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에 절묘하게 스며든 전통문화…‘아트자카르타’ 가다

노형석 2023. 11. 22.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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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찾은 아트자카르타의 전시장 광경. 뒤쪽의 갤러리 부스들을 배경으로 인도네시아 작가 좀펫 쿠스위다난토의 설치작품 신작 ‘정령들은 어디로 가나?’가 선보였다. 기업과 화랑의 지원을 받아 만든 여러나라 작가들의 신작을 선보이는 커미션 프로젝트(간이기획전)의 일부다. 노형석 기자

목이 콱 막히고 매캐했다. 하지만, 눈은 시원했고 마음은 즐거웠다.

지난 17~19일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도심부에 벌인 국제 미술품장터 ‘아트 자카르타 2023’을 살펴본 첫 느낌은 감각의 기묘한 엇갈림이었다.

지독한 교통체증과 대기오염으로 유명한 도시답게 쿨럭거리며 전시장을 돌아야 했으나, 현지 작가들의 출품작들은 예상을 뛰어넘는 스케일과 콘텐츠의 풍성함, 깊이감을 드러냈다.

아트 자카르타는 2009년 바자아트자카르타란 이름으로 시작돼 2017년 지금 이름으로 바꾼 이래 싱가포르의 아트에스지와 더불어 동남아시아 국제미술품 장터를 대표하며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받는 행사다.

13회째를 맞은 올해 행사는 자카르타 도심부의 지엑스포(JIEXPO) 케마요란에서 마련됐다. 인도네시아 40개 화랑과 한국의 7개 화랑을 비롯해 말레이시아, 타이, 필리핀, 베트남, 대만, 중국, 일본, 러시아, 호주에서 온 화랑들까지 모두 68개 업체가 참여해 부스를 개설했다. 작품 장터는 1만㎡가 넘는 방대한 전시장에 화랑들이 참여하는 본전시 부스와 부스 사이 기획전시 영역, 그리고 기업들의 협찬 전시 영역을 꾸려 마련됐다. 스리사산티 갤러리와 로 프로젝트 등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주요 화랑은 전시장 한가운데 개설됐고, 한국화랑들도 아라리오 갤러리와 예화랑, 백아트 등이 전시장 들머리와 안쪽 요지에 차려져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작가와 한국 작가의 출품작들을 함께 배치해놓고 관객들을 맞았다.

지난 17일 아트자카르타의 전시장 커미션 프로젝트 영역의 첫머리에 나온 인도네시아 국민작가 에코 누그로호의 설치작품 신작 ‘나무 아래’. 콘크리트 기둥 위에 꽂힌 야자수 아래서 쉬고있는듯한 주황색 작업복의 하급 노동자와 엎드려 표를 구걸하는 양복 차림 정치인의 조형물을 배치해 지금 인도네시아의 사회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노형석 기자
아트자카르타의 커미션 전시에 참가한 박지현 작가의 신작 ‘도무손탑’. 폐기된 인쇄 재단용 합판덩어리로 만든 독특한 조형물로 전시 부스 사이의 커미션 작품 공간에 다른 동남아 대가들의 작품들과 나란히 설치됐다. 노형석 기자

이 아트페어에서 느껴지는 것은 지역적인 바탕을 깔면서 세계적인 보편성을 추구하는 글로컬리티가 충만하다는 점이다. 68개 참여 화랑이 모두 아시아권이고, 전시장 곳곳에 부스를 두고 퍼져있는 인도네시아 갤러리들은 자카르타 말고도 현지의 시각예술 거점인 족자카르타, 반둥, 발리 등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업체들이 많았다.

출품작품들도 지역의 전통문화를 짙게 반영하면서도 현대미술의 맥락에 충실한 작품들이 많다. 1만7000개 넘는 크고 작은 섬들이 지닌 대자연의 이미지와 해상 실크로드 교역과 문화 교류를 했던 옛적 조상들의 종교 문화적 산물들이 대다수 출품작들의 배경으로 깔려있었다. 선조들이 남긴 그림자극과 인형, 벽화, 바틱 의상(전통 의상), 수예 전통 등이 21세기 현대미술의 설치작품, 조형물, 영상물, 첨단디지털 아트에 절묘하게 스며든 수작들이 상당수 나왔다. 상당수 작품들 속에서 대자연의 동식물, 용과 괴수를 비롯한 상상의 짐승들, 사람의 형상들은 한데 뒤섞이고 융합된 모습으로 다가왔다.

본전시 외에 주목되는 것이 본격적으로 기업과 화랑의 지원을 받아 만든 여러나라 작가들의 신작을 선보이는 커미션 프로젝트(간이기획전). 프로젝트 영역에 들어가자 첫머리에 나온 인도네시아 국민작가 에코 누그로호의 설치작품 신작 ‘나무 아래’가 시야에 들어왔다. 콘크리트 기둥 위에 꽂힌 야자수 아래서 쉬고 있는 듯한 주황색 작업복의 하급 노동자와 엎두려 표를 구걸하는 양복 차림 정치인의 조형물을 배치해 지금 인도네시아의 사회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다. 정치인의 손은 여러 개가 달려있고, 노동자의 헬멧 쓴 머리는 신상처럼 여러 개가 복수로 달린 독특한 풍모다.

조금 위쪽에 자리한 인도네시아 작가 좀펫 쿠스위다난토의 설치작품 신작 ‘정령들은 어디로 가나?’도 색다른 구성이 돋보였다. 식민지시대부터 21세기까지 인도네시아의 권력과 사회질서의 변모를 모티브로 삼아 트럭 뒤쪽에 웅크린 정령들이 과거의 기억들을 이야기하고 재구성하는 장면을 담은 괴기스럽고 초현실적인 작품이다.

한국 작가로는 이른바 ‘도무송’으로 불리는 재단용 합판을 이용해 조형물을 만든 ‘도무송’ 연작으로 알려진 박지현 작가가 현지 인테리어 관련 기업의 시트지를 제공 받아 만든 3m 넘는 도무송 타워를 다른 동남아 작가들의 설치물들과 같이 선보여 눈길을 받았다. 현지 인디뮤지션들의 전자기타를 화폭 삼아 전통신화의 신령스런 동물들의 도상들을 현대적인 팝아트 이미지를 그려 넣은 특별 전시도 이채로웠다.

18일 오전 자카르타 아트원 미술관에서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주관으로 열린 한국 아세안 컬렉터 소장품 기획전 개막식. 왼쪽에 권오상 작가의 사진 조각상이 놓여있다. 노형석 기자

인도네시아는 최근 2~3년 사이 인도, 타이와 더불어 세계 현대미술계에서 주목받는 핫스팟 중 하나로 떠올랐고 한국 현대미술계와의 교류도 급증하는 추세다. 세계 최고의 권위를 지닌 국제미술제인 독일 카셀도큐멘타의 지난해 총감독을 인도네시아 작가그룹 루앙루파가 아시아 미술인들 가운데 최초로 맡았고, 공동체 문화를 바탕으로 한 협업을 뜻하는 룸붕이라는 전시 컨셉트는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서구의 주요 국제 비엔날레와 아트페어 등에서 인도네시아 현대미술가들의 작품들이 속속 소개되면서 타이와 함께 동남아 현대미술의 대표주자로 약진중 이다. 수도 자카르타에서 열리는 국제예술품판매전람회인 아트자카르타는 싱가포르의 에스지 국제아트페어와 함께 세계시장에서 동남아미술의 유력한 허브 구실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화교 출신의 인도네시아 사업가이자 컬렉터로 아트자카르타의 디렉터를 맡고있는 톰 탄디오. 18일 자카르타 아트원 미술관에서 개막한 한국 아세안 컬렉터 소장품 기획전 전시장에서 관계자들과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이다.노형석 기자

스리사산티갤러리의 기획자인 베네딕토 아우디제리코는 인도네시아 미술의 특장으로 공동체 문화 전통의 깊은 영향력을 지목했다. 오랜 동안 다문화와 오랜 교류사 전통을 바탕으로 이어진 공동체 생활 문화를 바탕으로 작가, 작품과 가족처럼 밀접한 대면관계 맺기를 선호하는 컬렉터들의 독특한 성향을 형성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아트페어와 연계된 행사의 하나로, 18일 오전 자카르타 아트원 미술관에서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주관으로 열린 한국 아세안 컬렉터 소장품 기획전 개막식에서는 한국 아트페어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점심 시간 전후한 시간에 전시 개막 행사를 열어 뷔페식으로 차려놓은 현지 음식들을 마치 도시락처럼 구성된 종이 접시에 얹어 함께 나눠 먹으면서 각자의 컬렉션에 대해 정담을 하는 장면들이었다. 전날 자카르타 교외의 살라하라 예술센터에서 한국의 소장 미술가들을 한국의 기획자들이 소개하는 교류기획전에서도 직접 작가의 작품은 물론 기획자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지속하려는 현지 관객들의 열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지의 화교 재력가이자 컬렉터 출신으로 아트자카르트의 디렉터를 4년째 맡고 있는 탐 탄디오는 “아직 미술제도의 인프라가 한국이나 일본, 서구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지만, 작가와의 접촉과 관계 맺기를 중시하고 지역의 미술문화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건강한 컬렉터 문화가 뿌리 깊게 형성되어 있다”며 “앞으로 기업과 국외 미술계와의 관계가 확대되면 인도네시아가 세계적인 미술시장의 거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카르타/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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