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픽처] 스코세이지가 왜 카메라 앞에?…아메리칸 드림 허상 깬 '플라워 킬링 문'

김지혜 2023. 11. 14.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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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연예뉴스 | 김지혜 기자]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을 보며 옛날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주연을 맡았던 '파 앤드 어웨이'(1992)다. 1800년대 후반 미국 오클라호마의 랜드 러시를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두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성장을 다룬 청춘물이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조셉(톰 크루즈)이 드넓은 평야에 깃발을 꽂기 위해 말을 타고 내달리는 장면이었다.

'깃발만 꽂으면 내 땅이 된다고?'

어린 시절 주말의 명화로 이 영화를 보며 가진 건 몸뚱이 하나인 이민자의 아메리칸드림이 실현되는 순간을 목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그땐 카메라가 스치듯 잡았던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싸늘한 표정을 간과했다.

할리우드의 얼마나 많은 영화들이 아메리칸 개척 시대를 자의적이고 편의적으로 다뤘는가. 그 땅의 주인이었던 원주민은 사실상 블러처리되거나 흥미의 대상 혹은 개도의 대상으로 묘사될 뿐이었다.

그로부터 약 20년 후가 배경인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은 백인에 의한 아메리칸 원주민 침탈의 역사를 다룬다. 스코세이지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를, 스코세이지만의 방식으로 그린 대서사시다.

◆ 이 이야기는 실화다

'플라워 킬링 문'은 미국 작가 데이비드 그랜의 논픽션 소설 '플라워 문: 거대한 부패와 비열한 폭력, 그리고 FBI의 탄생'을 원작으로 한다.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소설은 오세이지족 연쇄 살인 사건이 한 축이고, FBI의 태동이 다른 한 축이다.

이 소설의 영화화를 결정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 각본가 에릭 로스와 각본을 개발하면서 FBI 수사관 톰 화이트가 주인공인 이야기에 의문을 느끼기 시작했다.

디카프리오는 스코세이지에게 "이 이야기에 핵심이 어디에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졌고, 나머지 두 사람 역시 이 의문에 동의를 하면서 오세이지족 사건과 더불어 몰리와 어니스트의 로맨스를 부각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돌아온 어니스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지역 유지인 삼촌 윌리엄(로버트 드니로)을 찾아간다. 삼촌이 사는 곳은 오클라호마주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 정책으로 쫓겨난 오세이지족 사람들이 터를 잡은 곳이다. 오세이지족은 자신들의 자금으로 이 보호 구역을 매입했다. 이 땅에서 1890년대부터 석유가 나오며 그들은 떼부자가 된다. 오일 머니가 넘쳐흐르는 그곳으로 백인들이 몰리고 그 지역의 유전 소유권을 비롯한 오세이지족의 부를 빼앗기 위한 검은 음모들이 판을 치기 시작한다.

어니스트는 삼촌의 도움을 받아 택시 기사로 일하게 된다. 어느 날 원주민 몰리(릴리 글래드스톤)를 태우게 되고 고고하고 기품 있는 모습에 반하고 만다. 삼촌은 몰리가 동네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라며 결혼할 것을 부추긴다. 헤일은 백인이 원주민과 결혼할 경우, 상속을 통해 배우자의 석유 로열티를 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니스트는 몰리와 결혼하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는 와중에 몰리의 언니를 비롯해, 동생이 잇따라 사망하는 사건이 발견한다. 오랜 기간 지지부진했던 수사는 몰리가 직접 워싱턴 D.C에 가서 수사를 요청하고, FBI가 동네에 파견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오세이지족들은 5월을 꽃이 풍성한 풍요의 계절이라는 의미에서 '더 플라워 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5월에는 큰 키의 꽃들이 만발하여 작은 꽃들의 성장을 방해하고 죽게 만드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이는 백인들에 의해 핍박받고 희생되는 아메리칸 원주민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 '플라워 킬링 문'이 주제 의식을 다루는 법…오세이지의 시선으로

실화 기반의 이야기를 다룰 때 감독은 사건의 훌륭한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특히 비극의 역사를 다룰 때는 객관적이되 사려 깊은 전달자가 되면 더할 나위 없다.

스코세이지는 '플라워 킬링 문'을 백인의 관점이 아닌 원주민의 시선에서 그리고자 노력했다.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했으며, 오세이지족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영화 속 오세이지족 역할의 배우도 대부분 아메리칸 원주민이거나 그들의 후예에게 맡겼다.

영화는 오세이지족의 장례식 장면으로 이야기를 열고 닫는다. 슬픔과 비애가 감도는 것은 물론이고 영험한 기운까지 느껴지는 이 장면들은 오세이지족의 문화를 체험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들의 애도 문화를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재현하며 영화가 할 수 있는 위령제를 올려준 셈이다.

스코세이지는 에픽(대서사시) 무비의 거장이다. 서사를 풀어내는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과 신과 신을 배치하고 연결하는 감각은 장인의 경지에 올라있다.

누군가는 3시간 26분에 이르는 이 장중한 드라마가 지루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이 서사에는 불필요한 장면이 거의 없다. 탐욕과 위선으로 점철된 백인의 만행을 알리고자 하는 이 이야기에서 사건의 앞뒤 전후를 쌓아 올리는 연출은 반드시 필요한 방식이었다.

외부인인 어니스트가 오세이지족의 세계에 들어가며 사건이 본격화 되는 것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은 백인의 시선에서 그리는 수탈의 역사가 아닐까 싶지만 그렇지 않다. 스코세이지는 어니스트의 딜레마를 세밀하게 다루지만, 동정의 시선은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몰리를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말하지만, 그조차도 그 사랑의 본질을 명확히 모른다. 시종일관 우매하다. 그리고 내면의 바닥에는 돈에 대한 욕망이 이글거린다. 야만의 시대에 동조자와 방관자는 결국 나쁜 사람일 뿐이다.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몰리다. 역시 실존 인물에 기반한 몰리는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고 오세이지족 사람들 60여 명이 이유도 없이 죽어나가는 것을 방관하지 않고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움직인다. 실제 아메리카 원주민의 후예인 릴리 글래드스톤의 위엄 있는 연기는 영화의 비극을 강화하고, 관객을 분노로 들끓게 만든다.

◆ 스코세이지의 등장... 미국에 가하는 일침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의 후반부, 감독인 마틴 스코세이지가 카메라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다. 그는 오세이지족 살인 사건을 다룬 '보드빌'(vaudeville: 1890년대 중반부터 1930년대 초까지 미국에서 유행했던 버라이어티쇼의 일종. 노래·춤·촌극 등을 엮어 구성) 말미에 등장해 몰리 버크하트(릴리 글래드스톤)의 부고를 읽는다. 그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범죄에 대한 언급은 없었습니다"

실제로 1930년대 초 미국에서 'The Lucky Strike Hour'라는 라디오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로 오세이지족 사건을 다룬 바 있다. 미국 연방수사국 FBI의 초대 국장인 존 에드거 후버가 직접 출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시퀀스는 영화의 앞선 흐름과 비교하면 어딘가 이상하다. 3시간 넘게 극화 형식으로 펼쳐지던 이야기가 극중극 형식으로 전환되는 구성인 데다가 감독이 카메오가 돼 카메라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갑작스레 느껴진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자신이 연출한 영화에 여러 차례 얼굴을 내민 바 있다. 대부분의 출연이 이벤트성에 가까웠다면 '플라워 킬링 문'의 출연에는 명백한 의도가 있다. 이 아이디어는 캐스팅 디렉터인 엘렌 루이스가 냈다고 알려졌다.

스코세이지는 앞서 무대 연기를 펼친 배우들을 객석에 앉히고 마이크 앞에 서서 담담히 몰리의 부고를 읽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배우는 "눈물이 났다. 영화를 보지 않고도 이 프로젝트 전체에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폭력에 대한 진정한 분노와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깊이가 있었다"고 상황을 전했다.

스코세이지는 몰리의 부고엔 그녀와 그녀의 삶을 파괴한 야만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고 꼬집는다. 감독의 의도가 대놓고 영화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윌리엄으로 대표되는 백인의 탐욕과 위선, 몰리로 대표되는 오세이지족의 위엄과 기품이 대비되는 '플라워 킬링 문'만의 근사한 마무리였다.

스코세이지는 이탈리아 이민자의 2세로 뉴욕의 퀸스 일대에서 태어났다. 그는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성난 황소', '갱스 오브 뉴욕', '좋은 친구들',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미국 사회의 치부와 부조리를 파헤치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왔다.

실화 기반의 경우,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하되 냉철한 시선을 시종일관 유지한다. 역사의 진실 아래 보는 이들은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기회의 땅', '아메리칸 드림'의 대명사였던 미국이라는 나라의 허상을 까발리는 이 영화는 거장의 손길로 명작이 됐다.

'플라워 킬링 문'은 제작비 2억 달러(한화 약 2,627억 원)가 투입된 대작이다. 메이저 스튜디오들은 시네마 거장의 철학과 비전에 거액을 투자할 마음을 접은 지 오래다. 스코세이지는 이 작품을 파라마운트와 논의했으나, 파라마운트는 막대한 제작비에 부담을 느꼈다.

결국 스코세이지는 '아이리시맨'(넷플릭스)에 이어 또 한 번 OTT 플랫폼과 손을 잡았다. 이번에는 애플 TV+였다. 내년 아카데미를 노리는 애플 TV+는 '플라워 킬링 문'의 극장 개봉을 추진하며 오스카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세상에 꼭 봐야만 하는 영화는 없다. 그러나 '시네마의 가치'가 희미해지고 있는 시대에 '진짜 시네마'가 주는 재미와 감동을 느끼고 싶다면 '플라워 킬링 문'을 놓쳐서는 안 된다.

ebada@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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