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세 최고령 수능생의 꿈 “여보♡ 대학 등록금 준비해”

이가영 기자 2023. 11. 16.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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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와 영어 대화하려 영문과 진학이 목표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최고령 수험생 김정자 할머니가 16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여자고등학교에서 일성여중고 학우들의 응원을 받으며 시험장으로 입실하고 있다. /연합뉴스

“엄마도 대학 간다.” “여보♡ 등록금 준비해.”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16일 서울 마포구 서울여자고등학교 앞에는 독특한 응원 문구를 든 이들이 자리했다. 40~80대 만학도들이 다니는 일성여중‧고 수험생들을 응원하는 후배들이었다. 이번 수능의 최고령 응시생도 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 김정자(82) 할머니가 그 주인공이다.

김 할머니가 처음 ‘학생’이라는 신분을 갖게 된 건 2018년, 그의 나이 77살 때의 일이다. 정규 교육 기회를 놓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인 문해학교인 양원주부학교에 입학하면서 만학도의 꿈을 펼치게 됐다. 김 할머니의 사연은 2019년 tvN ‘유퀴즈 온더 블록’을 통해서도 소개됐다.

◇공부는 꿈도 꾸지 못했던 어린 시절

1941년생인 김 할머니는 일본에서 8남매의 맏딸로 태어났다. 광복 이후 지금의 경남 마산 지역으로 이사 왔는데, 출생 신고를 제때 하지 않아 호적에는 1943년생으로 올라갔다. 이후 6‧25전쟁이 터지면서 거제도로 피난을 떠나 해초를 뜯어 먹으며 지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에 돌아와 반가운 마음도 잠시, 살던 집도 불타버린 그곳엔 가난만이 김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여성들은 공부를 가르치지 않던 시절, 김 할머니는 학교에 가는 건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상경한 김 할머니는 부엌도 없이 아궁이만 하나 있는 작은 방에서 삼남매를 키웠다. 그마저도 남편이 보증을 잘못 서면서 다섯 식구가 거리에 나앉게 됐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그때부터 안 해본 일 없이 돈 되는 일은 다 했다. 손톱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일했다”고 했다. 낮에는 살림하고 밤에는 목욕탕 청소, 도시락 공장 등을 다니며 일한 탓에 허리 수술을 세 번이나 했다고 한다.

◇”무식한 엄마인 것 같아서, 엄청 울었어”

2019년 tvN '유퀴즈 온더 블록'에 출연했을 당시 김정자 할머니. /tvN

김 할머니에게 자녀는 자랑스러운 존재이자, 한편으로는 미안함의 대상이다. 김 할머니는 “내가 못 배웠기 때문에 우리 삼남매는 잘 가르쳤다”고 했다. 이화여대 음대를 졸업한 첫째 딸은 현재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김 할머니는 “딸이 다니던 대학을 찾아간 적이 있다”며 “‘돈도 없고, 백도 없는데 우째 니가 이 학교에 왔을까’ 싶어서 학교를 쳐다보고 울었다”고 했다. 이어 “레슨비가 없어서 그만두고, 하다가 그만두고. 친구들한테 얼마나 기가 죽었을까 생각이 든다”며 “그때 생각하면 진짜 눈물 난다”고 했다.

김 할머니가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계기도 딸이었다. 첫째 딸이 미국으로 출국하던 날, 공항에서 김 할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는 “한글도 모르는데 영어를 어떻게 아느냐”며 “어느 곳으로 가는지를 모르니까. 내가 이리 무식해서 딸 가는 출구도 모르는구나 싶었다”고 했다.

◇”공부만 생각하는 지금, 꿈만 같아”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둔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일성여자중고등학교에서 올해 최고령 수능 응시생 김정자 할머니가 교장 선생님에게 합격 기원 떡을 받고 있다. /뉴스1

배우지 못한 한을 풀지 못한 채 나이를 먹던 2017년 결정적인 계기가 생겼다. 허리가 아파서 병원을 들렀다 오는 길에 우연히 전철에서 주부들의 학교를 홍보하는 부채를 주운 것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김 할머니는 용기를 내 학교의 문턱을 넘었고, 2018년 3월 양원주부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한글부터 배운 김 할머니는 지각과 결석, 조퇴 한번 없이 수업을 들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지 2년 차에 한자능력검정시험 7급까지 땄다. 김 할머니는 “이제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공부만 생각하고 있다”며 “내 인생을 살아온 거 생각해보면 꿈만 같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양원주부학교 졸업 후 일성여중‧고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이제는 영문학과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말을 잘 모르는 손주들과 영어로 대화하기 위해서다.

수험장 앞에서 김 할머니는 “젊은 학생들 각자 3년 동안 배운 실력을 잘 보여줬으면 좋겠다”며 “인생을 건 날인데, 모두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고 우리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새 일꾼이 되면 좋겠다”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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