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건汶楗 풍수유람] 39. 스타는 어느 하늘 아래에

손건웅 2023. 11. 22.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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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어려운 시절, 스포츠는 사람들에게 흥분과 감동 그리고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특히 야구와 축구 종목이 그랬다. 야구와 축구에서 발군의 실력으로 국민을 열광시켰던 스타들의 선영을 찾아 보았다.

장효조(張孝祚, 1956~2011)

그에게는 “타격의 달인”, “타격 천재”, “영원한 3할 타자”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최고의 왼손 타자였다.

장효조가 능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대구상고에 진학하면서 부터였다. 1973년, 그가 2학년 때 대구상고는 대통령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의 우승을 차지한다. 특히 황금사자기에서 장효조는 14타수 6안타를 몰아치며 타격 1위와 최다 안타상을 받았다. 그리고 국대로 선발되어 일본과의 고교야구 친선경기에서 일본을 2승 1무로 승리하는데 기여한다. 1974년 대구상고는 봉황기에서 우승하는데, 장효조는 타격왕과 최다 안타상을 수상한다. 그해 장효조가 출전한 4개 대회에서 0.383의 타율을 기록했다.

1975년 한양대학을 진학한 장효조는 1학년 때 국대에 선발되었고, 1976년 백호기 대회에서 0.714(14타수 10안타)라는 경이로운 타율로 타격왕을 기록한다.

1983년, 실업팀 활동과 병역을 마친 장효조는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다. 그 해 5월에는 8연타석 안타에 3연타석 홈런을 때려 내며 타율이 0.414까지 치솟기도 했다. 이는 KBO 리그 역사상 최초이며, 1983년 시즌 내내 0.380 이상의 고공행진을 이어가기도 했다. 1985년 시즌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끌어 내었다.

“장효조가 치지 않는 볼은 볼이다”,“장효조는 배트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은 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의 선구안은 뛰어났다. 타격 면에서는 우리나라 유일의 4할 타자 백인천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유일한 선수였다.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프로 데뷔 9년만에 처음으로 우승을 맛본 후 은퇴를 선언했다. 2011년 KBO 리그 30주년을 맞이하여 포지션별 레전드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9월에 간암의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장효조 선수 납골항. 부산 기장군 철마면.

납골당의 청룡방으로 진입하는 맥로가 장효조 선수 납골항에 9회절의 명당을 맺었다. 필자가 최근 현충원에서 확인한 보훈처장관의 부친 묘소가 10회절 명당에 모신 것을 감안하면 장선수 납골항의 풍수파워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최동원(崔東原, 1958 ~2011년)

역동적인 와이드업에서 뿌려대는 불같은 강속구, “칠테면 쳐봐라”는 화끈한 정면승부. 최동원의 마력이었다.

최동원이 무쇠팔이라 불리게 된 것은 고교시절 부터였다. 1975년 경남고 2학년 시절, 최강의 경북고를 상대로 17이닝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고, 이튿날에도 등판하여 선린상고를 상대로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니 모두들 놀랐다. 3학년 때는 군산상고를 상대로 9이닝 동안 20개의 탈삼진을 잡고 완봉승을 거두었다.

이후 최동원은 연세대학을 졸업하고 1983년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다.

1984년 정규시리즈에서 284이닝의 초인적인 투구를 소화한 최동원. 한국시리즈 진출을 일찌감치 확정한 삼성이 기다라고 있었다. 6차전 까지 3-3으로 팽팽이 맞선 롯데와 삼성의 7차전. 이미 4차례 등판으로 지칠 대로 지친 최동원이었지만 7차전의 마운드에도 최동원이 올라왔다. 롯데는 창단 첫 우승을 하고, 최동원은 한국 야구사의 불멸을 기록을 남겼다.

그는 당대의 최고의 선수였지만 어려운 선수들의 복지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이를 해결하고자 선수협을 주도한다. 돌아온 것은 구단의 트레이드와 따돌림이었다. 최동원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는다. 그가 조기 은퇴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은퇴이후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았지만 그를 받아주는 구단은 없었다. 방송에 출연도 했지만 결국에는 그는 야구계로 돌아왔다.

한화에서 2군 감독으로 활동하던 2007년 대장암 진단을 받았고, 2010년부터 병세가 악화되었다. 결국 2011년 9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효조가 떠난 지 1주일 만이었다.

장효조와 최동원, 두 레전드는 마음의 상처를 받은 이후 별다른 은퇴식도 없이 쓸쓸히 그라운드를 떠났다. 그들이 떠난 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두 선수를 추모하는 열기가 여전히 살아있다. 명당에 자리한 두 선수의 납골항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풍객의 생각이다.

최동원 선수 납골항. 고양시 설문동.

맥로는 서쪽에서 오는데, 납골당 남쪽 둔덕에 이르른 맥로는 분지(分枝)하여 주맥과 방맥으로 나뉜다. 주맥이 진입하여 핵심 대명당을 맺은 곳에 최동원 납골항이 자리한다. 혈처의 역량은 15회절이니 공직이라면 장관이상 총리까지도 배출할 풍수파워를 지녔다.

유상철(柳想鐵, 1971~ 2021년)

우리나라는 1986년 월드컵 본선에 진출 이래, 1998년 프랑스 월드컵까지 4회 연속 참가하였으나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에 한국은 2002 한일월드컵을 위하여 2001년 1월부터 히딩크를 감독으로 선임하고 장기훈련에 돌입했다. 2002년 6월 6일, 부산에서 1차전을 유럽의 강호 폴란드와 격돌한다. 한국팀은 예전의 한국팀이 아니었다. 전반 26분 황선홍이 선제골을 터트렸고, 후반 8분에는 유상철의 중거리 슛으로 승리의 쇄기를 박았다. 이후 한국은 16강에서 이탈리아를, 8강에서는 스페인을 꺾었다. 준결승에서 독일에게 1-0으로 분루를 삼켰지만, 월드컵 4강에 올라서는 위업을 달성했다.

유상철은 경신고와 건국대를 졸업하고 1994년 현대 호랑이에 입단한다. 입단 첫해 수비수 부문 K리그 베스트11에 선정되었다. 1996년에는 울산의 리그 우승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당시 감독이던 차범근은 유상철을 분데스리가에 보내려했으나 차감독의 경질로 무산되었다.

유상철은 K리그 사상 공격·미드필더·수비 부문에서 모두 베스트 11에 선정된 2명 중 한 선수이다. 심지어 공격수로는 득점왕까지 차지했었다. 탁월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킥력, 경기의 맥을 짚는 능력과 위치 선정 등이 국내 최고 수준이었다. 그러니 다양한 포지션에서 언제나 자기 몫을 해내는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가 바로 유상철이었다. 2005년,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를 국가대표로서 마지막으로 치루고, 2006년 5월에 은퇴를 한다. 한국선수로는 4번째로 센트리 클럽에 가입한 기록을 남겼다.

2009년 이후 여러 팀의 감독을 역임하다 2019년 5월,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재임 중에 췌장암이 발견되었고, 오랜 투병을 하였으나 2021년 6월에 우리 곁을 떠나갔다.

 

 

 

유상철 선수 가족 납골묘. 충주시 앙성면.

유상철의 얼굴을 새긴 비석에는 “그대가 있어서 대한민국이 즐거웠습니다”라고 적혀있다.

 

 

 

좌측에서 진입한 맥로가 유선수 가족묘에서 불과 10미터도 안되는 곳에 대명당을 맺었다. 유선수 가족묘는 이에 상응하는 흉에 걸렸다.

오래 전에 모신 조부모와 동생의 묘소가 발병의 원인으로 작용했고, 2020년 3월에 모친을 추가로 모신 것이 유선수의 명운을 재촉했다는 판단이다.

후대를 위해서는 길지로 옮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얼마전, 생제르맹의 이강인이 유럽 UCL 데뷔골을 넣었다. 25년전 프랑스 월드컵에서 유상철이 득점을 한 곳이 바로 그 경기장이다.

박종환(朴鍾奐, 1936~2023년) 감독

한국축구는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 신화”의 꽃을 피웠으나, 그 싹을 티운 것은 1983년 멕시코 청소년축구대회였다. 붉은 유니폼을 입고 벌떼처럼 달려드는 그들을 “붉은 악마”라고 불렀다. 축구의 변방 한국이 4강에 오르자 세계는 놀랐다. 그 주인공이 박종환이다.

박종환은 춘천고 축구선수였다. 그의 동기 중에는 이주일도 있었다. 경희대를 거쳐 청소년대표와 국대로 활동했으나 선수로서는 평평했다.

1976년 서울시청 감독으로 부임하여 팀을 실업 최강으로 만들었다. 혹독한 훈련으로 선수들의 원성을 샀지만 성적이 좋았다. 1980년 청소년축구대표 감독으로 발탁되고, 1981년 아시아 대회에서 우승하자 명장으로 인정받았다.

1983년 우여곡절을 거쳐 청소년세계대회에 출전했지만 사정은 열악했다. 선수들이 직접 쌀과 반찬을 챙겨야 했고, 박감독이 밥을 짓고 찌개를 끓이는 때도 있었다. 스태프는 없었고 박감독과 코치 1명 뿐이었다. 멕시코 고원에 적응하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트랙을 달리게했다. 훈련 도중 쓰러지는 선수도 생겼지만, 모두가 묵묵히 견뎌주었다.

한국은 첫 경기에서 스코트랜드에게 0-2로 패했다. 이어 개최국인 멕시코와 맞붙었다. 경기 종료 1분을 남기고 터트린 신현호의 결승골로 2-1승리를 거둔다. 이어서 3차전에 호주도 물리치고 세계 무대에서 첫 8강 진출에 성공한다. 이 때 “벌떼축구”라는 조어(造語)가 생겼다. 승전보는 전국을 들끓게 했다.

8강은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였다. 한국은 후반 10분 신연호가 선제골을 터트렸으나 26분에 동점을 허용한다. 연장전 전반 14분 골게터 신연호의 추가골로 2-1 승리를 거뒀다. 신문의 1면에는 대문짝만한 승전보가 전해졌고, 세계언론도 “붉은 악마”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준결승의 상대는 세계 최강 브라질. 전반 14분에 김종부가 선제골을 넣었으나 연이어 2점을 실점했다.

“4강 신화”이후 박종환에게 국제대회는 승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국내 프로축구에서만은 승승장구했다. 1993~1995년 K리그 3연패의 금자탑을 쌓기도 했다.

2003년 10월 7일, 열광과 감동의 추억을 남긴 박종환 감독이 떠나갔다.

 

 

 

2016년에 별세한 부인과 나란히 납골항으로 모셨다.

 

 

 

서북방에서 오는 맥로가 납골당으로 진입한다. 박감독 납골항은 30회절이 넘는 대명당 핵심처에 모셨다. 필자가 확인한 납골당 명당중 최고였다.

박감독의 전설이 오래도록 기억되고, 후손들의 삶도 넉넉하시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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