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주목해야 할 한국 영화 세 편 [엄형준의 씬세계]

엄형준 2023. 11. 7.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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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국영화 중 누적 관객 200만명을 넘긴 영화는 지금까지 네편 뿐이다.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수백억원의 제작비를 쏟아부은 대작 중에선 ‘밀수’밖에 없고, 영역을 중·저예산 영화까지 확장해도 손에 꼽을 정도다. 이러다 보니 한국영화 위기론이 나온다.

그럼에도 한국영화의 희망이 사라진 건 아니다. 약 50억원의 제작비를 들인 유재선 감독의 ‘잠’과 60억원을 들인 남대중 감독의 ‘30일’은 기대 이상의 선전을 하며 손익분기점을 넘겼고, 개봉작 중엔 여전히 탄탄한 만듦새의 ‘숨겨진 보석’이 많다. 

개봉 때부터 압도적으로 스크린을 차지하는 흥행 기대작에 가려진 작은 영화 중에서도, ‘어쩐지 별 볼 일 없을 것 같다’는 선입견을 깨면, 기대 이상의 재미와 감동을 경험할 수 있다. 한국 블록버스터들이 숨 고르기를 하는 지금 스토리와 연출, 연기의 세 박자를 고루 갖춘, 세편의 작은 영화가 눈길을 끈다.
나도 범죄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우리 주변의 공포 ‘뉴노멀’

8일 개봉하는 ‘뉴노멀’은 ‘기담’, ‘곤지암’을 연출한 정범식 감독의 작품으로 때아닌 눈이 내리는 날씨 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흉악 범죄가 난무하는 비정상적 대한민국을 그린다.

영화는 여러 개의 독립된 에피소드로 이뤄져 있는데, 불안한 일상의 조각들은 하나의 큰 이야기로 엮이며,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화면의 분위기와 흐름은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예측하게끔 유도하고, 관객은 이내 곧 터질 것 같은 사건에 불안해진다. 하지만 감독은 이런 관객의 예측을 번번이 뒤집는다.
영화엔 익숙한 얼굴이 여럿 보인다. 드라마 ‘겨울연가’, ‘천국의 계단’ 등을 통해 멜로 연기를 보여준 최지우가 ‘현정’ 역으로 연기 변신을 시도했고, 이유미와 최민호가 ‘현수’와 ‘훈’역을 맡아 사랑에 목마른 청춘을 연기했다. 표지훈은 ‘찐따’(덜떨어진 사람) 청년 ‘기진’으로, 옆집 스튜어디스를 훔쳐보는 스토킹범을 청승맞게 연기해낸다. 어른들의 사랑을 한껏 받고 있는 가수 정동원은 중학생 ‘승진’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런 낯익은 얼굴보다 더 눈에 띄는 건 이렇다 할 필모그래피를 찾아볼 수 없는 하다인이다. 하다인은 아르바이트생 ‘연진’역을 맡아 깊은 증오와 허무에 찬 ‘MZ세대의 절망’을 끄집어내며 이 영화를 완성한다.
비현실적인 일들이 현실로 벌어지는 요즘 세태를 꼬집는 영화는 관객에게 위안을 주는 대신 긴박한 상황의 연속으로 숨 쉴 틈을 빼앗는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곳곳에서 관객의 탄식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정 감독은 ‘뉴노멀’에 대해 “오싹한 서스펜스가 중심이 되는 스릴러 장르지만, 그 속에 담긴 인물들 각각의 정서는 현재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 현실에 기반한 현대인의 외로움과 고립이다. 하지만 이야기적으로는 무조건 재미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무겁지 않고 속도감 있게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영화의 제작비는 38억원으로, 손익분기점은 누적 관객 60만여명이다.
평범한 일상의 비범한 해석, 그리고 배우의 탄생 ‘괴인’

빙글빙글 돌아가는 눈알 모양의 안경을 쓴 배우가 등장하는 포스터부터 예사롭지 않은 8일 개봉작 ‘괴인’은 괴물이나 외계인은 등장하지 않는, 뜻밖에도 평범한 일상에 대한 신선한 해석을 담은 인물 탐구 영화다.

이야기는 피아노학원의 인테리어를 맡은 목수 ‘기홍’(박기홍)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기홍’은 공사를 마친 후, 우연히 자신의 차 지붕이 찌그러진 걸 발견하고, 블랙박스를 뒤져 학원 주차장에 세워둔 차 위로 누군가가 뛰어내렸단 사실을 알게 된다. 기홍의 집 주인인 ‘정환’(안주민)은 범인을 찾자고 기홍을 꼬드겨 학원으로 향하고, 둘은 누군가 도망치는 걸 발견한다.
언뜻 홍상수 영화를 떠오르게 하는데, 느낌은 더 젊고 발랄하다. 있을 법하지만 기묘한 일상은 관객에게 ‘그래서 그다음은’이라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흐름에 끝까지 눈길을 뗄 수 없다.

이정홍 감독은 지난 1일 시사회 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유난히 소통이 어려운 시대인 거 같고, 나와 다른 타인을 너무 쉽게 혐오하고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부분이 있지 않나 싶다”면서 “지켜보고 끝내 조금 이해하게 되는 (영화 속) 경험을 통해서 타인을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되는 영화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기묘한 이야기의 더 놀라운 점은 ‘기홍’의 친구 ‘경준’역의 박경준 배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주요 인물이 연기 경험이 전무한 비전문 배우라는 사실이다.
일반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연기력을 선보이는 박기홍은 이 감독의 오랜 친구로 영화 일을 도운 적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너무 잘 어울려 원래 그의 성격이 드러난 듯도 한데, 앞으로 다른 색깔의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지 주목된다. 미묘한 감정선을 드러내는 웃음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전길은 쌍둥이 자매를 둔 엄마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환역의 안주민은 이탈리안 피자를 굽는 요리사다.

전길은 지난 1일 시사회 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살다 보면 이상한 만남이 있다. 촬영하고 대사할 때는 그 의미를 크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저한테는 괴인이 이상한 만남인 것 같다. 기자와의 만남도 그렇고, 이상한 만남의 연속인 것 같다”고 했다. 이 이상한 만남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상, 넷팩상, KBS독립영화상, 크리틱b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했고, 제48회 서울독립영화제 대상을 받았다. 이밖에 시드니영화제 장편 영화 부문, 홍콩아시안영화제 와이드 앵글 부문 등에 초청됐다.
색체와 소리의 탁월함, 주목해야 할 신인 감독의 등장 ‘만분의 일초’

‘만분의 일초’는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출신의 신예, 김성환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과거의 악연으로 엮여있는 ‘재우’와 ‘태수’가 검도 국가대표출전자리를 건 합숙훈련에서 피할 수 없는 대결을 벌이는 얘기다. 개봉은 오는 15일이다.

지금까지 검도가 일부 등장하는 영화는 있었지만, 핵심 소재로 다룬 국내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 스포츠라는 인식과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호면’(대련 중 보호를 위해 쓰는 마스크)의 철망에 얼굴이 가려 배우의 표정을 드러내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대련이 영화의 전부는 아니지만, 영화의 결정적 순간엔 역시 배우가 호면을 쓰고 있다. 호면에 가려진 인간의 내면을 어떻게 보여줄까가 중요한데, 김 감독은 이를 제대로 살려냈다.

마룻바닥과 발바닥이 빚어내는 마찰 소리, 손과 발의 움직임, 숨소리, 호면 뒤에서 빛나는 눈빛이 깊이 있는 색채와 더해져 영화를 더없이 진지하게 만든다.
김 감독은 지난달 31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도복이) 군청색이라고 해야 하나. 그거와 대비되는 피부톤과 마룻바닥의 질감. 두 색이 주도적이다 보니 이걸 어떻게 담을까 이광민 촬영감독과 함께 고민했다”면서 색깔의 배합이 매력적인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갱스터 영화 ‘예언자’와 개빈 오코너 감독의 이종격투기 영화인 ‘워리어’를 참고했다고 했다. 그는 또 “영화가 처음부터 순수 스포츠물이 되길 원하지 않았고 배우의 내적 심상을 다루고 마음이 요동치고 싸우는 모습을 운동경기로 드러내는 형태로 연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까칠하고 비뚤어진 ‘권모술수’ 변호사 권민우 역으로 이름을 알린 주종혁이 최고의 자리에 도전하는 ‘재우’역에, ‘악인전기’에 출연한 ‘문진승’이 검도계의 일인자인 ‘태수’역에 낙점돼 각각 폭풍과 고요의 감정을 연기한다.

김 감독은 주종혁에 대해 철망 안에서도 눈빛이 들어오는 배우, 옆얼굴이 매력적인 배우라고 표현했는데, 정말 그렇다. 영화는 주종혁이 ‘우영우’ 출연 전 먼저 찍은 작품으로 그의 참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의 결말은 신인 감독의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일면 아쉬움이 있지만, 김 감독은 다양한 결말을 편집해 봤고 그중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흐름을 선택했다고 한다.

김 감독이 4억원의 예산으로 찍은 ‘만분의 일초’는 제작비가 영화의 가치를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가 아니라는 것과 그가 앞으로 주목해야 할 감독임을 증명한다. 소리와 빛에 집중할 때 비로서 가슴으로 다가오는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다.

영화는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코리안 판타스틱 작품상과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과 제8회 런던동아시아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 또 47회 상파울루국제영화제 신인 감독 경쟁 섹션과 제6회 말레이시아국제영화제 BIFAN at MIFFest 비경쟁 섹션에 공식 초청됐다. 

엄형준 선임기자 ti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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