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8. 두타산·청옥산: 신계(神界)의 산을 오르던 날

장보영 2023. 11. 1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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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무릇 아름다움을 두 눈에 담는 것
털어버리다 의미 산스크리트어 ‘두따’ 음차
산행 초입 비현실적 경관 신계 방문 착각
능선 위 강풍·가파른 경사 천고지 산 위용
산악회 리본 의존 묵묵히 정상 도착 안도
작은 용기 얻어 3.5㎞ 거리 청옥산 등반
▲ 베틀바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베틀바위. 베틀바위는 베틀처럼 생겨 이름 붙었으며 천하비경 장자제에 비유된다.

올해도 두 달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껏 벌였던 일들을 차분히 정리하고 지난 나날을 돌아보기 좋은 때입니다. 다만 그러는 동안에도 주문처럼 쌓여 있는 일들로 허둥거리다 보면 어느새 저물녘이고 달력은 그렇게 마지막 장을 향해 치닫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태 단풍 구경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하루 사이 뚝뚝 떨어지는 기온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있으면 내일 당장 한파가 들이닥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남은 가을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동해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서원주역에서 정오경 묵호역으로 출발하는, 하루 단 한 대뿐인 KTX 안에서 저는 수해 전 겨울 어느 날 다녀온 동해 여행을 추억했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원주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떠나는 반나절의 제법 긴 여정이었습니다. 제천에서 영월, 정선을 지나 태백에 이르렀을 때는 하늘에서 흰 눈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열차 밖 세상은 무슨 영화처럼 환했습니다. 터널을 지날 때마다 깜빡깜빡 어두워지고 다시 환해지기를 몇 번 반복하니 어느새 바다가 나타났습니다. 눈은 어느덧 비로 둔갑해 차창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만추의 두타산.

오랜 시간 바다를 기다렸습니다. 바다를 보는 일은 여간해서 쉽게 일어나지 않기에 커다란 통창으로 동해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봤습니다. 묵호등대 아래 5평 남짓한 작은 카페였습니다. 비가 쉬지 않고 내리니 어딘가로 갈 수 없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이튿날은 화창했습니다. 밤사이 어디로 몰려갔는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묵호동 골목길을 걷다가 어제 바라본 바다 가까이 내려가 백사장을 걸었습니다. 과거의 아름다웠던 여행을 떠올리며 묵호역에 도착하니 오후 1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역 근처 국밥집에서 허기를 달래고 숙소에 들러 짐을 맡긴 뒤 추억의 장소부터 향했습니다. 다행히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바다도, 등대도, 그 아래 작은 카페도.

다만 이 일대에 전에 없던 스카이워크가 생겨 평일 대낮인데도 관광객으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조용한 어촌 마을의 정취가 조금은 옅어진 것 같아 내심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망망대해는 여전했고 이 앞에 설 때의 마음가짐도 매한가지라서 한참은 홀로 바다를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다시 날이 밝았을 때 비로소 무릉계곡으로 향했습니다. 무릉계곡은 동해시 삼화동에 있는 이름난 경승지입니다. 무릉반석에서 용추폭포까지 이어지는 약 4㎞의 계곡을 거슬러 거니노라면 ‘무릉도원이 여기로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쏟아지지요. 물론 그해 겨울 이곳을 찾았을 때도 감탄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계곡도 응당 얼어붙어 있었고 오후의 끝물이라 산그늘이 지고 있었으나 잎 다 떨어진 나목 사이로 올려다본 두타산성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해발 1353m의 두타산 정상.

2023년 11월 어느 아침, 그때 차마 오르지 못한 두타산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사방의 비현실적인 경관 때문인지 마치 인간계에서 신계로 넘어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옵니다. 두타산(頭陀山)은 불교와 연관이 있는 산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털어버리다’라는 뜻인 두따(dhuta)를 한자로 음차해 산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데요. 사람의 흔적이 뜸한 첩첩산중인 까닭에 승려들이 수행하며 불도를 닦기에 좋다는 의미에서 두타산이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2020년 가을부터 베틀바위 산성길이 개방된 까닭에 등산로 초입은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수백 년 동안 인간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으니 이러한 유난함도 어쩌면 마땅합니다.

사람은 무릇 도원경(桃源境), 아름다운 것을 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야 구태여 이 삶을 힘들게 살아갈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두 눈에 직접 담지 않고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무거운 두 다리를 이끌고 어딘가로 이동합니다.

산길에 들어선 지 1.5㎞쯤 지났을까요? 드센 계단을 치고 오르니 해발 550m 지점의 베틀바위 전망대에 이르고 드디어 기다렸던 베틀바위가 자태를 드러냅니다. 베틀바위는 영락없이 베틀을 닮았습니다. 옛날 선녀가 하늘나라 질서를 어기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가 이곳에서 비단 세 필을 짜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한국의 자연을 굳이 외국의 선경에 빗대어 묘사하는 것이 최선일까 싶지만 왜 이곳을 중국의 천하비경 장자제에 비유했는지 단번에 알 것 같습니다.

▲ 무릉계곡. 무릉반석에서 용추폭포까지 이어지는 약 4㎞에 이르는 경승지로 두타산과 청옥산의 비경을 감상할 수 있다.

베틀바위 전망대를 지나면 인적은 서서히 드물어집니다. 관광객과 등산객은 여기서부터 확연히 갈라집니다. 발치의 무릉계곡을 굽어보며 그사이 꽤 높이 올라왔음을 실감합니다. 반대편으로 보이는 기암괴석은 아마도 학소대일 것이라 짐작합니다. 두타산은 어디에 있을까요? 깊은 골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거칠 것 없는 능선 위로 강풍이 불어댑니다. 이리저리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 생각합니다. 괜히 두타산이 아니구나! 새삼 천고지 산의 위용을 느낍니다.

첫 번째 산성터를 지나며 잠시 안부(鞍部)로 내려서지만 건천을 끼고 산길은 재차 가팔라집니다. 오래도록 발길이 뜸해 희미해진 산길을 산악회 리본에 간신히 의지해 나아갑니다. 정상까지는 아직 4㎞. 산은 고요하다 못해 적요합니다. 괜히 불도를 닦기에 좋은 산이 아닙니다.

한참을 홀로 걷다가 깔딱고개를 지나 두 번째 산성터에 이를 무렵 하산하는 한 사내와 마주칩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봅니다. 하지만 듣지 못했는지 바쁘게 스쳐 지나갑니다. 제가 만난 것은 누구였을까요?

하염없이 이어지는 오르막에 걸음은 더디기만 하고 끝없는 적막강산 앞에 침묵은 낙엽처럼 쌓여갑니다. 지금이라도 왔던 길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은 계속됩니다. 정상을 앞두고 이렇게 확신이 없었던 적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고단하고 힘들어도 산은 그 자리에 있을 것이고 저는 그저 묵묵히 오르면 그만인 것이었지요. 그런데 이 산을 오르는 마음의 한가운데에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산보다 더 크고 높은 산을 오르기도 했고 더 멀리 있는 산을 오르기도 했는데 말입니다.

가까스로 두타산 정상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 무렵이었습니다. 너른 정상에는 해발 1353m를 알리는 커다란 정상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무리의 산악회 회원들이 보였을 때, 그제야 제 안에는 어떤 안도감이 들어왔습니다. 무릉도원도, 천하비경도 그제야 소용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무릇 아름다운 것을 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생각은 절반의 진실이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어쩌면 고작 외롭지 않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연 어떤 용기를 얻고서는 올라온 길로 서둘러 내려가려던 애초의 계획을 수정하고 해발 1404m의 청옥산(靑玉山)으로 넘어갑니다. 두타산에서 청옥산까지는 3.5㎞. 청옥산을 오른 뒤 다시 무릉계곡으로 내려서면 그야말로 완벽한 이상향의 완성일 것입니다. 속없이 웃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신발 끈을 조이며 다시 눈앞의 산으로 들어갑니다. 물론 금세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다시 올라올 일은 당분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태껏 지나온 모든 길이 벌써 한바탕 꿈만 같습니다. 작가·에디터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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