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메가한양’이 있었다고?…마포·장한평에 인구 절반 살았다는데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2023. 11. 19. 11:09
대서울의 확장사를 따라 걷다 (1) [사-연]
최근 여당의 경기 일부 지역의 서울 편입 공약으로 여론이 시끌시끌합니다. 시작은 김포였는데, 이것이 점차 확대되어 구리·하남·고양·광명·부천 등 서울에 맞닿아 있는 경기도 온 동네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외곽도시를 하나둘씩 편입해 인구 천만이 넘는 거대도시인 ‘메가시티 서울’을 완성해 도시 경쟁력을 높이고, 뉴욕이나 도쿄, 베이징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인 도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주장을 제기한 쪽의 논리입니다. 하지만 반대는 ‘메가 서울’의 등장은 정책과제인 지방 균형발전에 역행하는 처사로, 오히려 지방 소멸과 서울에 인구 및 인프라 쏠림 현상을 가속화 할 것이라 말합니다.
서울의 경계는 오랜 역사 속에서 수십 번 고쳐 쓰여 왔습니다. 20세기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120여년의 시간만 하더라도 그 넓이는 몇 번이고 커지고 때로는 줄어들었습니다. 사-연에서는 경기도 일부 지역의 서울 편입과 관련한 찬반과 논란은 일단 접어둡니다. 크게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해방 이후 지금까지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서울의 확장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수도 한양과 한성부
서울에는 기원전 4,000년 전인 신석기 중기부터 사람들이 산 흔적이 발견됩니다. 삼국시대에도 한강이 흐르는 서울 땅을 차지하려고 세 나라가 치열한 접전을 벌인 기록들이 전해집니다. 고려시대에는 개경 외 핵심 도시로 서경·남경·동경의 3경을 두었는데, 이 중 남경이 서울에 해당했습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이어온 서울의 변화에 대해 말하려면 연재가 아니라 논문을 써야 할 듯하니, 이야기에 앞서 시작점을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서울이 국가의 수도로 낙점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로서 도시의 기틀이 마련된 조선의 개국 시점부터 이야기를 이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왕조의 태동과 함께 나라의 도읍으로 정해진 한양은 철저한 계획도시였습니다. 인구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설계되었고,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교사상과 풍수지리의 개념이 도시 곳곳에 반영되었습니다. 궁궐과 종묘사직이 들어서고, 한양이 수도로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태조는 정도전에게 한양도성의 축성을 지시합니다. 1395년 시작한 공사는 이듬해 사대문의 건설과 함께 완공되었습니다. 그 후 시대를 거치며 흙으로 된 성벽을 견고한 돌로 바꿔 쌓는 대대적인 개수가 있었습니다.
수도 한양을 관할하는 관청으로 한성부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서울시청처럼 한양 주민을 관리하고 도시 운영의 책임을 맡은 행정기관이었습니다. 도로 유지와 보수, 화재 예방, 도랑의 청소 등과 같은 관리업무와 호적과 호패의 발급, 오가작통, 부역, 진휼과 같은 행정업무를 담당했고, 이에 더해 사법 기능까지 맡았습니다. 지금의 서울시장 격인 한성부의 수장은 정2품의 판윤이었습니다. 도지사나 광역시장에 해당하는 각 도의 관찰사가 종2품 외관직이었던 것에 비해 직위가 높았습니다.
한성부는 다섯의 행정구역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의 5부 아래에는 방과 계, 동의 하부 행정구역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행정동과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각 부에 속한 방의 수는 조선왕조를 거치며 분화해 늘어나기도, 통합되어 줄어들기도 했지만 5부 체계는 변함없이 유지되었습니다. 부와 방의 책임자로는 중앙에서 파견한 관령을 두었습니다.
도성 밖 한양생활권, 성저십리
한양도성의 안쪽만을 한성부의 범위로 한정되어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한성부의 범위는 성 안보다 바깥이 훨씬 넓었습니다. 한성부는 백악산·낙산·목멱산·인왕산을 잇는 18㎞의 도성 안과 성곽 밖의 10리(약 4km) 지역을 포괄했습니다. 사대문에서 10리의 바깥 지역을 뜻하는 ‘성저십리’라는 말이 여기서 등장했습니다. 성저십리에도 각각의 방을 두고 부의 관할지역으로 관리했습니다. 이 구역을 칼같이 ‘성 밖 10리’로 한정한 것이 아니라 그 인접거리의 강이나 하천, 산과 언덕 같은 자연 지형을 바탕으로 설정한 것이라 이를 명확히 선으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대략적으로 동으로 지금의 장한평과 살곶이벌, 서로 마포와 서강 일대, 남으로 한강, 북으로 북한산 동쪽 능선을 둘러싸는 면적이었습니다. 지금의 서울시 강북 지역 상당 부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한성부 인구의 대부분은 성 안에 집중되었고, 성외 지역에는 상주인원이 별로 없었습니다. 1426년(세종 8년)에 작성된 통계에 따르면 한성부 인구 10만 9000여 명 중 성저십리 인구는 불과 6000여 명 뿐이었습니다. 성저십리는 그린벨트와 유사한 점이 많았습니다. 자연녹지 보존을 위해 벌목과 매장을 금지하는 금표가 곳곳에 설치되었습니다. 심지어 나무뿌리를 캐어먹거나 돌을 채굴하는 행위도 금지되었습니다. 국가에서 성저십리 관리를 이렇게 철저히 했던 데에는 두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수도의 도시미관을 고려해서였고, 둘째는 왕족과 고관대작들의 사냥터로 사용한 이 지역을 쾌적한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발전과 대동법의 실시, 금속화폐의 유통 등의 이유로 한양을 중심으로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게 됩니다. 모든 거래가 화폐를 매개로 이루어지자, 노동력을 화폐로 사고파는 시장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가진 것 없는 지방민들이나 빈민들은 품삯을 받고 일을 하기 위해 한양으로 대거 몰리게 됩니다. 더 이상 인구의 수용이 어려울 정도로 사대문 안이 포화 상태가 되자, 국가에서는 택지를 분급하는 등 성저십리로의 이주책을 실시합니다. 1789년(정조 13년) <호구총수>에 따르면 성내에는 11만 2000여 명인 반면 성저십리 인구가 무려 7만 6000여 명으로 한성부 전체 인구의 40.6%까지 증가하였습니다. 300여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도성 안 인구는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도성 밖 인구가 대폭 늘어난 것입니다. 이 증가세는 계속 이어져 조선 후기에는 한양의 절반이 성저십리에 거주하게 됩니다.
인구가 늘며 도성의 배후지역 성저십리에도 변화가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던 전근대사회에서는 물류 이동의 한계가 있었고, 장기 보관이 어려운 채소나 과수의 경우 소비도시의 지근거리에 공급처를 두어야 했습니다. 왕십리나 살곶이벌을 중심으로 근교 농업이 성행하였고, 이 지역은 도성 안 인구들이 소비하는 식량을 생산하고 조달하는 경작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습니다. 박지원의 <연암집>에는 “왕십리에서 무, 살곶이 다리에서 순무, 석교에서 가지·오이·수박, 연희궁에서 고추·부추·해채, 청파에서 미나리, 이태원에서 토란 같은 것들이 나온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모두 성저십리 지역의 농업에 관한 서술입니다.
한편 한강과 맞닿아 있는 마포나 서강, 용산 등 성저십리 서쪽 지역의 경우 수상교통을 중심으로 하는 상업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한강 나루터 중 대표격인 마포나루의 경우 생선과 소금을 실은 배들이 서해안과 한강 상류를 타고 일 년에 만여 척이나 드나들 정도로 번화한 포구였습니다. 서강방과 신수철리계(현 서강동과 신수동)의 경우 솥이나 농기구를 제조하는 수공업자들이 모여 살아 ‘무쇠막’ 또는 ‘무수막’이라 불렸습니다. 이처럼 도성 안이 왕과 고위 관료, 특권층이 중심이 되는 공간이었다면, 성저십리는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일반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참고자료>
ㅇ 서울역사박물관 상설전시
ㅇ 김경록 외 7인, 서울역사중점연구 제5권「조선시대 다스림으로 본 성저십리」, 서울역사편찬원
ㅇ 김기호 외 6인, 서울도시계획사 제1권 「현대 이전의 도시계획」, 서울역사편찬원
ㅇ「서울지도」, 서울역사박물관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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