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개국 120여 명, 고향 나라 달라도 한국어로 어울리다 [인구 절벽 시대, 다문화가 미래다]

원동욱.신수민 2023. 11. 11. 00:4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SPECIAL REPORT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 위치한 ‘지구촌 학교’ 2학년 교실 벽에는 학생들이 직접 그린 다양한 국기 그림이 있다. 최기웅 기자
지난 3일 오후 3시.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수파산(15)의 춤을 구경하고 있었다. 요즘 공중부양 춤으로 유행한다는 ‘슬립백’이란다. 수파산의 짝꿍이자 부반장인 무안(15·미얀마)은 “수파산! 네 춤 인스타그램에 올렸어”라며 엄지를 치켜 세웠다. 수파산은 밝게 웃으며 “기자님도 한번 춰보세요. 제가 알려드릴게요”라고 말했다. 이 학교에는 12개국 120여 명이 자그마한 행복을 모으고 소중한 꿈을 펼치고 있다.

‘지구촌학교’는 서울 구로구 오류동 오래된 5층짜리 건물에 들어섰다. 대안학교인 이 학교의 공통언어는 한국어. 중국·베트남·몽골·미얀마 등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이 하나의 언어로 소통하고 어울린다. 일반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거나, 적응이 어려웠던 아이들이 이곳에서는 웃음을 되찾고 마치 가족처럼 부대끼며 지낸다.

일반 중학교 진학했다 다시 돌아와

지금은 ‘인싸(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사람)’라는 수파산도 그랬다. 미얀마 소수민족인 카렌족 출신 수파산은 미얀마 군부의 소수민족 탄압 정책을 피해 2014년 태국으로 도망쳤다. 난민 신청을 통해 2016년 부모님·남동생·누나와 함께 한국에 온 수파산을 가로막은 건 언어 장벽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한국어를 사용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수파산의 어려움을 알게 된 다문화교육센터에서 지구촌학교를 소개해줬고,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뒤 2022년 일반 중학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또 다른 장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완벽하지 않은 한국어와 ‘다른’ 외모는 아이들과 어울리는 걸 방해했다. 극심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다. 피부가 조금 검다고 ‘깜둥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어떤 아이들은 수파산의 어눌한 한국어 발음을 따라했다. 힘들었다.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지난해 10월 다시 지구촌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지구촌학교에 돌아와서도 움츠려 있었다. 무안·소피아(16·미얀마)·하시라(16·쿠바)가 손을 내밀었다. 수파산은 그 손을 잡았다. 함께 웃고 떠들자, 활기를 되찾았다. 천생 개구쟁이다. 수파산은 “학교 올 때마다 항상 행복하다. 특히 체육수업이 기다려진다”며 “일반 학교와 달리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끼리 서로 도와주고 챙겨주다 보니, 한국말로 정(情)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싶다”고 말했다. 기자가 수파산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 같은 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 분위기가 한순간에 ‘왁자지껄’ 해졌다. 반장 소피아가 아이들을 ‘정리’하며 “수파산이 우리 학교에서 축구 1등, 달리기도 1등”이라며 마치 자신의 일처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수파산은 “프로 축구선수가 꿈”이라며 “언젠가는 축구를 배우러 해외로도 나가고 싶은데…애들아 도와줄 거지?”라고 외쳤다. 아이들은 “넵!”이라고 대답했다.

수파산의 밝은 표정 뒤에는 어두운 말이 있었다. 바로 ‘일반 학교와 달리’라는 표현이었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지난해 이주배경학생의 학교폭력 경험 비율은 2.3%로 전체 학생(1.1%)에 비해 2배가량 높다. 대응방법도 대부분 ‘부모님 등 가족에게 알린’(66%) 것으로 나타났다. 전영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호주의 BRiTA 프로그램처럼 이주배경학생의 문화접변 스트레스에 대해 지역사회가 개입해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며 “이를테면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경찰·지자체와 연계해 이주배경학생의 피해를 예방하고 관리하는 대안도 있다”고 말했다. 박지혜 지구촌학교 교감은 “학교에 다문화, 중도 입국(한국에 정착한 부모 따라 나중에 입국), 난민 등 학생들이 대다수고이고, 이 아이들이 일반 학교에서 소외와 차별에 노출돼 아픔이 많다”며 “정신적으로 힘들다 보니 극단 선택을 시도하거나 자해 등을 일으키는 아이들도 꽤 있었다”고 밝혔다. 박 교감은 또 “언어 습득 적령기를 지나 온 아이들은 한국어가 금세 늘지 않고, 자포자기로 학교에도 가지 않는 경우도 많아 점점 음지로 숨어들 수 밖에 없다”고 전했다. 상우가 그랬다.

획일적 지원보다 맞춤형 멘토링 필요

스무살 정상우(중국)는 아직 중학생이다. 지난해까지 6년간 학교를 다닌 적이 없기 때문이다. 상우는 2015년 12살의 나이에 아버지와 둘이 한국에 정착했다. 아버지는 생계를 책임지느라 상우를 챙겨주지 못했다. 상우는 거의 집에서 지냈다. 박 교감은 “상우의 소식을 전해 듣고 얼른 아이를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상우의 아버지를 설득해 중국에서 상우가 다녔던 초등학교의 졸업 서류를 받았고, 다행히 상우를 데려올 수 있었다”고 전했다. 스무살 성인 상우는 한참 어린 반 친구들의 환대에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상우는 “처음에는 아이들과 어떻게 지내야할지 몰랐는데, 지금은 다들 너무 좋고 친구들 덕분에 반장도 맡았다”며 웃었다. 상우는 “요리사가 돼서 선생님들과 친구들한테도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주고 싶다”고 전했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이주배경학생 전체 학업 중단율은 2017년 1.17%에서 2021년 0.82%로 감소 추세를 보였지만, 학업 중단 이유로 ‘부적응 관련(42%)’이 절반에 가까웠다. 박 교감은 “일반학교로 가기 전 6개월~1년 대안학교에서 한국어 수업을 받는다 해도 아이마다 적응 속도가 달라 맞춤형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양계민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주배경학생도 요즘엔 너무 다양해지고 있다”며 “국내태생, 외국인학생 등 유형별로 지원할 필요가 있고, 개별적 상황에 따른 멘토링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후 7시. 아이들은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 인도에서 온 송하늘(15)이 “운동회 때 춤 공연해야 하니 연습하자!”라며 ‘Bad Girl Good Girl’ 노래를 틀자, 무안, 하시라, 소피아가 눈 깜짝 할새 대형을 만들어 안무를 시작했다. 학교를 떠나기 싫어할 만큼 아이들이 사랑하는 지구촌학교지만 교감 선생님은 이런저런 고민이 많다. 박 교감은 “대안학교에 온 아이들은 학교에 꾸준히 나오도록 해야 한다. 학교를 좋아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어든 다른 과목이든 배울 수 있다”며 “대부분의 아이들이 차상위 계층이고, 모든 재원이 후원을 통해 이뤄지다 보니 아이들에게 더 좋은 것들을 해주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학교에 운동장이 없는 것도 박 교감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축구 선수가 되고 싶은 수파산도, 요리사가 되고 싶은 상우도, 춤을 좋아하는 하늘이도 한 목소리로 “넓은 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다. 박 교감은 “폐교된 학교로 옮겨 아이들이 운동장이나 강당을 마음껏 쓸 수 있어도 행복할 것 같다”고 말했다.

오후 8시가 넘었다. 아이들의 하교 시간도, 기자의 퇴근 시간도 한참 지났다. “기자님, 저희 춤추는 것 좀 보세요!”라며 무안이 다가왔다. 낡고 작은 학교지만 아이들의 눈은 밝고 크게 빛나고 있었다.

원동욱·신수민 기자 won.dongwook@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