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시력 잃었지만 외롭지 않음은 내 맘속에 노래가 있기에"
만남을 사전 조율했지만, 그들을 만난 것은 어쩌면 행운이었다. 지난 9일 오전에 단원 스무명이 전부 시각장애인인 '물빛소리 합창단' 연습실을 찾았다. 왁자지껄했다. 이날 인터뷰를 하고 사진도 찍는다고 단원들은 얼굴에 반짝이는 화장품을 바르고 정장을 꺼내 입고 왔다. 단원들은 한껏 들뜬 듯 보였다. 누군가 진하게 화장했다는 얘기를 듣고 "언니는 발라야 빛나는구나, 우린 자체 발광인데" 농담도 했다. 단원들은 수십년 알고 지낸 지기들처럼 보였다. 합창단은 내달로 만 1년을 채운다.
연습실에는 악보 한장 없었다. 어차피 단원들은 악보를 볼 수가 없다. 그들은 3~4분 남짓한 곡의 음정과 박자를 전부 외워서 연습한다. 지휘자는 새 곡을 배울 때 소프라노와 알토, 테너, 베이스 파트별로 음을 직접 녹음해 미리 단원들에게 전송해준다. 이날은 10분쯤 발성 연습을 했고, 영국인 작곡가 존 러터의 노래 '음악은 항상 너의 곁에'를 불렀다. 피아노 전주가 감미로웠다. 하지만 "계절은 시시때때로 변하고"를 부르는 여성 단원들 목소리가 더 감미로웠다. 존 러터가 이들을 위해 이 노래를 작곡했나 싶을 정도였다. 이어 "모든 추억은 지나가 버리고"를 부른 남성들 저음은 여느 이탈리아 성악가 뺨쳤다.
노래는 클라이막스로 향했다. "좋은 시간은 마술처럼 보이네, 네 삶 속의 노래처럼"에서 남성과 여성의 화음이 어우러질 때 황홀경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단원들은 음악에 심취한 듯 보였다. 박자에 맞춰 몸을 흐느적거렸고 미소 지었다. 그들의 표정을 보노라면 가슴 깊숙한 데서 뜨거운 무언가 자꾸 올라와 울컥했다. 혼자 듣기 아쉬운 노래였다. 한 곡 더 들었다면 울었을지 모른다. 합창단은 최근에 열린 서울 장애인 합창대회에서 1등을 했고, 오는 16일에는 전국 대회에 나간다.
그들이 부른 노랫말 중에는 "음악 속 사랑의 힘은 당신을 절대 떠나지 않아"란 부분이 있다. 단원 염경례씨(50)는 30대에 시력을 잃었다. 양쪽 눈이 아예 보이지 않는다. 그는 원래 어린이집 교사였다. 양쪽 눈 시력이 1.5였다. 하지만 시력이 쭉쭉 떨어져 병원에 가니 망막색소변성증이고, 현대 의학으로 치료법이 없다고 했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건강해지겠지', '나아지겠지' 생각했다.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으로 사는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합창단은 그런 염씨가 이전과 같은 활기, 에너지를 되찾는 가장 큰 계기였다. 염씨는 "매일 아침 눈을 떠 갈 곳이 있다는 것, 와서 동료 단원들과 얘기 나눌 때의 정서적인 충족, 노래가 주는 기쁨, 단원이자 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효능감을 느낀다"고 했다.
노랫말 중에는 "노래가 끝나도 외롭지 않음은 내 맘속에 노래가 있기에"란 부분도 있다. 장현필씨(38)는 지난 3월부터 지팡이를 짚기 시작했다. 시력을 잃은 것은 초등학생 때였지만 장애인처럼 보이기 싫었다. 버스나 지하철에 타면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팔짱을 끼고 섰다.
노래는 장씨가 장애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했다. 그는 "아무것도 못할 거란 편견이 사라지고 삶의 자신감, 뻗어나갈 미래성을 찾아 사회복지 시설에서 교육도 받고 활동을 넓힐 수 있게 됐다"며 "노래를 시작하고 삶이 많이 변했다"고 했다.
물빛소리 합창단은 코웨이가 운영한다. 단원들을 아예 직원으로 채용했다. 평일 오전에 출근해 합창하는 게 단원들의 직무다. 시각장애인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이 너무 적어 그들을 위한 일자리 모델을 발굴해야겠다는 판단으로 합창단을 시작했다고 한다.
단원 최소현씨(25)는 취업을 준비할 때 주변 어른들이 암묵적으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안마사나 전화 상담원을 권했다고 한다. 맹학교 선배들도 상당수 그 길로 가 "너도 그쪽으로 가야 수월하다"고 했다고 한다.
최씨는 "합창단은 내가 하고 싶은 게 직업이 되는 길을 열어줬다"며 "이런 일자리 발굴 시도가 많아져 우리 시각장애인도 다양하게 시도할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다"고 했다.
합창단이 부른 노래 중에 '담쟁이'라는 곡이 있다. 함께 벽을 넘자는 의미의 곡이다. 상당수 단원이 이 곡을 '부른 곡 중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꼽는다. 지휘자 함정민씨는 "메시지를 장애인에게 국한하고 싶지 않다"며 "비장애인도 다 넘기 힘든 벽이 있을 텐데 함께 넘어서자는 의미를 듣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성진 기자 zk00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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