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능을 망치러 온 지성의 구원자 [주기율표 위 건강과 사회] 

김명희 2023. 11. 19.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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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은 아이러니한 금속이다. 인간의 지능을 갉아먹고 목숨을 빼앗으며 건강 불평등의 중심에 자리하지만, 한편으로 인류 지성을 꽃피우고 사회정의를 증진하는 역할을 했다.
납 추방 운동을 벌인 과학자 클레어 패터슨. ⓒCaltech Archives

2000년대 중반 잠시 미국에 살았다. 동네 공공도서관 DVD 서고를 들락거리다 〈코스모스 COSMOS〉와 마주쳤다. 우주를 동경하는 전 세계 청소년들의 필독서, 내가 어릴 적 읽었던 바로 그 〈코스모스〉의 자매 다큐멘터리였다.

영상에는 생전의 칼 세이건 박사가 직접 출연하여, “우리 모두가 별들로부터 만들어졌음을(We’re made of star stuff)” 일깨우며 경이로운 우주와 인류의 지적 여정을 들려주었다. 다큐멘터리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느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종류의 감동, 그리고 책과는 다른 ‘연결감’을 주었다. 첫 에피소드가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나의 ‘스승님’이 되었다.

2014년에 제작·방영된 〈코스모스〉 속편은 ‘스승님’의 부재를 실감하게 했지만, 1980년 원작 이후 한발 더 나아간 인류의 발걸음과 더불어 그동안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과학적 성취의 뒷이야기를 보여준 수작이었다. 그중 ‘클린룸(The Clean Room)’ 에피소드는 보건학 전공자라면 잊을 수 없는 한 과학자의 여정을 소개했다.

이야기의 주인공 클레어 패터슨은 20대 초반에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할 만큼 촉망받는 지질화학자로, 질량분석기를 사용해 원자폭탄에 쓰일 우라늄 동위원소를 집적하는 일을 맡았다. 전쟁이 끝나고 박사과정에 진학해서는 동위원소 측정 기법을 활용하여 지구의 나이를 추정하는 연구에 참여했다. 그때까지 지구 나이는 성경에 따른 6000년에서부터 33억 년까지 다양한 가설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가 속한 연구팀은 일찌감치 측정 방법을 확립했다. 우라늄 동위원소가 붕괴되면서 납 원소가 생성되는데, 우라늄의 반감기가 일정하기 때문에 특정 광물에서 우라늄과 납의 구성비를 계산하면 광물의 생성 나이를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험은 번번이 장벽에 부딪혔다. 납 함량 측정 결과가 너무 들쭉날쭉했던 것이다. 아무리 실험실을 쓸고 닦아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심지어 비어 있는 대조 표본에서조차 납이 검출되었다. 이 문제는 패터슨이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 부임하여 새로운 실험실을 만들고 나서야 해결되었다. 그는 환경에 존재하는 납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해, 외부로부터의 공기 유입을 차단했을 뿐 아니라 납으로 된 배관, 납으로 피복한 전기선까지 모두 교체했고, 측정 장비와 시약도 산성 용액으로 세척하고 증류 과정을 거치는 등 집착에 가까운 노력으로 역사상 가장 완벽한 ‘클린룸’을 만들었다. 그리고 1956년, 지구에 떨어진 운석의 지르콘 결정에 함유된 ‘순수한’ 납 함량을 측정함으로써 마침내 지구 나이 측정에 성공했다.

바로 여기에서 이야기는 뜻밖의 길로 접어든다. 그는 도처에 존재하는 납이 대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궁금증을 갖게 되었고, 다양한 환경 표본에서 납 함량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과거에 비해 납 함량이 300배 이상 상승했고, 특히 최근 30년 동안 상승세가 두드러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배출원에 대한 다양한 가설을 검토한 끝에, 1923년 유연휘발유의 등장이 납 오염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이 결과는 1963년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되었다.

예상할 수 있듯, 막강한 돈과 권력을 가진 정유산업은 청부 과학자를 동원하여 그의 연구를 비판했다. 한편으로는 연구자금으로 회유를,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와 대학의 연구 지원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심지어 정신 나간 괴짜 과학자로 그리며 인신공격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실험밖에 모르는 집착왕 패터슨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대서양과 태평양의 심해, 남극과 북극, 요세미티 설산, 화산 분화구에 이르기까지 지구 방방곡곡을 다니며 다양한 시기와 환경 특성을 반영하는 지질 표본을 채취했다. 4500년 된 페루의 인체 유골, 2000년 된 이집트 미라의 납 함량도 그의 분석 대상이었다.

어린이 12만5000명의 생명을 구한 조치

결과는 일관되게 나타났다. 현대의 납 수준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으로 볼 수 없었다. 미국인 신체의 납 농도는 고대인의 600배에 달했다. 이제 납은 일부의 ‘직업병’을 넘어서, 모든 사람, 특히 어린이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공중보건 문제임이 분명해졌다. 패터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들도 점차 늘어났다. 특히 1979년에는 낮은 농도의 납도 어린이들에게 학습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는 중요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1975년 미국 환경보호청은 유연휘발유 규제를 시작했다. 패터슨이 세상을 떠난 1년 뒤인 1996년에 유연휘발유는 미국 내에서 완전히 금지되었다. 이와 더불어 인체의 납 농도도 빠르게 낮아지기 시작했다. 유연휘발유 사용 중단은 20세기 공중보건의 큰 성취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2011년 연구에 따르면, 유연휘발유 금지 조치는 세계적으로 연간 100만명의 사망, 특히 어린이 12만5000명의 사망을 예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연휘발유 사용 중단은 20세기 공중보건의 큰 성취 중 하나다. 현재는 무연휘발유만 판매한다. ⓒ연합뉴스

납의 유해성이 잘 알려진 것은, 역설적으로 납이 워낙 유용하고 친숙한 물질이었던 탓이다. 주기율표의 82번째 원소 납의 원소기호는 Pb, ‘무른 금속’을 뜻하는 라틴어 ‘Plumbum’에서 따왔다. 납을 뜻하는 한자어 연(鉛)은 쇠(金)와 늪(㕣)을 합친 것으로, 역시 비슷한 의미를 갖는다. 납은 다양한 광물에서 추출할 수 있어 구하기 어렵지 않고, 견고하면서도 무른 특성을 지니며 녹는점도 상대적으로 낮기에 다루기 쉽고 활용성이 크다. 기원전 6500년 무렵 인류가 최초로 제련한 금속이라고 알려졌을 만큼 예로부터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다. 로마제국에서는 상수관, 식기, 거울, 동전, 심지어 화장품과 와인 감미료에까지 납을 이용했다.

납의 유용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짧은 파장의 전자기파(감마선·엑스선)를 흡수하는 성질 덕분에 방사선 장비를 사용하는 수술실이나 혈관조영실 방호복에도 사용된다. 요즘은 더 가볍고 안전한 재료로 대체되고 있지만, 방사능 차폐 능력 측정에는 여전히 mmPb라는 납의 단위를 사용한다. 또한 가공하기 쉬우면서 저렴한 것에 더해 무겁기 때문에 가속 시 운동에너지가 크고 바람의 영향을 덜 받을 수 있어서 탄환으로도 적격이다. 저렴하고 효율적인 축전지를 만드는 데 활용되며, 독특한 색조를 만들어내고 견고함을 더할 수 있기에 페인트에도 납을 첨가했다. 20세기 초, 자동차 엔진의 노킹을 해결하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휘발유에 여러 가지 물질을 첨가하며 시험했는데, 그중 가장 완벽한 물질이 테트라에틸납(Pb(C2H5)4)이었다. 이렇게 유연휘발유가 탄생했다.

쓰임새만 본다면 이보다 더 완벽한 금속이 없을 것 같지만, 납은 심각한 건강문제를 초래한다. 한때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원인 중 하나가 납중독에 의한 인구집단의 건강쇠약이었다는 가설이 지지를 받기도 했다. 납 채굴 기술자의 건강 문제는 기원전 4세기 히포크라테스도 언급한 바 있고, 산업혁명 시기 영국에서는 노동자의 납중독에 대처하기 위한 별도의 규제가 존재했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1920년대 유연휘발유 생산 공장에서도 이미 노동자 여러 명이 납중독으로 고통을 겪었다.

납은 인체에 흡수되어 헤모글로빈 합성에 관여하는 효소를 억제하기 때문에 빈혈을 일으키며, 고혈압, 만성신부전, 불임 등 건강 문제를 초래한다. 무엇보다 신경독성이 심각한데, 특히 아동기 노출은 인지기능 저하의 원인이 된다. 지난해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된 논문은 시대별 아동의 혈중 납 농도 자료, 유연휘발유 사용량, 인구통계 등을 활용하여 1940년대 이래 유연휘발유가 모두 합쳐 8억2400만 점의 미국인 IQ 점수를 감소시켰다고 추정했다. 납의 신경독성이 워낙 명백하다 보니 납-범죄 가설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다. 유연휘발유 사용이 정점에 달했던 1960~1970년대에 태어나 성장한 어린이들이 고농도 납에 노출되어 지능 저하와 충동 행동, 사회적 공격성이 높아지며 폭력 범죄가 늘어났으며, 1990년대 이후 여러 선진국에서 공통적으로 폭력 범죄가 감소한 것은 유연휘발유 금지에 의한 어린이 납 노출 감소와 관련 있다는 가설이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변화 요인들도 있었기 때문에 (대표적으로 〈괴짜경제학〉의 저자 스티븐 레빗은 임신중지 합법화가 범죄율 감소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납의 신경독성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잘 보여준다. 국제적으로 납의 ‘안전한 허용 기준’은 없다.

이제 대부분의 생활용품에서 납이 퇴출되고, 이 모든 문제가 과거의 유산으로 기억된다면 좋겠지만, 납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코스모스〉 후속편이 방영된 2014년, 미국 미시간주 플린트시에 ‘물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플린트는 1908년 미국을 대표하는 자동차회사 제너럴모터스가 탄생한 도시로,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호황기에는 ‘자동차 도시’로 불리며 인구가 20만명에 이를 정도로 번성했다. 그러나 1980년대 세계화와 함께 자동차 공장들이 지역을 떠나며 탈산업화가 가속되고 지역 경제가 급속히 위축되었다. 인구는 전성기의 절반으로 줄었고 전체 인구의 45%가 빈곤층이었다.

2011년, 시의 재정적자가 2500만 달러에 이르면서 주정부가 위기 관리자를 급파하고 긴축재정에 돌입했다. 시는 재정 절감을 위해 지난 50년간 수돗물을 공급받았던 ‘디트로이트 상하수 개발’로부터 플린트강으로 상수원을 변경했다. 이 강은 오래전부터 암암리에 산업폐수가 버려지던 곳이다. 사전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부식성 강한 강물이 1901~1920년대에 설치된 납 파이프 상수관으로 유입되면서 납 성분이 유출되기 시작했다. 2014년 4월25일, 플린트 강물 수도 공급이 되자마자 주민들은 탁하고 악취가 나는 수돗물을 마주했다. 하지만 정부는 그저 물을 끓여 먹으라고 안내하며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0월이 되자 제너럴모터스 공장은 부품 부식을 우려하여 수돗물 사용을 중단하고 다른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

2016년 1월 미국 미시간주에서 ‘플린트시 납 수돗물 사태’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AP Photo

2015년 2월, 연방 환경보호청의 수질 검사에서 납 농도가 비정상으로 높았다. 3월에 시의회가 예전 상수원으로 복귀할 것을 결정했지만, 시 정부는 이를 거부했고 7월에는 시장이 대중 앞에서 수돗물을 직접 마시며 안전성을 홍보하기까지 했다. 정부를 믿을 수 없게 된 주민들은 대학 연구팀에 직접 측정을 의뢰했다. 그해 9월 버지니아 대학 연구팀은 수백 가구의 수돗물 시료를 직접 분석하여 납 함량이 심각하게 높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역 병원의 소아과 연구팀도 2014년 이전에 비해 어린이 혈중 납 농도가 두 배 이상 높아졌다고 발표했다. 이제 플린트 물 사태는 전국 이슈가 되었다.

‘플린트 물 사태’의 교훈

다른 문제도 불거졌다. 소독을 위해 투입한 염소가 납과 결합하면서 수돗물의 염소 농도가 낮아졌고, 그러다 보니 소독 효과가 감소해 세균이 번식하게 된 것이다. 대장균이 발견되고 심지어 레지오넬라가 유행하여, 2014년 6월에서 2015년 10월까지 최소 87명의 레지오넬라 환자가 발생하고 12명이 사망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염소 투입을 지나치게 늘리자 이번에는 발암물질인 TTHM(total trihalomethane) 농도가 상승했다. 문자 그대로 설상가상이었다.

플린트 물 사태의 직접적 원인은 오래된 납 수도관과 오염된 강물이지만, 근본적 문제는 탈산업화에서 비롯된 극심한 지역 불평등, 가난한 유색인종 주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뿌리 깊은 인종차별 관행이었다. 환경 피해는 무작위로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유연휘발유에 노출되던 1980년대에도 가난한 유색인종이 밀집한 도심 지역의 오염이 더욱 심각했다. 예컨대 도심지 흑인 어린이의 55%가 상당히 유해한 수준의 혈중 납 농도를 보였다. 플린트 물 사태는 환경 부정의(environmental injustice) 사건의 긴 목록에 사례 하나를 추가한 것이었다.

납이 있었기에 금속활자를 이용한 대량 인쇄술이 발전할 수 있었고, 이는 급속한 지식 발전과 확산을 가져왔다. ⓒ위키백과

납은 아이러니한 금속이다. 인간의 지능을 갉아먹고 목숨을 빼앗으며 건강 불평등의 중심에 자리하지만, 한편으로 인류 지성을 꽃피우고 사회정의를 증진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납이 있었기에 금속활자를 이용한 대량 인쇄술이 발전할 수 있었고, 이는 서구 사회에 종교개혁과 더불어 급속한 지식 발전과 확산, 그리고 공감의 발전을 가져왔다. 역사학자 린 헌트는 〈인권의 발명〉(교유서가, 2022)에서 18세기 서구인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읽혔던 통속소설들이 타인의 삶과 감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타인의 내면도 결코 나와 다르지 않다는 ‘상상된 공감’을 통해 보편적 인권을 깨닫게 했다고 주장했다.

칼 세이건은 과학기술의 사회적 파급력이 커질수록 과학자들의 사회적 책임이 커져야 하고, 그에 못지않게 회의(懷疑)하는 대중의 집단지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오늘의 납 이야기는 이 말이 옳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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