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수많은 후손들이 부역혐의로 희생당했다 [본헌터㊴]

고경태 기자 2023. 11. 13.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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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논픽션 : 본헌터㊴] 충무공 종손 응렬
내몸에 흐르는 독립운동가의 피, 역사의 톱날에 찍힌 문중 사람들
일제 경찰이 만든 응렬의 수형기록 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전자도서관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내 이름은 응렬이다.

가문의 영광을 간직해온 응렬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나의 선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덕수 이씨, 그중에서도 충무공파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의 수군을 이끌며 수차례 왜군을 격파했던 충무공 순신의 14대 종손이 바로 나다.

서울에서 태어난 순신은 12살을 전후하여 어머니의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이사해 성장했다. 그 뒤 많은 후손들이 아산에 퍼져 터전을 잡고 400년 넘게 살아왔다. 나의 고향 역시 아산이다. 염치읍(옛 염치면) 백암리를 아시는가. 충무공의 사당인 현충사가 있는 곳이다. 현충사는 나의 집이었다.

한국전쟁기에 현충사에 은거하던 내가 옛 본전에서 체포된 일은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아산을 점령한 인민군이 물러간 직후인 1950년 10월경이었다. 태극동맹 단원들이 몰려와 나를 끌고갔다. 우익 반공청년단체였던 태극동맹은 수복 뒤 잔인한 학살의 실행자이자 조력자 역할을 했다. 태극동맹 단원들은 나를 죽이려고 끌고 갔을 것이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2020년 아산의 마을 곳곳을 돌며 70년 전 일을 조사하던 이들은 내 이름을 접했다. “응렬은 아산 적색분자의 우두머리”라고 증언한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아산의 도수자’였다고 말한 이도 있었다. 도수자란 무엇인가. ‘수괴’를 뜻하는 옛날 말이다.

일제 경찰이 만든 응렬의 수형기록 카드. 국사편찬위원회 전자도서관

내가 서울의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좌익 활동을 한 건 사실이다. 좌익 전향자들로 구성된 반공단체 국민보도연맹에 이름을 올린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적색분자의 우두머리 또는 도수자라는 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와 관련한 증언을 한 사람들은 혹시 수복 뒤 부역혐의자들을 지목하고 학살하는데 앞장선 자들은 아닌가? 그들은 내가 우두머리였다는 구체적인 근거나 목격한 상황을 대지는 못했다. 조사를 하던 이들도 결국 내 소속과 직위를 밝히지 못했다.

나는 살았다. 놈들은 감히 나를 죽이지 못했다. 대통령 승만이 “충무공의 종손이니 살려둬야 한다”고 배려했다는데 진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같은 문중으로서 대한국민당 국회의원이자 목사였던 규갑(1887~1970)이 나의 구명을 위해 도움을 주었다. 규갑은 전쟁 기간에 탕정면 명암리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내 주변에 있던 문중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었다. 수복된 뒤 한 달 동안 도피생활을 하다가 나와 함께 현충사에 숨어있던 매형 정덕이 잡혀가 처형당했다. 경기고보를 졸업한 정덕은 인민군 점령기에 염치면 송곡국민학교 교사로 일했다. 사촌 명렬은 염치면 분주소장으로 활동했다는 혐의로 처형당었다. 신창면 실옥리에 살던 명렬의 여동생 애기와 육촌 O렬, 숙부 민O도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 조카 재만과 그의 오촌당숙, 칠촌 재당숙 등 6명도 같은 날 함께 희생되었다. 대동리 황골 새지기의 우영 가족은 막내 종률만 제외하고 멸족을 당했다.

또 있다. 온양읍 좌부리에 살던 무영과 탕정면 용두리1구에 살던 장승, 음봉면 신수리에 살던 한영도 죽임을 당했다. 예외없이 나와 같은 가문의 사람들이다. 셋은 인민군 점령기에 한 자리씩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무영은 일본에 유학해 반일 민족운동을 한 적 있다. 장승은 조선후기 국왕의 호위 군대인 시위대 군인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1907년 순국한 준영의 손자였다.

조선사편수회 나카무라 히데타카(왼쪽서 다섯번째) 일행이 충남 아산지방 사료조사 당시 충무공 종손가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줄의 아이가 응렬, 그 왼쪽이 응렬의 아버지 종옥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충무공의 후손들에겐 독립운동의 피가 흘렀다. 13대 종손인 아버지 종옥(1887~1941)은 항일무장투쟁의 본거지인 만주의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을 양성하던 곳으로, 12대 손이자 나의 할아버지뻘인 세영(1869~1938)이 교장을 지냈다.

나 역시 광복 직전 일제의 식민정책을 비판하다 옥고를 치렀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조선 최고의 매출을 기록하던 누룩회사인 조선곡자주식회사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때였다. 1941년 7월 하숙집에서 동료 하숙인들에게 조선 독립을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1942년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돼 용산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5월8일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943년 2월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2년, 집행유예 3년 판결을 받았다.

나는 경찰 조사과정에서 말했다. “부친 종옥이 평소 들려주던 이야기를 전달한 것뿐”이라고. 종옥은 1941년 세상을 떠나 경찰이 처벌할 수 없었다. 문중에서 내가 영향받은 사람은 또 있었다. 해방 직후에 월북한 소설가 기영(1895-1984)이다. 충무공 9대손 민창의 장남으로 아산 배방면 회룡리에서 태어나 1922년 일본의 도쿄세이소쿠영어학교에서 수학한 인물이다. 1924년 잡지 ‘개벽’ 문예현상공모에 ‘오빠의 비밀편지’가 당선하면서 등단했는데, 귀국 직후인 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가담했고 곧 조직의 핵심이 되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선전했다는 이유로 해방되기 전 대구고법에서 재판을 받기도 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소설가 기영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의 아버지 영향은 없었을까. 나의 아버지 역시 ‘주의, 사상’이 문제 되어 일제 경찰로부터 2~3회 끌려간 사실이 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상당수는 좌익이었다. 내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독립운동의 노선도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 이것은 가문의 비극을 잉태했다. 수많은 덕수 이씨 충무공파 사람들이 문중의 리더였던 종옥과 기영, 그리고 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을 것이다. 해방 뒤 종손인 내가 지지하는 정치세력을 함께 지지해주는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날카로운 톱날이 당장 어디로 튕겨 나갈지 예측할 수 없었다. 수많은 문중 사람들은 그 톱날에 무력하게 찍히고 찢겨졌다.

조선사편수회 나카무라 히데타카가 충청남도 아산지방 사료조사 당시 응렬과 함께 가묘(家廟) 앞에서 찍은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전쟁 이후 나는 고향 근처인 영인면 아산리에서 아산정미소를 운영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1961년 5월 쿠데타를 일으켰던 군인들은 국시를 반공으로 삼았지만,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다. 오히려 우리 문중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67년 1월6일, 충무공의 생일인 4월28일은 탄신기념일로 제정됐다. 3월18일엔 아산 현충사가 사적 155호로 지정됐다. 이듬해인 1968년 4월27일엔 서울 종로구 세종로 광화문 광장에 충무공 동상이 세워졌다. 같은 무관 출신으로서 대통령 정희는 충무공처럼 추앙받고 싶었다. 충무공은 성역화되고 성웅화됐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적극 협조했다.

대통령 정희는 나에게 아산시장 자리를 제안했다. 주변에서는 국회의원에 나가보라는 권유를 했다. 나는 거절했다. 사람들은 “내가 좌익경력이 드러날까봐 그냥 조용히 살았다”고 쑥덕거렸다. 글쎄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종손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는 선친의 가르침을 따랐다면 이해해줄까. “문중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며 살기로 했다”면 납득해줄까. 어느날 아들 재국과 결혼한 며느리가 나에게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북한도 싫다고 했다. 이론과 현실은 다르다.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북한 사회주의는 다르다.

나는 1993년 1월17일 서울대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칠순이 되던 1984년부터 심한 천식을 얻어 거동할 수 없었다. 내 인생의 마지막 10년은 기나긴 투병의 나날이었다. 79세였다. 이제 나는 무엇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남았는가. 독립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 부역혐의자?

20년이 넘게 흐른 뒤 새삼 내가 조명되었다. 2016년 6월, 한 언론이 고맙게도 아버지 종옥과 나의 독립운동 증거들을 수집했다. 그들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만든 ‘국외 용의 조선인 명부’를 발굴해 “종옥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할 목적으로 만주에 건너갔다”고 밝혀주었다. 나에 대한 일본 경찰의 조서기록도 찾아냈다. 덕분에 2016년 상춘이 처장으로 있던 보훈처는 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11월17일 제77회 순국선열의 날에, 후손들이 나 대신 받은 선물이었다.

좋다.

대한민국이여, 충무공의 14대 종손인 나를 독립유공자로 기억해다오. 동시에….

한국전쟁 중 재판 없이 끌려가 불법 처형된 아산의 수많은 우리 문중 사람들도 기억해다오.

<다음 회에 계속>

※ 이 글은 아산 민간인학살 전수조사 보고서(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 2020년)와 아산 부역혐의 희생사건 조사보고서(1기 진실화해위, 2009년), ’충무공 종부가 증언하는 항일 역사’ 제하의 보도기사(월간조선 2016년 6월호) 및 국사편찬위원회, 보훈처의 관련 자료 등을 참고해 1인칭 시점으로 쓴 것임을 밝힙니다.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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