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기업 ‘중동 수주전’ 절박… 정부 지원없인 ‘사막의 외톨이’ 될수도”[현안 인터뷰]

이근홍 기자 2023. 11. 17.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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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안 인터뷰 - ‘FTA 분야’ 최고전문가 정인교 전략물자관리원 원장
대중수출 감소속 무역질서 격변
제2 중동붐, 경제위기 극복 직결
인프라·스마트팜부터 방산까지
중동 각국과 윈·윈 사업 무궁무진
대중동 수출 30%까지 확대 가능
정주영 신화로 쌓은 끈끈한 신뢰
미·중·일·유럽엔 없는 최고 강점
정인교 전략물자관리원장이 지난 2일 서울 강남구 전략물자관리원 사무실에 걸린 세계지도 현황판 앞에서 제2 중동붐의 효과와 경제협력 강화 전략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곽성호 기자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의 중동 순방을 계기로 ‘제2 중동붐’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순방 등 윤 대통령 취임 후 중동에서 확보한 투자 약속은 총 792억 달러 규모로, 107조 원 오일머니 시장이 열린 것이다.

미·중 패권 경쟁 속 절대적 비중을 차지했던 대중(對中) 수출이 급감하는 등 한국 무역 지형의 새 판 짜기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중동이 새로운 경제협력 파트너로 떠올랐다. 특히 ‘포스트 오일 시대’를 준비하는 중동의 산유 부국들은 ‘비전 2030’을 통해 비석유 분야에서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려 하고 있고, 이 과정에서 첨단 제조·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인 한국은 최고의 조력자로 주목받고 있다. 실제 현대자동차의 사우디 자동차 조립공장 설립, HD한국조선해양과 사우디의 합작조선소 건립 등 굵직한 사업뿐 아니라 디지털, 의료, 로봇, 스마트팜, 관광, 뷰티 등 신사업 분야에서 다양한 업무협약(MOU)이 체결되고 있다. 재계와 산업계에서 한국이 미래를 향한 중동 각국의 청사진을 이해하고 장기적 동반자 관계를 형성하면 ‘윈-윈’할 수 있는 분야가 무궁무진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지난 30여 년간 국제통상정책·경제안보·자유무역협정(FTA) 분야 최고 전문가로 활약해 온 정인교(62) 전략물자관리원 원장은 제2 중동붐은 한국의 위기 극복 전략과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정 원장은 “지금 중동은 글로벌 기업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곳으로 ‘정주영 중동 신화’ 등 오랜 신뢰 관계를 쌓아온 한국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며 “정부의 탄탄한 지원 속에 후속 사업이 이어진다면 향후 대중동 수출을 지금보다 약 30% 늘리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지난 8월 전략물자관리원 원장으로 취임한 정 원장을 최근 서울 강남구 전략물자관리원 사무실에서 만났다. 약속 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해 인터뷰를 준비하는 사이 정 원장은 방 안에서 몇 통의 전화를 잇달아 주고받으며 눈코 뜰 새 없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걷었던 와이셔츠 소매를 다시 내리며 인터뷰실로 들어온 정 원장은 “가히 경제안보 시대라 할 만큼 전략물자관리원이 요즘처럼 바쁠 때가 또 있을까 싶다”고 했다.

― 제2 중동붐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사우디, UAE, 카타르 등은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전부터 포스트 오일 시대에 대해 논의를 해왔다. 다만 최근 비전 2030이라는 이름 아래 다수 중동 국가들이 빠르게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데 이는 시대적으로 본격적인 생존 전략을 모색하고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미·중 갈등, 보호무역주의 강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전쟁 등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수출을 늘려서 지금의 경제 위기를 타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제2 중동붐은 한국의 위기 극복 전략과 직결돼 있고, 대통령을 비롯한 각 기업이 중동 진출에 강한 의지를 보이는 점은 참으로 다행스럽다.”

― 윤 대통령의 중동 순방 성과를 평가한다면.

“다수의 MOU를 체결한 것도 의미 있지만, 그 이후 정부가 체계적으로 후속 조치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지난해 사우디와 체결했던 290억 달러(약 38조4500억 원) 규모의 투자 MOU 중 현재 60% 이상이 구체적인 사업으로 가시화되고 있다는 소식도 나오는 것이다. 또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순방 등 정상외교를 할 때 큰 경제단체들이 함께 참여하는데 코트라나 한국경제인협회, 대한상공회의소 등이 현지에서 체계적인 분업을 통해 정부와 기업을 지원한 모습도 상당히 돋보였다. 최근 중동은 글로벌 기업의 각축전이 가장 심하게 벌어지는 지역인데, 한국은 중간 규모의 국가로 현지 비즈니스가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정부, 기관, 기업 등이 힘을 모아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한국 내부의 긍정적 요인들이 중동 순방 성과로 이어졌다는 점이 가장 의미 있다.”

― 기대되는 중동과의 경제협력 분야가 있다면.

“중동에서도 경제 규모가 가장 큰 사우디는 일을 벌이면 대부분이 대형 사업이다. 네옴시티는 초대형 인프라·플랜트 구축 사업이기 때문에 스마트시티, 관광지, 주거 개발 등에서 협력할 사업이 많다. 또 현대차 자동차 조립공장 설립과 같은 제조업과 청정에너지, 스마트팜 분야의 협력도 유망하다. UAE와 카타르 역시 현지 에너지와 자원 개발 사업에 역량을 모으고 있고, 한국 방산에도 관심이 많다. 앞으로는 선진 바이오·의료 시스템 분야에서도 많은 기업이 중동 진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중동 수주전에서 최대 경쟁국은 어디인가.

“미국, 중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사실상 모든 국가가 우리의 잠재적 경쟁국이라고 봐야 한다. 중국은 막대한 자본력과 현지 공사에 투입할 인력을 보유하고 있고, 일본은 기술력이 뛰어나다. 유럽에서는 독일, 프랑스, 유럽 등이 중동 공략에 나서고 있는데 본격적인 진출을 시도하면 우리와 경쟁 관계에 놓일 수 있다.”

― 중동 공략에 있어 한국만이 지닌 강점을 꼽는다면.

“가장 큰 강점은 1970년대 중동붐 신화부터 이어져 온 중동과 한국 기업 간 끈끈한 신뢰 관계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70년대에 이룬 ‘중동 건설붐’은 이후 범현대가뿐 아니라 중동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이 비즈니스를 하는 데 있어 단순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신뢰 관계를 굉장히 중요시하는 중동 국가들의 종교·문화적 특성상 풍부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한 한국은 다른 나라와의 수주전에서 우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 사우디에 현대차 ‘중동 1호기지’가 세워지는 것도 의미 있어 보인다.

“과거부터 중동 시장에서 자동차는 진입장벽이 높았다. 뜨거운 날씨로 인해 품질관리가 쉽지 않고, 중동에서는 차를 소유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부호(富豪)인 만큼 럭셔리카·슈퍼카 특화 시장이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일부 글로벌 완성차 업체 정도만 겨우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최근에는 현대차가 세계 무대에서 상품성을 인정받으며 중동 내에서도 판매량을 끌어올리고 있다. 또 현대차는 전기차와 수소산업 분야에서 글로벌 선도 기업 이미지를 구축했기 때문에 사우디 입장에서도 전동화 전환과 수소 모빌리티 생태계 조성을 위해 현대차와의 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한국의 미래 신산업 분야의 경쟁력은 어느 정도로 보나.

“한국은 제조업은 물론이고 전기차, 수소, 2차전지, 친환경 에너지, 인프라, 방산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 규모가 비슷한 국가들과 비교해 단연 돋보이는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과거 구축해 둔 제조업 기반 없이 막대한 오일머니를 투입해 자국 내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중동은 중간 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첨단산업 분야로 넘어갈 가능성도 있다. 이때 자본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해외 기술과 노동력을 끌어들일 텐데 한국은 최적의 파트너다. 중동은 국제질서에서 다른 나라의 영향을 매우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미국이나 중국 등에 비해 한국에 대한 경계심이 낮은 것도 긍정적이다. 기술적으로 협업이 불가피한 분야에서는 미국, 중국 등과 협업하겠지만 큰 차이가 없다면 한국을 더 선호한다.”

―제2 중동붐이 가속화하면 대중동 교역 규모는 얼마나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나.

“대중 수출이 뚜렷하게 줄어드는 상황에서 우리는 대체 시장을 찾아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글로벌 경영 환경이 불투명한 여건 속에서 대표적인 소비 지역인 중동으로의 수출길이 열린 건 필사적으로 신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한국에 다행스러운 일이다. 특히 전통적으로 중동 국가들은 FTA를 맺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한국이 UAE와 FTA의 일종인 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CEPA) 협상을 최종 타결한 건 상당한 성과다. 정상회의 이후 실제 비즈니스를 일으키기 위한 정부 차원의 지원책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꼼꼼하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향후 대중동 수출을 지금보다 약 30% 늘리는 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 기업들이 중동과 MOU를 맺은 인프라·플랜트 사업에는 이후 많은 설비와 건설 기자재가 동원될 텐데, 국내에서 생산된 기자재 수출이 늘고 공장도 증설되면 중소·중견 기업은 물론 산업 전반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 중동과의 경제협력을 확대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전략이 있다면.

“사우디, UAE, 카타르 등과의 경제협력에서 여전히 주를 이루고 있는 인프라, 방산, 플랜트 등은 현지 정부의 규제와 입김이 엄청나게 작용하는 분야다. 이 분야에서 우리 기업들의 자체 노력에만 의존한 채 지원을 하지 않으면 사막의 외톨이 신세가 될 수 있다. 우리 정부와 중동 국가 간 외교적인 교류나 경제협력 대화 같은 것이 긴밀하게 이뤄져야만 한다. 그래야 현지 정부의 규제와 인허가 장벽을 극복하고 우리 기업들이 사업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다. 플랜트나 건설 사업같이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분야에는 관련법을 정비해 무역금융 규모 등을 늘려줄 필요도 있다.”

―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인한 교역 타격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나.

“가장 중요한 건 앞으로 전쟁의 양상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느냐인데 단기간에 끝날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한국무역협회에서도 전쟁이 국지전에 그칠 경우 내년 한국 국내총생산(GDP)이 0.03%포인트 감소하고, 향후 이스라엘과 이란이 직접 출동하면 0.29%포인트 감소하는 악영향을 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전쟁으로 인해 당장 유통망과 전산망이 흔들리고 소비재 수출에 악영향을 받는 등 무역 환경이 나빠진 건 사실이다. 국제유가 상승으로 인한 불확실성 확대 우려도 있다. 다만 상대적으로 국내 방산이나 기계류 수출 분야는 수출이 호조를 보일 가능성도 있다.”

“韓 수출 장려해왔지만 전략물자 관리엔 미숙… 무역안보 정책 강화 시급”

■ 기능강화 절실한 전략물자관리원

“달라진 수출통제 환경에 대응하고 경제안보를 강화하기 위해선 전략물자관리원에도 새로운 지원 기능을 부여해야 합니다.”

정인교 전략물자관리원 원장은 “최근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 전략물자 관리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만큼 전략물자관리원의 기능을 확대·개편하는 ‘대외무역법 개정안’ 처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현재 국회에는 전략물자관리원의 명칭을 ‘무역안보원’으로 변경하고 무역안보 전반의 정책 수립, 무역안보 영향 분석, 국제협력 등 정부에 대한 지원 기능을 추가하는 대외무역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정 원장은 “수출 중심 국가인 우리나라는 과거부터 수출을 장려해 왔지만 반대로 전략물자를 관리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며 “최근 전 세계적으로 공급망 관리, 수출통제, 기술 패권 대응 등 경제안보 이슈를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국제무역 질서가 형성되고 있는 만큼 우리도 이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통상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에서 상업용 물품·기술이 군사용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발생해 전통적인 국제수출통제체제에서 합의한 전략물자 이외의 품목·기술에 대해서도 관리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며 “안전 무역과 세계 수준의 수출통제제도 이행을 기반으로 하는 무역안보 없이는 국제무역·공급망 관리·기술 협력이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정 원장은 “전략물자 관리는 수출을 못 하게 하는 게 아니라 안전 거래를 통해 우리 기업이 받을 예상치 못한 피해를 사전에 막는 것”이라며 “기업들도 수출통제제도를 준수하지 않고는 존립이 어렵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61년 경남 진주 출생 △진주고·한양대 경제학과 졸업 △미시간주립대 경제학 석사 및 박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FTA연구팀장 △동아시아 비전그룹(EAVG) 사무국장 △한국국제통상학회 회장 △한국협상학회 회장 △통상교섭민간자문위원회 위원장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인하대 부총장·국제통상학과 교수 △제6대 전략물자관리원 원장

이근홍 기자 lkh@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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