 모습은 실로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팔공산 산행 끝자락에서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는다.

신림봉 암봉을 넘으니 케이블카 타는 곳에 도착한다. 나는 곧장 케이블카를 타고 3분을 내려가 스님들께서 정진하는 동화사에 들른다.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불께 힘들고 고된 팔공산 산행 무사히 마친 것에 감사인사를 드린다.

동화사 벤치에 앉아 젖은 옷을 갈아입고 시원한 약수를 들이켠다. 안개 속 바위를 오르내리며 타들어 갔던 목이 박하사탕을 먹은 것처럼 뻥하고 뚫린다. 유난히 고됐던 이번 팔공산 산행. 어느새 힘들었던 기억들은 솜사탕처럼 스르륵 녹아내리고, 행복했던 기억들이 추억의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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