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 덮고 살포하던 기적의 빈대약 'DDT'…왜 퇴출됐을까, 새삼 관심

박태훈 선임기자 2023. 11. 7. 11:5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60년대까지 이·빈대·모기 잡는 특효약…맹독성 밝혀져 퇴출
정부, 미군에게 DDT공중살포 요청…안전책, 장독만 덮어라
1950년대 초반, 이와 빈대 등을 잡기 위해 DDT 살충제를 뿌리는 모습. 오른쪽은 미군들이 아이들의 몸에 달라 붙어 있는 이를 DDT로 죽이는 장면. ⓒ 뉴스1 DB

(서울=뉴스1) 박태훈 선임기자 = 환경이 열악한 후진국에서나 나타나는 것으로 알고 있던 빈대가 최근들어 이곳저곳에서 출몰, 정부가 '빈대현황판', '합동 빈대대책본부'까지 가동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령층을 중심으로 1960년대까지 빈대 잡는 특효약으로 알려졌던 DDT에 대한 추억이 재소환되고 있다.

◇ DDT, 한때 가장 유명했던 살충제…DDT 사용법으로 노벨 생리학상까지

DDT(디클로로 디페닐 트라클로로에탄)는 유기염소계열의 살충제로 1874년 자이들러(O.Zeidler)가 처음 합성했지만 자세한 효능까진 알지 못했다.

이후 1939년 스위스 과학자 뮐러(P. H. Muller)는 DDT에서 강력한 해충 박멸효과가 있음을 밝혀냈다. 이 공으로 뮐러는 1948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2차대전 때 DDT살포 교육을 하고 있는 미군. ⓒ 뉴스1 DB

◇ 1940년대부터 60년대까지 기적의 살충제, 천사로 불려

DDT는 이(爾)가 옮기는 발진티푸스나 모기에 의한 말라리아 퇴치 특효약으로 194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각광 받았다.

발진티푸스의 경우 1915~1922년 사이 러시아 지배 아래 있었던 동폴란드에서 3000만명이 걸려 300만명이 목숨을 잃는 등 사망률이 20% 정도에 이르는 치명적 질병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난민수용소, 포로수용소, 감옥 등 사람들이 밀집되고 위생상태가 나빴던 곳에 발진티푸스가 유행하자 골치를 앓던 미군은 DDT 효과에 반색, 군사 훈련프로그램에 DDT 사용법을 집어 넣었다.

DDT가 이를 죽여 티푸스를 예방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미군은 포로수용소 등지에 백색가루인 DDT를 분말, 액상 형태로 뿌려댔으며 DDT를 직접 몸에 뿌리는 방법까지 교육했다.

◇ DDT 등장으로 '이 잡다 초가삼간 태울 일' 없어진 한국

위생상태가 불량하던 시절 사람 피를 빨아 먹고 티푸스를 옮기는 이는 골치거리였다.

가렵고 습진이 생기게 만들지만 워낙 작아 잡기가 까다로웠다. 오죽 잡기 힘들었으면 '이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운다'라는 속담까지 나왔을 정도다.

이러한 이도 DDT 앞에선 맥을 못 추었다.

1949년 여름 유행성 뇌염이 전국을 휩쓸자 보건부는 주한미군에 'DDT를 뿌려 달라'며 요청했다.

1949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는 "유행성 뇌염환자가 1400명, 사망자가 273명에 달하고 있다"고 심각한 실상을 알렸다.

그러면서 "보건부가 '주한미군이 비행기로 DDT 공중살포한다'라는 사실을 밝혔다"고 희소식을 전했다.

1945년 모기퇴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미국 보건당국이 해변에서 DDT를 뿌리지 아이들이 위해성도 모른체 따라 가고 있다. ⓒ 뉴스1 DB

◇ DDT공중살포 주의사항은 장독 덮으라는 정도…비행기 보려고 아이들 몰려들기까지

모기와 이, 빈대 등을 잡는 데 DDT만한 약이 없었기에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엔 DDT 살포가 잦았다.

1959년 5월 7일 동아일보의 "10일부터 서울시 일원에 공군과 육군 화학부대 협조 얻어 DDT 공중살포를 하니 '장독'과 '양봉'피해 없도록 주의해 달라"는 기사를 볼 때 그저 먼지를 조심하자는 정도 수준의 경각심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공중 살포 사실이 알려지면 아이들이 비행기를 보려고 살포 현장에 몰려들기까지 했다.

◇ 미군이 봉사차원에서 DDT 살포, 동사무소가 주민에게 요금 받아내 딴주머니 차

1955년 2월 15일 동아일보는 "대구 북내동서 미군 DDT 살포 요금을 징수했다"라는 사실을 전했다.

이어 "DDT를 뿌린 미군도 아닌 동에서 왜 돈을 받았는지, 대동강물 팔아 먹은 봉이 김선달이다"며 순전한 주민들을 속인 공무원들을 질타했다.

한편 말라리아로 골치를 앓던 국제보건기구(WHO)도 1955년 전 세계적인 말라리아 추방계획을 세워 DDT를 적극 권장했다.

이후 말라리아 사망률이 크게 낮아졌다.

1951년 10월 미군 수송기가 서울 상공을 돌며 DDT를 뿌리는 장면.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뉴스1

◇1962년 침묵의 봄 출판이후 독성 알려져, 1970년대 DDT 추방…한국도 1979년 완전퇴출

1957년부터 DDT독성이 인체에 치명적이라는 지적이 일기 시작했다.

1962년 생태학자 레이첼 카슨(1907~1964)이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라는 책을 통해 "DDT의 무분별한 사용으로 생태계가 파괴돼 봄이 와도 새가 울지 않는다"며 그 위험을 고발했다.

이를 계기로 DDT 독성에 대한 연구가 급속도로 이뤄져 인체에 흡수될 경우 쉽게 배출되지 않고 남아(반감기 50년 이상) 암을 유발하거나 간이나 신장에 해를 끼치고 감각이상·마비·경련 등을 일으키는 맹독성 물질임이 널리 알려졌다.

이에 1970년대 들어 대부분 국가에서 DDT를 추방했고 우리나라도 1979년 시장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이후 DDT는 '오렌지색 비'로 알려진 고엽제(DCB)등과 더불어 환경과 인간 모두를 말라 죽이는 악마가 됐다.

buckbak@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