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만추문예] 소설 부문 당선작 - 김암우 여사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11. 2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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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매경-교보문고 공동주최 ‘만추문예’ 소설 부문 당선작
[당선작] 권명희 ‘김암우 여사’
옷장을 버렸다. 암우 여사가 사십여 년을 쓰던 장이다. 누런 자개로 봉황, 소나무, 나비, 두루미가 올록볼록 반입체적으로 박혀 있는 장이다. 옷장은 버려졌다. 나는 삼층에서 옷장이 부서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은 망치와 드릴로 옷장을 부숴버렸다. 십여 분 만에 옷장은 형체도 없이 보잘것없는 쓰레기로 변했다. 옷장은 여사의 손아래 동서와 함께, 같은 날 샀다. 동서의 옷장은 미닫이로 섬세하고 조그맣게 자개가 수놓아 있고 여사의 옷장은 여닫이로 자개가 큼지막하고 투박하게 수놓아 있었다. 여사는 옷을 정리하고 이불을 개어서 넣을 때 가끔씩 동서의 옷장을 부러워했다.

—너그 숙모 옷장이 비싸니까 더 좋다. 우리 옷장은 앞으로 땡겨서 여는데 숙모 옷장은 옆으로 밀어서 여는 거 아이가.

암우 여사는 아쉬워하며 그런 말을 가끔씩 했었다. 여사가 숙모의 옷장을 부러워할 때면 어린 내 마음도 약간 슬퍼졌다. 나는 옷장 문양을 좋아했다. 손으로 만지면 자개의 감촉이 느껴졌다. 전체적으로는 검정 칠이 되어 있지만 다양한 빛깔의 조개껍질로 두루미며, 나비며 군데군데 멋을 냈다. 가장자리에는 소나무가 반쪽만 수놓아 있었는데 나머지 반쪽은 옆면으로 이어져 있으나, 장소가 부족해서 자개를 못 붙였을 거라고 상상했다. 그 옷장이 곧 부서진 채 사십여 년 세월과 함께 용달차에 실려 가려고 한다. 여사의 여닫이 자개 옷장이 부서지는 광경을 내려다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 김암우 여사의 삶, 여사와 함께했던 추억 파편들이 뾰족하게 가슴을 찔렀다.

여사는 밤새 거실 네 모퉁이를 기어다녔다.

—엄마 밤이에요. 주무세요. 네. 제발 좀.

불을 껐다. 여사는 어두운 거실을 오랫동안 기어다녔다.

—탄불을 갈아야 하는데 부지깽이가 와 없노? 연탄 아궁이는 어딨노?

내일은 부지깽이를 구해봐야겠다. 그런데 어디에서 구하나, 부지깽이를……. 기어다니면 운동도 되고 건강해지시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여사는 갑자기 부지깽이, 참빗, 조리, 연탄, 석유곤로, 색동골무, 고약, 코티분 등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가져오라고 했다. 바닥을 기어다니며 아궁이를 찾고 벽을 더듬거리며 없는 벽장문을 찾기도 했다.

암우 여사는 점점 기억을 잊어갔다. 최근의 기억이 먼저 잊히고 점점 현재로부터 멀어진 기억들이 차츰 없어졌다. 여사의 어린 시절만 기억에 남았다. 여사는 가끔 자녀를 키우던 바쁜 시절로 돌아갔다. 아무 때나 밥상을 차렸다. 먹지 않겠다고 해도 차렸다. 바쁘고 가난했던 시절을 다시 살고 있는 듯했다. 식용유 대신 주방세제를 넣고 소금이라며 밀가루를 뿌려 계란프라이를 만들었다. 찾는 걸 포기했던 리모컨을 냉동실 검은 봉지에서 꺼내 끓는 물에 삶았다. 자신이 살았던 곳이 없어지고 낯선 곳에서 어눌하게 살고 있다. 잠시 동안만이라도 여사가 살았던 곳으로 함께 돌아가고 싶다. 컴퓨터를 켜고 〈그때를 아십니까〉를 클릭했다. 부지깽이가 나오는 화면을 찾을 수 없었다. 1960년대 화면을 틀고 아궁이를 찾아 밤새 기어다녔던 여사를 컴퓨터 앞에 앉혔다. 여사는 자신이 왜 부지깽이를 찾았는지 이미 잊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둘째 딸이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 내게 말했다.

—나 오늘 편의점 아줌마가 불렀어. 니가 치매 할머니 손녀지? 하면서 가게 못 오게 하래. 알바생들이 할머니 때매 자꾸 그만둔대.

뒤이어 큰딸이 말했다.

—나는 동서남북 식당 아줌마가 나를 부르더니. 너 치매 할머니하고 같이 사는 애지? 우리 식당에 오지 못하게 해라. 식당에 아무 때나 들락거려서 손님들 놀래키구. 니가 할머니 밖에 못 나오게 해라. 어떨 땐 주방까지 들어와서는…… 뭐라고 말하던데.

큰딸은 내 얼굴을 쳐다보며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어떡해?

나는 그냥 공손하게 네,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라고 했다. 두 아이한테는 살아 있는 사람이 집 안에만 있을 수는 없는 거라고 타일렀다. 내가 밖에 나가면 동네 사람들은 나를 붙들고 항의했다. 좋은 요양원이라며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옷가게 주인은 아무 때나 남의 가게에 들어와서 앉아 있는 내 엄마를 손님들과 힘을 합쳐 끌어냈다고도 했다. 할머니가 힘이 무척 세다며, 다음부터는 주의해달라고 말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알겠다고 했다. ‘당신 부모도 당신도 치매 걸릴 수 있어’라고 속으로 말하면서.

비슷하게 지어진 단독주택, 여사는 문이 열려 있는 집에 들어가 남의 집 거실에 앉아 있곤 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동네 사람들은 대문을 잠그기 시작했고, 암우 여사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자주 잊어버렸다. 그래서 내 핸드폰 번호와 여사의 상태를 적어 목걸이에 걸어주었다. 연락처를 적어 가슴에 달아주고 호주머니에는 간단한 편지를 써서 넣어두었다. 내의 앞뒤에 매직으로 핸드폰 번호를 크게 썼다. 지구대에서 여사를 집으로 모셔오는 일도 잦았다.

한번은 현관 비밀번호 1111을 잊어버려 암우 여사가 열쇠가게에 가서 사람을 불렀다. 현관문을 열어줬으니 비용을 달라고 했으나 여사가 돈을 주지 않으니 현관 손잡이를 통째 떼어 갔다. 전후 사정을 짐작하고 열쇠가게에 갔다. 그는 그것이 열쇠법이라고 했다. 문을 열어줬는데 비용을 안 주면 떼어 가는 게 법이라고 했다. 비용을 지불하고 다시 현관 키를 달았다. ‘당신 부모도 당신도 치매 걸릴 수 있어’ 속으로 말했다.

치매에 관한 책이나 정보가 많으면 좋으련만. 어쩌다 치매에 관한 기사가 있으면 기사를 잘라 냉장고에 붙였다. 내 자녀들도 읽게 하려고. 나도 잘 모르니까 치매에 대해 알려고. 할머니를 이해하게 하려고. 나는 오후에 네 시간 학원에서 일했다. 여사가 불을 낼까 봐 가스 스위치를 잠그고 위험한 물건은 치우고, 그래도 불안했지만 두 딸이 집에 돌아오면 안심하고 출근했다.

P시는 신도시로 산기슭에 전원주택이 있고, 그 아래에 아파트단지, 더 아래쪽에는 단독주택 백여 채가 벌집처럼 비슷한 모양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한길과 접해 있는 단독주택 일층에는 편의점, 부동산, 옷가게, 철물점, 미용실, 꽃집 등이 있다. 이층과 삼층에는 네다섯 가구가 살고 있으니, 이곳에 사백여 가구와 작은 상가들이 비슷한 모습으로 들어서 있다. 복잡하지 않은 곳.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느껴지는 곳, 미니 신도시, 이곳에서 암우 여사와 나는 삼층에, 아이들은 사층 옥탑방에 살고 있다. 처음에는 가족 모두 삼층에서 살았다. 그러나 여사가 한밤중에 갑자기 밥 달라 떡국 내놓으라 아이들을 깨우고, 틀니가 없어졌다며 잠자는 아이들 입을 벌려 이빨을 빼려고 했다. 아이들 책가방을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했다. 결국 사층 옥탑방으로 아이들을 이사하게 했다.

도시와 전원을 동시에 느끼고 싶어 이곳으로 이사 온 사람들은 조경으로 심어진 나무를 없애고 상추, 고추, 깻잎 등을 심었다. 여사는 남의 집에 심어놓은 고추와 상추를 따 왔다. 넘어진 듯 온몸에 흙을 묻혀 오고 목욕시킬 때면 몸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기도 했다. 처음에는 여사가 따 온 것들을 돌려주며 사과했다. 그러나 계속 여기서 살아가기는 힘들 듯했다. 나는 여사와 우리가 살 다른 곳을 알아보아야 했다. 산골로 갈까? 아이들은 산골에서 자라면 정서적으로 더 좋을 것이다. 고구마농사를 지어볼까? 아니면 저 산자락에 있는 전원주택으로 이사 갈까? 하지만 막상 이사를 하자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곳에는 꼬마들한테 둘러싸여 매를 맞는 여사를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는 이웃도 있고, 호프집 주인은 여사에게 종종 뻥튀기를 주기도 했다. 길을 헤매는 여사를 발견하면 근처 지구대에 데려다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사의 이름이 김암우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사촌들과 부모님 이야기를 하다가 여사의 이름이 김암우라고 그들이 말해주었다. 나는 아니라고, 우리 엄마 이름은 김숙자라고 했다. 이모들이 깜짝 놀라며 너그 엄마가 언제 숙자가 되었느냐며 웃었다. 복선, 복희, 복순, 암우. 왜 엄마 이름만 암우냐고 물었다. 그냥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서 아무개야, 아무야, 하고 부르다가 암우가 되었다고 했다. 여사가 생각한 그럴듯한 이름이 김숙자인 것이다.

아무개라서, 암우가 된 여사가 사라졌다. 소파에 앉아 〈아침마당〉을 보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눈 깜짝할 새 밖으로 나가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여사는 이금희 아나운서를 좋아했다.

—금희 양은 참 이뻐. 우째 저리 말을 잘하누. 웃는 얼굴도 복스럽고.

〈금희마당〉이라며 이금희 아나운서를 보기 위해 하던 일을 제쳐두고 TV 앞에 앉았다. 그런데 이금희 아나운서가 나오는 TV를 켜둔 채 여사가 사라졌다. 여사를 찾으려고 전원주택이 있는 산자락까지 올라갔다. 비탈을 오르자 처음 보는 동굴이 보였다. 부랑자들이 모여 사는 동굴이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깡통을 두드리며 춤을 췄다. 여사가 그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한 채. 여사는 이곳이 익숙한지 웃고 노래하며 깡통에 담긴 밥을 긁어 먹었다.

—엄마 여기서 뭐 하세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나는 여사의 오른팔을 잡아끌었다. 여사의 팔이 쑥 빠졌다. 왼팔을 끌었다. 왼팔도 빠졌다. 부랑자들이 팔을 주워서 여사의 어깨에 끼워주었다. 나는 여사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허리가 길게 늘어졌다. 더 힘껏 허리를 끌어당겼다. 우두둑뚝뚝, 뼈가 부러졌다. 부러진 뼛조각을 들고 벌떡 깨어났다. 새벽 네시, 여사는 없고 아이들은 잠자고 대문은 열려 있었다. 큰딸을 깨워 할머니가 없어졌으니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는 또 할머니 나갔느냐며 핸드폰을 들고 따라나섰다. 지구대에 여사가 없어졌다고 알렸다. 큰딸과 서로 반대 방향으로 여사를 찾아 나섰다. 둘째 녀석도 따라 나왔다.

—김암우 할머니.

—김암우 엄마.

소리치며 뛰어다녔다. 큰딸이 할머니를 찾았다며 연락을 해 왔다. 그곳으로 가보니 여사는 쓰레기통 옆에 웅크리고 앉아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엄마, 추운데 얼어 죽으려고 작정했어?

—할머니, 밤에는 차가 빨리 달리는데 교통사고 나면 어쩌려고 그래.

여사는 맨발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벌벌 떨고 있었다. 몸이 굳어 펴지지 않았다. 여사를 업고 삼층 집으로 올라왔다. 지구대에 여사를 찾았다고 알렸다.

손이 떨리고 어지러웠다. 의사는 나에게 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했다. 혹시 모르니 입원을 해서 검사를 하자고 했다. 곧 겨울 방학이니 그때 입원하겠다고 하고 약을 지어 왔다.

입원을 하기 전 두 딸에게 부탁했다. 전자레인지 사용법을 알려주고, 밑반찬을 만들어 통에 나누어 담고, 김치 등 다른 반찬도 작은 용기에 넣었다. 할머니는 식후에 치매약을 먹어야 한다. 약을 먹으려면 꼭 식사를 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저희 입으로 해야 할 일을 반복해서 말해보라고 했다. 가스 불은 위험하니 사용하지 말고.

—엄마, 나 입원해요. 밥 잘 드시고 밖에 나가지 마세요. 나 뭐 한다고 했지? 엄마.

—몰라.

아이들에게는 방학이지만 밖에 나가지 말고 할머니와 집에만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도서관에서 어린이와 청소년 책을 대출받고, 아이들이 할 일과 시간을 써서 냉장고에 붙였다. 새끼손가락 걸어 약속하고 손바닥으로 복사하고 검지로 사인도 했다.

입원 후, 병원에서 틈틈이 전화로 두 아이에게 밖에 나가지 말라 했고, 할머니 약 드셨는지 묻고, 나는 곧 퇴원할 거니까 걱정 말라고 안심시켰다.

의사는 퇴원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걱정이 되어서 병원에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퇴원하니 둘째 딸이 좋아서 목을 끌어안고 엄마, 이제 안 아프냐고 물었다. 빌려 온 책은 두 번씩 읽었다고, 밖에는 딱 한 번밖에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암우 여사는 나에게 어느 방에 있었느냐며 조금 전에 나를 본 듯 반겼다. 여사와 아이들 얼굴이 거칠어지고 조금 야위었다. 여사가 먹었어야 할 약 봉지가 책장 구석에 그대로 있었다. 옥탑방으로 올라가니 과자 봉지가 널려 있었다.

두 딸에게 무릎 꿇으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첫째 녀석에게는 할머니 밥 잘 챙겨드리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둘째 녀석에게는 할머니 약 챙겨드리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했다. 녀석들은 할머니 밥 챙겨드렸다고, 치매약도 챙겨드렸다며 억울해했다. 약을 삼켰는지 입 속까지 확인해야 되는 것을 알지 않느냐고 소리쳤다.

—야들아, 이리 온나.

여사가 아이들을 두 팔로 감싸고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야들이 무신 잘못이 있나? 잘못이 없재. 니가 잘못이다.

나는 녀석들의 잘못을 알려주고 야단도 치려고 여사 방 앞에 계속 서 있었다.

—할머니이, 엄마가 우리 혼내려고 밖에 서 있어요.

문을 열고 여사는 나를 돌려세우고 저리 가라며 손바닥으로 내 등을 떠밀었다. 다시 와서는 내 등을 내리쳤다. 녀석들은 나를 쳐다보며 혀를 날름거렸다. 나는 녀석들을 향해 주먹뽕을 날렸다.

옥탑방을 청소하고 암우 여사 방을 정리했다. 오줌을 지렸는지, 냄새나는 이불을 빨고 밀린 빨래도 했다. 여사와 함께 목욕도 했다.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오전에는 집안일을 하고 오후에는 일하러 갔다. 여사는 아침에 〈금희마당〉을 보고 정신이 돌아올 때면 집안일도 하고 함께 시장도 봤다. 여사는 여사의 지난날 얘기를 반복해서 했고, 그 얘기 들었다고 해도 또 했다. 아까 금희 양이 왔었는데 하기도 하고 이상벽도 같이 왔었다고도 했다.

—떡 장사 해보자. 니랑 나랑 같이. 다라이에 인절미, 절편, 시루떡 담아서 사람 많이 다니는 은행 앞에서 팔아보자. 돈도 벌고.

—엄마는 연세도 많고 정신도 없는데, 어떻게 떡 장사를 해.

젊은 시절 여사는 시장 좌판에서 나물 장사를 했었다. 아주머니들이 바가지를 두 개 세 개 놓고 장사를 하다가 각자 구역도 생기고 비닐을 덮어 지붕도 만들어 붙박이 가게가 되었다. 자연적으로 재래시장이 되었다. 나물 장사를 하기 전에는 동대문운동장 앞에서 돗자리를 펴고 양말을 팔았다. 나는 가끔 여사를 따라갔다. 불시에 나타나는 단속반은 상인에게 피할 시간을 주려는지 일부러 호루라기를 불며 천천히 나타났다. 여사는 돗자리 네 귀퉁이를 모아 잡고 도망을 쳤다. 양말이 몇 개씩 떨어졌다. 나는 양말을 주워 여사에게로 달려갔다. 그 기억이 떠오르는지 여사는 지금도 종종 돈을 벌 궁리를 했다.

—할머니, 돈가스 먹고 싶다고 하세요. 피자 먹고 싶다고 하세요.

—나는 똥까스도 묵고 비자도 묵을란다.

두 아이는 할머니를 꾀어 외식을 하게 만들었다. 어떤 일이든 할머니와 함께가 아니면 절대로 안 된다고 미리 못 박았기 때문이다.

녀석들은 한술 더 떠서 도둑이 들면 할머니를 맨 앞에 내보내자고 하기도 했다. 우리 식구 중에 할머니가 젤 용감하다며.

방학이 끝날 무렵 나는 다시 손이 떨렸다. 몸도 떨리기 시작했다. 약을 먹어도 심해졌다. 살도 점점 빠져갔다. 숨이 차고 어지러웠다. 나는 제대로 치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최근 P시에 요양원이 생겼다. 상담을 하러 요양원에 갔다. 상담하던 중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좋은 제도가 있다니. 나는 이 제도를 이용하기로 했다.

여사한테는 당신은 요양원에 가는 것이며, 왜 가는지를 설명하고 내가 퇴원하면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말했다. 요양원 센터장은 공단에 치매 등급을 신청하라고 했다. 비용도 저렴해지고, 공단에서 직접 요양원으로 와서 등급을 판정해준다고 했다. 환자가 평소에 좋아하는 물건도 함께 가져오라고 했다. 화투, 여사가 잘하는 뜨개바늘과 털실, 의사 소견서, 속옷, 로션, 옷가지 등을 가방에 넣어 여사에게 주었다. 요양원은 유리 도어를 닫으면 저절로 잠겼다. 어르신들은 열 수 없다. 요양보호사나 센터 관계자는 꼭대기에 숨겨진 비밀 키를 눌러서 열었다. 안에 계신 노인분들은 보호자와 함께가 아니면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간유리 색으로 선팅된 좁은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사는 내가 싸준 가방을 가슴에 안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아는 사람 없는 낯선 요양원을 맴돌았다.

나는 입원했다. 의사는 소견서를 써줄 테니 삼차병원에서 검사를 한 번 더 해보라고 했다. 링거를 꽂고 차려주는 병원 밥도 먹었다.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혈당이 높아 수술을 할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다행히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도서관 사서한테 전화해 두 딸이 도서관에 다녀갔는지를 물으니 어떤 책을 빌려 갔는지, 몇 시에 다녀갔는지를 알려주었다. 여사가 있는 요양원에 전화하니 김암우 환자는 잘 지낸다고 센터장이 말했다. 아이들한테 전화를 했다.

—또 전화, 우린 잘 있어요. 걱정 마요. 절대 안 싸웠고, 밥 먹었고, 군것질 안 했고, 지금은 책 봐요. 약속 복사 사인 했잖아요. 엄마, 아직도 아파? 언제 와?

의사는 당뇨가 심하니 약을 잘 챙겨 먹으라며 퇴원하라고 했다. 환자복을 벗는 순간부터 집에 오는 데 걸린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여사가 있는 요양원에 갔다. 신생아 얼굴이 서로 닮아 있듯 할머니들 모습은 더 많이 닮아 있다. 구부정한 허리, 느릿느릿 걸음걸이, 웃음 없는 표정, 얼굴은 계란형이나 둥근형이 아니다. 육각형이다. 얼굴에 있던 살이 빠져나가고 골격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서 육각형이 되었으리라. 여사가 먼저 나를 알아봤다.

—야야, 야야, 이리 온나. 밥 묵었나? 이봐요, 야 밥 좀 차려줘요.

요양보호사에게 밥을 차려주라고 부탁했다.

깔끔하고 부지런한 여사는 변해 있었다. 기저귀를 했고 걷지도 못한 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엄마, 일어나봐. 잘 걷는데 왜 휠체어에 앉아 있어?

여사는 잘 걷지를 못했다. 너무도 변해 있었다. 발가락에는 피가 맺혀 있고 솜과 반창고로 대충 붙여놓았다. 센터장을 불렀다. 왜 우리 엄마가 이렇게 되었느냐고, 기저귀는 왜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얼굴이 말처럼 생긴 센터장은 어르신들은 여기 오면 누구든지 기저귀를 하게 되어 있고, 발가락은 휠체어에 끼어서 그런 것일 거라며 짐작만 할 뿐 자신도 잘 모른다고 했다. 우리 엄마는 대소변 잘 가린다. 치매지만 조심성 많은 분이라고 말했다. 왜 나한테 바로 연락하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었지만 무표정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휠체어에 암우 여사를 태우고 곧바로 정형외과로 갔다. 엑스레이를 찍었다. 엑스레이를 보며 의사는 중지, 약지, 새끼발가락 세 개가 골절되었다고 했다. 한동안 걸을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말처럼 생긴 요양원 센터장이 일부러 발가락을 골절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깁스를 한 후 여사와 요양원으로 돌아갔다. 가방에 넣어주었던 털실로는 요양보호사가 목도리를 뜨고 있었다. 어르신들한테 뜨개질은 위험하다면서. 요양보호사들을 붙들고 할머니 발가락이 왜 골절되었는지 물어도 다들 모른다고만 했다. 나는 한 남자 요양보호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른 어르신들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혹시 저 남자가 그랬어요?

며칠 전 밤에 암우 할머니가 아파서 밤새 큰 소리를 지르고 울며 난리 났었다고, 한 어르신이 말했다. 불쌍한 우리 엄마. 암우 여사.

말머리 나쁜 놈. 분명 그놈 짓일 거야. 여사가 밤새 기어다니며 잠을 자지 않으니까 무슨 수를 쓴 게 틀림없었다.

세 개의 발가락이 골절된 후 암우 여사는 급속히 건강이 나빠졌다. 걸을 수 없었다. 여사를 찾아 온 동네를 헤매는 일도 없고, 지구대에 전화를 할 필요도 없어졌다. 동네 사람들에게 아이들이 불려 가지 않아도 되었다. 여사는 뜨개질하는 법도 잊어버렸다. 그저 대바늘을 만지작거렸다. 검은콩과 노란콩을 분리하게 하는 것보다 마늘을 까는 것이 더 기억을 살려낼 수 있을 듯해서 마늘을 같이 깠다. 여사는 끈기 있게 마늘을 까고 힘들면 비스듬히 기대어 잠을 잤다. 마늘을 갈아 냉동실에 넣었다. 냉동실은 여사가 깐 마늘로 가득 찼다.

부침개나 반찬을 만들 때 여사를 부엌 모서리 땅바닥에 앉혔다. 휠체어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모서리에 기대어 부침개를 같이 먹었다. 김장도 여사 앞에서 했다. 배추를 절일 때, 양념을 만들고 버무릴 때, 여사가 했었던 일을 기억하게 하려고 지켜보게 했다. 김치소를 싸서 여사와 같이 먹었다. 여사는 소화를 잘 시키고 어떤 음식이든 잘 먹었다.

P도서관은 산자락에 있었다. 비탈길이라 휠체어를 지그재그로 밀어야 했다. 그래야 안전하고 쉽게 비탈을 오를 수 있었다. 비탈길을 내려올 때는 더욱더 조심해야 했다. 뒤돌아 뒷걸음질로 천천히 지그재그로 내려왔다. 도서관 사층 강당에서는 사물놀이, 연극, 음악회, 발레, 인형극 등 다양한 공연을 하는데 여사와 나는 빠지지 않고 갔다. 도서관 관장님은 항상 공연장 앞문을 열어주었고, 여사와 나를 앞자리에 앉을 수 있게 했다. 관중들에게는 할머니가 중간에 소리를 질러도 모른 척하라고 부탁했다. 〈심청전〉 공연이었다. 심 봉사가 지팡이를 두드리면 여사도 휠체어에 앉아 지팡이 두드리는 흉내를 내며 앞으로 나가려고 발을 굴렀다. 심 봉사가 심청을 찾으면 여사는 저쪽에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크게 말했다. 몇몇 아이들은 맞아요, 저기 있어요, 하며 맞장구를 쳤다.

기저귀를 갈아주고 욕창이 생길까 봐 자세를 바꿔주고 여사를 휠체어에 앉히고 산책을 했다. 여사는 문장으로 말하지 못하고 단어로 말했다. 단어조차도 잊어 우우우우우 소리를 내기도 했다. 여사를 변기 위에 앉히고 목욕을 시켰다. 나도 같이 씻었다. 머리 감길 때에는 유아들이 쓰는 도넛 모양의 모자를 씌웠다.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모자를 안 쓰려고 자꾸 벗었다. 그래서 나도 여사와 같은 모자를 썼다. 여사도 나를 따라 모자를 썼다. 여사는 목욕을 좋아했다. 배를 따뜻한 물로 오래 씻기면 방구를 끼고 대변도 잘 봤다. 뜨거운 물로 씻겨야 물기를 닦고 로션을 바를 때 춥지 않아서다. 대변 양이 엄청 많아져 빨리 기저귀를 채우지 않으면 갈아입은 옷과 이불에 똥이 묻어 다시 목욕을 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옛날에 옛날에 청개구리는

엄마 말 안 듣는 청개구리는

물가로 가라하면 산으로 가고

산으로 가라하면 물가로 가고

엄마가 엄마가 죽을 임시에

청개구리 불러놓고 눈물 흘리며

내가 내가 죽거든 물가에 묻고

너희들 행복하게 잘 살아라

옛날이야기가 노래로 변했다. 여사는 청개구리 이야기만 해주었다. 유일하게 여사가 아는 옛날이야기는 〈엄마 말 안 듣는 청개구리〉밖에 없었다. 우리도 여사에게 청개구리 이야기를 또 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마르고 닳도록 해주다가 리듬이 생겨 노래가 되었고, 결국 노래도 가르쳐주었다. 청개구리 이야기를 듣고 노래를 부르면 어쩐지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둘째 딸이 학교 연극부에서 연극을 한다고 해서 암우 여사와 같이 연극을 보러 갔다. 둘째 딸은 암우 여사에게로 달려와 휠체어를 당기며 여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머니, 조금 있다가 나 나오니까 소리 지르지 말고 보세요.

며칠 뒤, 둘째 딸은 학교에서 효행상을 받았다. 자신이 왜 상을 받았는지 의아해했다. 담임선생님은 할머니와 함께 살기 때문이라고 했다. 큰딸이 중학생 봉사단체 〈푸른청소년〉에서 해외 문화 교류 학생으로 뽑혀 해외에 갈 수 있었던 것도 할머니와 같이 살기 때문이었다.

여사가 왼쪽을 볼 때 목을 많이 돌렸다. 왼쪽을 오른쪽 눈으로 보려고 했다. 한 달에 한번 치매약을 받으러 갈 때 안과에도 갔다. 의사는 왼쪽 눈은 이미 보이지 않고 오른쪽 눈도 빨리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는 앞이 안 보이면 행동반경이 좁아져 건강이 급속히 나빠질 거라고 했다. 두 눈 모두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꼭 눈을 고쳐드리자. 한쪽 눈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드려야겠다. 걸을 수도 없고 말도 잘 못하고 음식이 뜨거운지도 알지 못하는데 눈 한쪽만이라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안과의사는 어려운 수술은 아니라고 했고 정신과의사는 연세도 있고 견딜 수 있는지 체력도 문제가 된다며 보호자가 결정하라고 했다. 암우 여사를 나라고 생각해보자. 내가 암우 여사라고 생각해보자. 잘못될 수도 있다. 선택해야 한다. 수술한다, 로 결정했다.

검사는 쉽지 않았다. 눈동자 사진을 찍으려 해도 기계에 이마를 맞추지 못했다. 사진을 찍으려 불이 켜지면 여사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설명을 해도 알아듣지를 못했다. 여사 귀에 대고 꼭 검사를 해야 앞을 볼 수 있다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검사를 하려고 눈을 뜨게 하려는 의사의 손을 밀어냈고, 피를 뽑으려고 하면 소리를 지르며 주사기를 빼앗았다.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도록 손뼉을 치고 손을 흔들고 소리도 질렀다. 계속 찍다가 우연히 눈뜬 모습을 찍을 수 있었다. 사진을 찍던 분과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여사가 빙그레 웃었다. 여사는 어렵게 검사를 마쳤다. 수술 날짜가 잡혔다.

늙고 병들고 여사처럼 기억을 잃어가도 현재 자신에게 남아 있는 잔존 능력으로 누구든지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한다. 웰빙 웰다잉. 그 중간 어디쯤에 패스트빙이 있다. 패스트빙은 내가 만든 단어이다. 패스트빙이란 알츠하이머에 노출된 분들의 기억을 되살리고 행복하기 위해 과거 자신이 살았던 시간을 다시 살아보는 방법이다. 가끔씩 기억이 돌아오기도 하니까.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시대를 직접 살아보는 것, 그 시절 유행했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그 시절의 영화를 보고 그때 먹었던 음식을 먹고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해본다. 흑백TV를 보고 연탄불을 갈아보고 온돌방에 앉아 옛날이야기도 하며 즐겁게 살아보는 것. 패스트빙이다. 삼사십 년 전의 환경을 만들어 몇 개의 생활용품만 있으면 패스트빙을 만들 수 있다. 잠시 여사를 그곳에 머물게 하고 싶다. 여사는 현재와 과거의 어중간한 곳에 서 있었다. 당신의 시대가 분명히 있었고, 그때를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눈이다. 폭설이다. 눈을 보게 하려고 두꺼운 담요를 무릎에 덮고 목도리를 하고 휠체어를 베란다로 밀었다. 내년에도 여사와 저 눈을 볼 수 있을까? 창틀에 쌓인 눈을 뭉쳐 여사에게 주었다. 뜨거운 음식을 좋아했던 여사이지만 차고 뜨거운 맛을 구별하지 못했다. 뜨거운 국을 드리면 순식간에 국을 벌컥 마셔버렸다. 깜짝 놀라 국그릇을 빼앗았다. 입 속이 데었다.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수면양말에 피가 맺혔다. 골절된 새끼발가락이 굽어지고 약지발가락은 중지발가락 밑으로 파고들어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상처를 소독하며 아프냐고 물었다. 여사는 아프지 않다고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상처는 잘 아물지 않았다. 다 나아가던 엉덩이 욕창이 더 이상 나아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음식을 잘 먹고 소화도 잘 시켰는데 밥을 주면 고개를 돌려버렸다. 수술을 하려면 체력을 유지해야 하는데, 음식을 먹지 않았다. 수술 후 암우 여사가 다시 〈아침마당〉을 볼 수 있을까? 내년 봄에 휠체어를 밀면서 여사와 함께 벚꽃을 볼 수 있을까? 냉동실에 있는 여사가 깐 마늘을 여사는 다 먹을 수 있을까?

여사가 좋아하는 목욕을 하자고 도넛 모자를 꺼내면, 모자를 던져버렸다. 잠만 잘 뿐이었다.

사십여 년 쓰던 자개 옷장이 나무판자로 잘렸다. 이삿짐센터 아저씨들은 판자를 차곡차곡 용달차에 실었다.

—아저씨 잠깐만요.

삼층에서 내려다보던 나는 뛰어 내려갔다. 아저씨들한테 나비 자개 한 조각을 뜯어달라고 했다. 나비다. 날개를 옆으로 접은 나비를 떼어주며 아저씨는 뭐에 쓰려는지 물었다. 엄마가 좋아했던 옷장이라고 말했다. 용달차는 떠났다. 여사도 나비처럼 훠이훠이 떠났다. 나비 자개를 꼭 쥐었다. 나비를 손에 들고 여사를 업고 오르던 삼층으로 천천히 올라간다.

[심사평] 아무개에서 이 이름을 얻기까지
올해 첫 만추문예 응모 열기와 현실에 뿌리내린 인물들의 구체적인 수백 편의 이야기 앞에서 심사위원들은 겸허함을 느꼈습니다. 만추문예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새 삶을 시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은퇴자들, 빈곤, 팬데믹 후유증, 일상적인 고민, 돌봄 노동, 노인 문제 등을 다룬 응모작들이 많았습니다. 화려하고 기술적인 서사가 드문 건 응모작에서 보이는 실제성과 생생한 경험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중에서도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아래의 세 편을 놓고 이야기를 오래 나누었습니다.

자신을 뒷바라지하는 부모의 노력과 역경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아들을 둔 부모의 사흘간을 다룬 ‘우산’은 심사위원들이 끝까지 놓지 못한 작품입니다. 어렵게 취직했으나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들이 출근하지 않을까 봐 가슴 졸이는, 아들에게 존중도 권위도 잃은 부모의 내면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데다, 살이 부러져서 비를 막아내지 못하고, 잃어버릴 뻔하기도 했으나 기어코 그 망가진 것을 찾아 집으로 가는 ‘우산’의 상징성도 돋보였습니다. 다만 사건의 순서대로 흘러가는 단조로운 시간 흐름이나 구성이 조금 더 치밀하고 정교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모의 뜨개질’은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뜨개질만 하고 듣지 못하는 척하는 이모의 캐릭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연극을 포기하지 않는 시점인물인 나, 조카와의 연대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후반부에 전개된 이모의 긴 과거가 모두 필요했는지, 결말 또한 이미 너무 이른 시점에 짐작 가능하지 않았는지, 결국 이 단편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는지에 관한 질문들이 남았습니다.

첫해 만추문예 당선작 ‘김암우 여사’는 읽는 순간 내 어머니(!)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진 작품입니다. 누가 이름도 지어주지 않아 ‘아무개야’라고 불려 ‘김아무’라는 이름을 얻은 여사의 치매 투병 이야기는 일인칭인 맏딸과 어린 두 손녀 간의 마지막 동행의 기록입니다. 여사가 사십여 년을 쓰던 자개 옷장을 버리는 일로 소설은 시작하고 소설 끝에서 딸은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부순 옷장 잔해에서 한 조각을 손에 꼭 쥡니다. 거기엔 여사가 좋아한 나비 자개가 붙어 있습니다. 날개를 옆으로 접은 나비. 잃어가는 기억 속에서 과거를 건져내고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입니다. 감정의 절제, 치매 할머니인 김암우 여사가 만들어내는 공동체적인 단합, 차별적 시선을 견디며 돌봄에 집중한 딸의 심리를 표현하는 단문과 살아감에 대한 애착과 끈질김이 기존 소설의 완성도나 문법을 훌쩍 뛰어넘는 듯합니다. 이 소설은 말합니다. “현재 남아 있는 잔존 능력으로 누구든지 행복을 추구해야 하며 살아야” 한다고. 그것이 생명을 가진 모든 자들의 권리가 아닐까요.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모든 응모자분에게는 다음 기회가 있음을, 그러니 어서 지금 쓰시는 소설을 계속 쓰고 완성하시라는 당부와 격려의 말씀을 남깁니다.

(심사위원 최윤·조경란 소설가)

매경-교보 제1회 만추문예 최종심이 이달 6일 서울 퇴계로 매일경제신문사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조경란 소설가, 정과리 문학평론가, 정호승 시인, 최윤 소설가. [한주형 기자]
[수상소감] “아무도 하지못한 말…앞으로는 더 크게 뱉어볼게요”
‘삶과 동떨어지지 않은 현실적이고, 삶에 관한 사실주의적 사유가 묻어나는, 삶이 보이는 글 우대. 충만한 늦가을 신춘문예. 이순자 작가의 데뷔 나이는 69세, 박완서 소설가 40세 등등.’

배곧 도서관에서 매일 서너 개의 신문을 읽는다. 윗글이 눈에 들어왔다. 글을 쓰라고 내 글을 내보라고 나를 유혹했다. 지금쯤은 써야 한다고. 신문기사를 보고 가슴이 설레었다. 젊은 시절 삶에 치여 살면서도 언젠가는 내 이야기를, 내 글을 쓰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날것의 거친 내 작품을 가능성이라 보고 뽑아주신 최윤 심사위원님, 계속 글을 쓰라고 말씀해 주신 조경란 심사위원님 감사드립니다.

당선소식을 들은 후 고민이 시작되었다. 아침 9시 출근부터 오후 6시 퇴근까지를 인생이라고 하면, 나는 어디쯤에 서 있나? 9시간 일하게 되니까 90세까지 산다고 예상하면 1시간은 10년이 된다. 그러니까 나는 오후 3시30분에 서 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늦은 듯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는 너무 아쉬운 시간이다. 그러나 남은 시간은 오롯이 나만의 것이다. 결혼과 두 아이 키워내기, 그리고 직업이란 이름의 노동을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입학하듯 떠밀려 살았다. 이제는 자유다. 남은 날은 밀도 있고 쫀쫀하게 내 의지로 살아야겠다. 나만의 시간을 깊이 있고 폭넓게 사유하고 글 쓰며 살아야겠다.

늦게까지, 딴짓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나, 글 쓰라고 불러주신 심사위원님께 이제는 방황하지 않고 글을 쓰겠다는 다짐을 드린다. 나는 열심히 써서 문학의 소비자에서 생산자가 될 것이다. 물론 소비자이기도 하다. 얼떨떨하지만 묵직한 사명감을 느낀다.

얼마 전 엄마 꿈을 꾸었다. 만나고 싶었는데 도통 보이질 않더니…. 고향, 그리움, 어머니 김암우 여사.

글감을 주신 김암우 여사님, 냉철하고 잔인하게 내 글을 까는 내 딸들, 내가 망설일 때 내 글 좋다고 잘 쓴다고 이유를 들어가며 계속 쓰라고 하신 노일한 목사님, 저를 늘 곁에 머물게 해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 1961년 서울 출생

- 국민대 문예창작대학원 졸업

- 경희사이버대 한방건강관리학과 재학

제1회 만추문예 당선자 권명희 씨. [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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