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이 왜 거기서"…伊 와이너리에 피어오른 예술꽃

전형민 기자(bromin@mk.co.kr) 2023. 11. 12.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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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중부 '키안티 클라시코' 와이너리
카스텔로 디 아마 와이너리의 접객실. 방문객은 언덕 꼭대기 끝에 유리로 만든 건물에서 와인을 즐기며 포도밭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전형민 기자·키안티클라시코와인협회 제공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좋은 와인을 접할 때면 훌륭한 예술 작품과 같은 감흥을 준다. 예컨대 묵직한 보르도 좌안 그랑크뤼 레드 와인을 마실 때면 장엄한 베토벤의 교향곡이, 섬세하고 우아한 부르고뉴 피노누아를 마실 때면 쇼팽의 녹턴이 떠오르는 식이다. 유명 클래식 음악과 와인의 비교는 와인을 소재로 한 만화, '신의 물방울' 주인공의 표현법이기도 하다.

실제로 와인 양조자들은 자신의 와인에 예술을 덧씌우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산업화 이전까지 단순히 '우리가 생산했다'는 일종의 증표에 불과했던 와인 라벨에 예술 작품을 그려넣는 시도다. 보르도 5대 샤토 중 하나로 잘 알려진 샤토 무통 로트칠드(Ch. Mouton-Rothschild)가 1945년부터 매년 자신들의 라벨을 세계적 거장들과의 협업으로 만들고 있다.

어떤 양조자들은 여기서 한술 더 떠서, 아예 와이너리에 예술을 접목하기도 한다. 역사가 오래된 곳은 800년에 이르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의 와인 산지,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 지역 와이너리들도 예외는 아니다. 맛과 향은 물론, 멋까지 느낄 수 있는 와이너리를 소개한다.

미술관인가 와이너리인가, 카스텔로 디 아마

유럽의 많은 와이너리가 수백 년 된 유산을 이어 내려왔기 때문에 와이너리에서 역사 유물을 보는 것은 그렇게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현대 미술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카스텔로 디 아마는 수백 년 전통에 현대미술을 접목했다. 이는 오너이자 와인메이커인 마르코 팔란티의 철학에서 비롯됐다. 마르코는 "와인도 하나의 예술"이라며 "와인을 양조하는 나 역시 예술가"라고 소개한다.

와이너리를 방문하면 가장 먼저 만나는 접객실부터 범상치 않다. 유리로 사방에 벽을 세워 만든 유리의 집이다. 언덕과 언덕 사이 계곡을 끼고 조성된 포도밭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도록 언덕 꼭대기에 만들어진 접객실은 그 자체로 관광 명소다. 방문객들은 이곳에서 시간이 멈춘 듯 아름다운 포도밭 풍광을 감상하며 와인을 즐길 수 있다.

와이너리 투어를 통해 가장 먼저 접한 작품은 와인이 숙성 중인 어두컴컴한 셀러 천장에 달려 있었다. 중국 국적 유리공예 작가 첸젠의 작품으로, 인간의 모든 장기를 하나하나 표현했다. 프랑스의 거장, 다니엘 뷔렌이 대형 거울을 활용해 야외정원에 설치한 작품도 인상적이다.

구름을 재는 남자. 얀 파브르 작품. 전형민 기자·키안티클라시코와인협회 제공

와이너리에서 보고 느낀대로 작품 남겨

사진작가 스기모토 히로시가 채플에 설치한 작품도 눈길을 끈다. 외부와 연결된 유일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작품이 가리면서 만들어낸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는 햇빛을 따라 변화한다.

우리나라 작가의 작품도 있다. 와인 애호가로도 잘 알려진 이우환 화백은 이제는 쓰지 않는 와이너리의 지하 셀러를 보자마자 그곳에 작품을 남기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는 셀러 바닥에 화이트부터 레드까지 와인이 가질 수 있는 색을 하나의 작품으로 오묘하게 풀어냈다. 이 밖에 아니시 카푸어, 루이스 부르주아 등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만으로도 감탄할 만한 세계 정상급 작가들이 매년 작은 마을급인 와이너리에 초청돼 구석구석을 자유롭게 탐방하고 작품을 남겼다.

이렇게 설치된 거장들의 작품은 어느새 20여 점에 이른다.

구름을 재려는 어리석은 자여

"어리석은 인간이여. 어찌 감히 하늘의 크기를 재단하려 하는가. 사람은 한없이 작고 나약한 존재인 것을."

같은 지역 콜레 베레토 와이너리에서는 벨기에 국적 거장 얀 파브르의 작품, '구름을 재는 남자'를 만날 수 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커다란 뭉게구름을 향해 팔 벌린 채 자를 들고 서 있는 남자의 동상이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믿는 인간을 비꼬는 뜻을 가지고 있다. 땅과 날씨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하늘의 영역이라는 대전제를 실감케 한다.

와이너리 매니저인 베르나르도 비앙키는 "2015년엔 좋은 포도가 많이 수확돼 질 좋은 와인을 생산할 수 있었다"면서도 "모두 하늘이 한 것이지, 우리가 한 건 없다"고 말한다. 주어진 환경에서 겸손하게 최선을 다하고, 도도한 자연의 흐름 앞에서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농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키안티 클라시코의 전형적인 전원 풍경. 산과 산 사이 골로 포도밭이 넓게 퍼져 있다. 전형민 기자·키안티클라시코와인협회 제공

묘하게 닮은 와인과 예술

와인과 예술은 닮았다. 와인 메이킹은 테루아르라는 통제할 수 없는 변수 속에서 포도나무의 생장과 과실 수확이라는 밑그림을 그려내고, 철학이 담긴 양조를 통해 양조자의 색깔을 입히는 작업이다.

생산 과정뿐만 아니라 그 작품을 느끼고 향유하는 것도 비슷하다. 그 오묘한 매력에 한 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어려운 것도 마찬가지다.

예술은 점수를 매기거나 누군가를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는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도 다른 이에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오듯, 와인 역시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다. 이번 휴가는 예술 작품과 아름다운 포도밭 풍경, 와인이 함께하는 키안티 클라시코로 그 감동을 직접 느끼러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이우환 화백과 이를 지켜보는 카스텔로 디 아마의 오너, 마르코 팔란디. 전형민 기자·키안티클라시코와인협회 제공

▷키안티 클라시코는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와 시에나 사이에 남북 47㎞, 동서로 27㎞ 뻗은 지역의 이름이자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이름이다. 800여 년 전부터 특징적인 와인을 생산했고, 뛰어난 품질 덕분에 교황 등 당대 권력자가 즐겨마셨다.

봄에는 포도나무에서 올라오는 새 잎과 풀숲 사이에 만개한 야생화를, 여름에는 숲의 싱그러움과 너른 들판의 풍요로움을, 가을에는 포도 수확을 실제로 보거나 체험할 수 있다. 겨울에 간다면 눈 덮인 포도밭에서 망중한을 즐기거나, 크리스마스 정취가 가득한 피렌체와 시에나를 즐길 수 있다.

▷키안티 클라시코에 가려면

차로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도시인 피렌체에 공항이 있지만 인천공항과의 직항 노선은 없다.

인천공항에서 로마나 밀라노를 경유해 피렌체 공항으로 이동하는 방법과 로마 혹은 밀라노에서 차량 혹은 기차를 통해 이동하는 방법이 있다. 이동 소요시간은 기차 2시간 이내, 차량 3~4시간이다. 클라시코와인협회(Consorzio Vino Chianti Classico) 홈페이지에서 와이너리들을 소개한다.

[전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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