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cm·74세' 한국 여성 최고령 7대륙 최고봉 완등까지 1곳 남았다

서현우 2023. 11. 7.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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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지컬100] 한국 여성 최고령 에베레스트 등정 송귀화씨

극한 산행은 단순히 체력만 좋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산을 대하는 올곧은 태도와 이념, 탄탄한 지식과 경험을 두루 갖춰야만 안전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넷플릭스 인기 예능 <피지컬100>에서 피지컬이 뛰어난 이를 탐구했듯, 월간<山>은 '산지컬'이 뛰어난 이들을 만나본다. - 편집자 주

"저는 정상에 꼭 가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는 그 말과 동시에 "훗. 훗. 훗"하고 웃었다. 그렇게 꼭 세 번씩 리듬 있게 끊어 호흡하듯 웃어 그 운율이 괜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정상에 꼭 가야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가 잠시 뒷전으로 밀렸다가 웃음의 메아리가 끝난 뒤에야 다시 찾아들었다. 꼭 등정주의나 정복적인 행태가 아니더라도 정상은 산을 상징하고, 정의하는 본질적인 요소기에 빼놓을 수 없는 장소다. 그런데 산에 가면서, 꼭 정상에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단다.

"그냥 어디까지 오르든 오른 곳까지가 내 몫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못 오른 봉우리가 꽤 되는데 아쉬움이나 후회는 늘 없었어요."

참 희한했다. 이 바닥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모두 산에 대한 갈증과 집착이 있다. 더군다나 독하고 유별나게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만나는 산지컬 연재다. 아리송하다는 눈빛을 띠고 있자 또 한 번 "훗. 훗. 훗"하고 웃어넘길 따름이었다.

혹시 이 말이 겸허하게 꾸며내기 위한 공수표일까 생각하며 말을 조금 더 이어 나가보았다. 그런데 그는 실패에 아쉬움과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처럼, 성공에도 그런 듯했다. 굳이 미사여구로 성공을 그럴싸하게 꾸며내려 하지 않았다. 초연했다. 그리고 순수했다.

사실 외모만 보면 그의 이런 '집요하게 정상을 향하는 자들과는 거리가 먼' 태도가 곧잘 이해된다. 다리는 딱히 두껍지 않고, 표정은 차분하며, 눈에는 고집이 없고, 자그마하다. 옛 원정기사를 찾아보니 키는 155cm라고 한다.

그런 그는 한국 여성 최고령 에베레스트 등정자이며, 오는 12월 15일 한국을 출국해 남극을 향할 예정이다. 빈슨 매시프(4,892m)를 오르기 위해. 그리고 이를 성공적으로 오르면 그는 한국 여성 최고령 7대륙 최고봉 완등이란 기록을 세우게 된다. 정상에 목매달지 않는 이가 어떻게 이런 도전의 역사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일까?

1998년 몽블랑을 등반하고 있는 송귀화씨.

바다가 살린 목숨, 산으로 가다

도봉산역 1번 출구에서 만난 송귀화(74)씨는 인파 사이에서 위화감이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평범했다. 독보적인 아우라를 휘감고 있지 않았고, 걸음도 살금살금 이어갔다. 오고가는 형형색색에 일조하는 색을 이룰 뿐이었다. 다만 특징이 있다면 조금 더 따뜻한 색으로 보였다는 점 정도.

"저는 1949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어요. 당시 세대가 으레 그렇듯 출생신고를 돌을 지나서 해서 호적상으로는 1950년생이 됐죠. 돌이 지나기 전에 6.25전쟁이 발발해서 군산으로 피란을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사실 그의 족적은 각 대륙 최고봉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여기서 끝이 날 뻔했다. 전쟁이 발발해 사람들이 피란 행렬을 이루는데 송씨가 워낙 몸이 약해 오래 살 가망이 거의 없어 보이자 이웃들은 그의 아버지에게 "곧 죽을 것 같은데 왜 데려 가냐"고 했단다.

"그래서 아버지가 내려갈 때 곡괭이를 들고 갔대요. 혹시 죽으면 바로 묻어주려고요. 그런데 막상 군산에 도착하니 어린 제가 조개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먹어서 건강해졌다고 해요. 그래서 그 이후로 사람들은 '군산 바다가 너를 살렸다'고 했죠. 지금도 바다 음식, 바다 냄새가 좋아요."

송 씨는 등반력이 탁월하다. 띠동갑인 지인들과 함께 1994년 설악산 천화대 리지를 올랐다.

그래서일까. 바다에 진 빚을 갚기 위해 그는 줄곧 바다로 갔다. 직장에서 휴가를 받으면 섬으로 들어갔고, 주말에 여유가 있으면 밤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바다를 보고 돌아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선택은 산이었다.

"1990년으로 기억해요. 지인이 자기 직장산악회가 있는데 한 번 같이 가보자고 했어요. 당시 저는 양주군청에서 10년 넘게 일하고 있던 상태였죠."

"공무원이셨군요. 군청에선 어떤 사무를 맡으신 거죠?"

"제가 원래 독일을 가고 싶었어요. 파독 간호조무사로요. 그래서 열심히 준비해서 자격증을 땄는데 따고 나니 파견이 중단돼 버렸어요. 결국 그 자격증을 갖고 양주군청 보건소에서 일을 하게 됐죠."

지인 따라 오른 산은 꽤 재밌었다. 그는 "어렵고, 힘들게 산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 나들이하듯 가볍게 산을 오르내린 후에 뒤풀이를 거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산에 재미를 붙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지금은 없지만 당시에 경기도북부산악연맹이란 단체가 있었는데 거기서 한 달에 한 번, 또 지인 산악회에서 한 달에 한 번 그렇게 산에 다녔어요. 둘 다 별로 힘들지 않았어요. 오히려 빨리 가면 야단맞을 정도였어요. 후미에 머무르라고요. 여름에 땀 한 방울 안 날 정도로 천천히 다녔죠."

송 씨는 등반력이 탁월하다. 띠동갑인 지인들과 함께 1994년 설악산 천화대 리지를 올랐다.

산에 가는 게 너무 재밌다 보니 산에 다닌 지 꼭 1년 만에 덜컥 해외원정도 결심했다. 1991년 연맹의 말레이시아 키나발루(4,101m) 산행에 따라 나섰다. 송씨는 "그땐 공무원이 해외여행을 가려면 허가 받아야 되는 시대였다"며 "그런데 그 며칠 되지도 않는 원정을 아무리 신청해도 허가를 안 내줘서 그냥 갔다"고 웃으며 말했다. 물론 원정을 다녀온 후 받아든 것은 징계. 그래도 그걸 감수할 정도로 산에 가고 싶었다.

엘브루스에서 고산을 배우다

"1995년 여행 자유화 조치 이후로는 정말 많이 돌아다녔어요. 먼저 백두산을 갔다 왔고, 그 다음해에 유럽 최고봉 엘브루스(5,642m)를 갔죠. 아! 엘브루스.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따라갔는데 날씨가 너무 안 좋았어요. 10명이 가서 베이스캠프에 있다가 그냥 왔죠. 그런데 이때 만난 분이 참 대단했어요. 저보다 나이가 많은데 고소 적응도 엄청 잘하고 걷는 것도 잘했죠."

본인은 고산 등반이 너무 힘들고 적응을 못 하고 있는데 고속도로 달리듯 막힘없는 그의 비밀이 너무나 궁금했다.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잘 걷냐?"고 묻자 "일요일마다 도봉산에 간다. 한 번 따라오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도봉산 몇 번 오른다고 그렇게 빨라질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일요일 도봉산을 찾았다. 그리고 충격을 받는다.

"이전까지 저는 땀도 안 나게 걷는 산행을 했는데, 이분들은 진짜 산에서 달리듯이 걷더라고요. 일단 최대한 거리를 좁혀보려고 부지런히 걷는데 도저히 못 따라갔어요. 그땐 도봉산 지리도 잘 모를 때라 늘 그분은 먼저 가서 보이지 않았죠. 그래서 길을 어떻게 찾았는지 아세요? 길을 잘 들여다보면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있어서 그걸 따라갔어요."

도봉산은 송 씨가 탁월한 등반력을 갖출 수 있도록 키워준 훈련장이다.

몇 번 그들의 속도를 따라가려고 노력하니 점차 그 페이스를 따라잡게 됐다. 그래서 그의 발걸음은 지금도 젊은이 못지않게 빠르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일정한 속도의 빠른 잰걸음을 유지한다.

이렇게 도봉산 추격전 수련을 1년 정도 하고 또 다시 찾은 엘브루스. 다시 오자고 약속한 10명 중 그 약속을 지킨 건 4명뿐이었다. 송씨는 "지난 원정 때는 그토록 힘들었던 산행이 이번에는 완전 거저였다"며 "그때 '아 산은 이렇게 타야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도봉산이 모의고사였다면 엘브루스는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장이었다. 송씨는 "늘 날씨가 안 좋아서 어렵게 등반했다. 이미 등정하고 나서도 누군가 엘브루스 간다고 하면 또 따라가고 그랬다. 그 과정에서 흰 산 등반 훈련이 됐다"고 전했다.

체력은 일취월장했지만 여전히 산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1997년 엘브루스를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산행"이라고 기억했다.

"4명이서 정상 공격을 하다가 한 명이 힘들어 해서 가이드가 다 같이 내려가자고 했어요. 저희는 아쉬웠죠. 그래서 그 사람만 안전히 하산시켜 달라고 하고 저희 셋이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거의 정상 근처까지 갔는데 발 디딜 곳이 안 보일 정도로 가스가 차오르는 거 있죠? 정말 당황했어요. 그래서 후퇴하는데 저희가 방향을 잘못 잡아서 아예 다른 능선으로 내려와 버렸어요. 나중에 가스가 걷히니 계곡 너머 저 위에 우리가 가야 하는 푸리웃산장이 보이더라고요. 크레바스에 빠지기도 하면서 정말 죽을 둥 살 둥 다해서 간신히 산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또 다시 정상 공격했는데 이번엔 눈보라가 너무 쳐서 동상에 걸렸었죠. 그래서 또 정상 못 가고 동봉만 오르고 왔어요."

도봉산과 엘브루스에서 다져진 송씨의 발걸음은 이제 전 세계를 향한다. 킬리만자로, 아콩카과도 올랐다. 그리고 만난 산이 매킨리(현재 데날리). 그는 여기서 이제 어엿한 산악인으로 성장한다.

"2000년에 김해 팀과 함께 매킨리를 갔어요. 김해 팀과는 엘브루스에서 인연이 닿았죠. 매킨리는 다른 산이랑 좀 달라요. 셰르파나 포터가 없고, 날씨는 변화무쌍하죠. 그래서 자기 책임 하에 모든 등반을 다 해야 하는 곳이기에 난이도가 차원이 달라져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비행기를 타고 김해로 가서 하중훈련을 했죠. 20kg이 넘는 배낭을 메고, 거기에 썰매를 끌어야 하니 타이어까지 매달고 걸었어요. 진짜 미치지 않고선 못 할 일이었죠. 그런데 그만큼 너무 하고 싶었어요."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송귀화씨.

타이어 끌며 매킨리 원정 준비

매킨리를 너무 오르고 싶었기 때문에 직장에 사표도 냈다. 원정을 위해 24일이란 긴 휴가를 허락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22년간의 공직 생활을 접겠다는 결단까지 내렸기 때문일까. 원정 자체는 순조로웠고, 컨디션도 최고조였다. 송씨는 "그때 체력이 어느 정도로 좋았냐면 남자 대원들이 자기 짐 좀 대신 들어달라고 내 앞에 슥 밀어놓곤 했다"며 "그걸 모두 대신 메고 다닐 정도로 파워가 있었다"고 전했다.

"매킨리가 정말 멋있는 산입니다. 정상에 선 후 거기서 7대륙 최고봉을 완등해 보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어요. 워낙 돌아다니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데 이왕이면 다른 대륙, 다른 세상을 많이 보고 싶었거든요. 그러니 그 대륙의 최고봉을 각각 오르면 전 세계를 아울러 볼 수 있는 셈 아니겠어요."

"사적인 질문이라 죄송한데, 가족들은 반대 안 하던가요?"

"결혼을 안 해서 뭐라 할 사람이 없어요. 혼자 살아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닌데 혼기를 놓치고 어쩌다 보니 시간이 흘렀네요."

"주변에서는 뭐라고 말하나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주변이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가요? 내가 좋아서 다닌 거고, 지금도 내가 원해서 산에 오르고 있는 건데요. 정말 원 없이 돌아다녔고, 지금까지 다닌 산행 모두 후회가 없어요.

물론 모든 사람이 다 저처럼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평범하지 않은 인생이잖아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원 없이' 사는 건 모두가 똑같은 것 같아요. 단지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 '원 없이'의 기준을 어느 만큼으로 잡느냐의 차이일 뿐 다들 하고 싶은 걸 최대한 하면서 살고 있는 걸로 보여요."

"그렇다면 산은 왜 오르시나요?"

"오르는 게 재밌어서요. 또 하얀 산이 특히 좋아요. 눈 밟는 것 자체가 재밌고, 높아질수록 달라지는 풍경도 좋아요. 그래서 저에게 산은 꼭 고향 같아요. 그냥 가면 좋은 곳이죠."

K2 정상 아래에서 돌아선 까닭은?

7대륙 최고봉 완등이란 목표가 생겼지만, 거기에 집착하진 않았다. 그저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번 오른 산이더라도 또 갔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사람들이 날줄이 됐고, 하얀 산은 씨줄이 돼 엮이고 엮였다. 산에서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이 더 높은 산으로 그를 이끌었다.

"아콩카과에서 서울시청산악회 사람들을 만나 백두대간도 완주했어요. 또 박영석 대장을 해외 원정 중에 만나 인연이 생겼고, 후에 박 대장의 로체 원정에 동참할 수 있었죠. 오은선 대장의 아마다블람 원정에도 참석해서 직벽 주마링 연습을 할 수 있었고요. 그리고 매킨리를 같이 등정했던 김해 팀의 김재수 대장의 원정대에 속해 2007년 에베레스트를 오를 수 있었죠."

한국 여성 최고령 에베레스트 등정 기록은 순탄하게 세워졌다. 5월 17일 북동릉 루트를 통해 올랐다. 송씨는 "그때 몸이 정말 최고였고 기술도 잘 다룰 줄 알았다"며 "아무리 올라도 바람 하나 없고 날씨는 진짜 화창해서 순조롭게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순간, 그에게 남은 7대륙 최고봉은 단 하나였다. 남극 빈슨 매시프다. 이미 다른 대륙 최고봉은 전부 등정한 상태. 바로 욕심을 낼 법도 했지만 그는 이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 되면 간다는 마인드였다. 대신 이듬해 K2 원정에 참여했다.

돌탑에 돌을 올리며 이번 남극 빈슨 매시프 원정을 잘 다녀올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하고 있다.

"캠프3(보통 7,100~7,250m쯤 설치)까지 올랐었어요. 그런데 산소 운반 문제로 셰르파들이랑 갈등이 생긴 모양이었어요. 산소를 못 옮기겠다고 버티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가만히 소동을 지켜보니 저들을 믿고 정상까지 갈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었어요. 또 캠프3까지 간 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고요. 그래서 셰르파들에게 '나는 내려갈 테니 베이스캠프에 무전해 달라'고 하고 혼자 하산했죠. 그런데 무전이 안 된 거예요. 이미 한참 내려왔는데 날은 저물고 그래서 길 찾는 데 애를 먹었어요. 간신히 베이스캠프를 찾긴 했는데 물이 엄청 세찬 계곡이 가로막고 있었죠. 악을 써가며 소리를 지르니 그 물소리를 뚫고 마중 나오더라고요. 만약 그 소리가 닿지 않았으면 얼어 죽었을 겁니다."

그가 바라고 사랑하는 건 정상도, 타이틀도 아니었다. 단지 산이란 공간, 그 자체였다. 그래서 빈슨 매시프 원정은 16년 뒤로 밀려났다. 그 사이에 스웨덴 쿵스라덴, 미국 존뮤어트레일 같은 아름다운 장거리 트레일을 걸었다. 이탈리아 돌로미티도 두 번이나 갔고, 오스트리아와 독일 최고봉, 알프스 오뜨루트도 끝냈다. 인도와 중국의 설산도 서울시청산악회와 함께 누비고 다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오뜨루트입니다. 오르막내리막이 꽤 험한 길이었어요. 저는 오르는 게 너무 재밌거든요. 훈련이 돼 있어서 빠르게 올라가는 게 그다지 힘들지 않아요. 오뜨루트는 오르막내리막이 거듭돼 걷는 재미가 아주 넘쳐나요. 게다가 그만큼 보이는 풍광도 변화무쌍하죠. 너무 재밌었어요."

16년 만에 도전하는 미완의 꿈

"그래도 계속 7대륙 최고봉 완등이 생각났을 것 같은데 왜 지금까지 미뤄둔 건가요? 또 지금 다시 원정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이고요?"

"돈 때문이죠 뭐."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빈슨 매시프 원정은 정말 비싸요. 대행사비만 7,000만 원이 들어갑니다. 유사 시 구조 보험 같은 게 포함된 금액이죠. 비행기표나 숙박비, 장비나 식량 비용이 전부 제외된 비용이에요. 그러니 지금까지 엄두도 못 내고 있었죠. 다른 원정에 비해 10배 이상 비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올해 23년 전에 지인에게 빌려줬던 돈이 돌아왔다. 송씨는 "원금만 받았다. 이자까지 따지면 더 많은 액수일 테지만 그래도 고마웠다"고 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돈이 돌아오자 바로 남극이 떠올랐다. 수소문해 보니 경상대 팀에서 빈슨 매시프 원정을 준비하고 있다고 해서 연락이 닿아 의기투합할 수 있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 12월 15일에 출국해 칠레 남부 세계 최남단 도시 푼타아레나스로 간 뒤, 앞뒤 여유일 각 3일을 제외한 12일의 남극 원정을 치를 예정이다.

등산스틱을 감아쥔 송 씨의 손이 야무지다.

"원정 준비는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매일 아침 수락산 도정봉을 등정하고 있어요. 집에서 왕복 8km 정도 거리인데 이 오르막이 꽤 가팔라서 운동하기 딱 좋아요. 그 다음 오후에는 헬스장에 가고요. 근력운동 위주로 합니다. 물론 무리한 무게를 들지는 못하고요."

"다친 적은 없으십니까?"

"산에서는 한 번도 다친 적이 없어요. 저는 고소도 없고, 어딜 가나 잘 먹고 잘 자는 스타일이거든요. 비행기에 타면 바로 잠들어서 시차적응도 잘해요. 여행가 체질이죠.

그런데 딱 한 번 다친 적 있어요. 2010년대 초반 어느 날 군산 섬에 백패킹을 갔었죠. 무거운 짐을 메고 한참 걸으니 다리가 묵직하더라고요. 그 다음날 일이 있어 시골에 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데 막 버스가 들어오고 있는 게 보이는 거 있죠? 아무래도 시골 버스는 자주 안 다니잖아요. 놓치면 한참 기다리겠다 싶어서 잡으려고 뛰는데 그때 무릎 오금이 뚝 끊어지는 소리가 났어요. 아예 걸을 수 없었죠. 회복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지금은 아무렇지 않고요."

"남극 원정에 임하는 각오는 어떤가요? 이번에 실패하면 실질적으로 다시 도전하기 어려운 만큼 많이 긴장되실 것 같은데요."

"그냥, 잘. 잘하고 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잘 하고, 잘 보고 오자' 정도죠. '이번에 못 가면 절대 안 된다'는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아요. 산이란 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갈 수도 있고 못 갈 수도 있고 그런 거죠. 날씨 같은 게 잘 받쳐주면 잘하고 올 거고, 그렇지 못하면 못하겠죠. 인생도 그렇잖아요? 다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니깐. 만약 정상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거기까지 간 제 걸음에 만족할 거예요."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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