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탱크 경제단체’ 만들기 동분서주… 묵묵히 성과내는 ‘선비형 CEO’[Leadership]

임대환 기자 2023. 11. 6.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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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adership -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
풍산 이끌며 계열사 통폐합·신사업 확장
한국펄벅재단 후원 등 ‘박애정신’ 실천도
‘재계 맏형’ 위상찾기 조직재건 작업 착수
윤리위원회 구성해 ‘정경유착’ 고리 차단
주요 경제단체 순차면담 ‘파트너십 강화’
민관 합동 경제사절단 통해 해외 협력도
180㎝가 넘는 큰 신장을 가진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이 조직 혁신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한경협 제공

옛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지난 8월 풍산그룹의 류진(65) 회장을 신임 회장으로 추대했다. 류 회장은 취임하자마자 ‘싱크탱크’로의 기능 강화를 위해 대대적인 혁신 작업에 나섰다. 그러면서 잃어버렸던 ‘재계 맏형’으로서의 조직 위상을 되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묵묵히 CEO의 역할을 다하는 ‘선비 리더십’으로 알려진 류 회장이 한경협호(號)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킬지 경제계의 이목이 쏠려 있다.

◇묵묵하지만 강한 승부욕을 겸비한 ‘선비 리더십’ = 류 회장은 재계에서 ‘선비 CEO’로 이름나 있다. 류 회장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 학자로 영의정까지 지냈던 ‘징비록’의 저자 서애 류성룡의 직계 13대손이다. 류 회장 스스로 ‘풍산 류씨(豊山 柳氏)’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 부친인 류찬우(1923∼1999) 창업주 역시 회사 이름을 풍산으로 정할 정도로 가문의 뿌리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이 때문에 류 회장은 조용하고 묵묵하면서도 혁신과 도전에는 강한 승부를 거는 경영 스타일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풍산그룹의 대표이사(사장) 취임 이후 1997년 외환위기 상황에서도 계열사 통폐합 등 경영합리화를 추진해 수익성 높은 사업(반도체용 리드프레임, 소전(素錢) 등)을 과감히 확장했다. 해외시장 개척 등 신사업 진출을 위해 미국과 일본, 중국에 법인을 설립하고 시장 개척에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류 회장은 이를 통해 항공기·유도무기에 필수적인 정밀센서 등을 생산하는 첨단기업으로 변신하는 데 성공했다.

류 회장이 2006년 창립 38주년 기념식에서 밝힌 기념사는 그의 경영 철학을 잘 보여준다. 류 회장은 “생산자 중심의 제조업 마인드를 버리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며 “제도와 프로세스 변화는 쉽지만,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건 어렵다. 창조적 사고로 세계 최고 전문회사의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류 회장은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는 경영인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다문화가정 아동들을 위해 1965년 설립된 한국펄벅재단을 오랜 기간 후원하며 이사장직까지 맡아 인도주의와 박애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2010년 발생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으로 부상했던 해병대원 6명을 채용하기도 했다. 류 회장은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장병들을 국가가 예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업도 이들에게 일자리 제공 등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모교인 서울대가 노천강당 신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들 몰래 50억 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한국전쟁 참전 기념공원에 조성된 ‘전사자 추모의 벽’ 건립에 110만 달러(약 14억3000만 원)를 후원했다.

◇‘재계 맏형’ 조직 재건에 나서 = 류 회장은 옛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된 이후 곧바로 과거 위상을 되찾기 위한 조직 재건에 착수했다. 여기에는 2001년부터 옛 전경련 부회장을 20년 이상 지내면서 조직에 대한 이해도가 누구보다 깊고 한국무역협회 부회장,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등 여러 경제단체에서 쌓은 풍부한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류 회장이 가장 먼저 한 개혁 작업은 국정농단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것이었다. 전경련의 명칭을 한경협으로 교체하고 곧바로 지난달 윤리위원회를 구성했다. 류 회장은 윤리위원회에 정경유착 등의 고리를 차단하는 내부 통제 기구로의 역할을 부여했다. 그는 “어두운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잘못된 고리는 끊어내겠다”며 “신설되는 윤리위원회는 단순한 준법 감시의 차원을 넘어 높아진 국격과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엄격한 윤리의 기준을 세우고 실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으로 한경협이 조성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기금은 모두 윤리위원회의 심의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혁신 작업에 있어 김창범 한경협 상근 부회장은 류 회장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김 부회장은 한경협 ‘살림’을 책임지며, 류 회장과 함께 조직 혁신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투명성을 위한 류 회장의 작업이 성과를 나타내면서 탈퇴했던 국내 4대 그룹도 다시 회원사로 가입했다.

글로벌 싱크탱크로서의 기능도 대폭 강화하고 있다. 류 회장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국제 정세 불안 등 변화하는 글로벌 시장에서 국내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튼튼한 싱크탱크가 필요하다고 봤다. 류 회장이 모델로 삼은 것은 어느 이념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날카로운 분석과 정보를 제공해 주는 미국의 대표적인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였다. 류 회장은 CSIS 이사를 맡고 있다. 류 회장은 “(한경협은) CSIS처럼 중립적인 시각에서 다양한 분야를 다루는 싱크탱크 기능을 수행할 것”이라며 “연말까지 주요 해외 싱크탱크와 세미나·심포지엄 등을 공동 개최하고, 상호 소통·협업 시스템을 구축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재계 진두지휘 = 류 회장은 한경협 회장 취임 이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한경협 출범 50여 일 동안 류 회장은 현충원에서부터 사우디아라비아까지 숨 가쁜 행보를 이어오고 있다. 주요 회원사와 다양한 회의를 통해 회원사 규모를 키우고, 한경협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설정했다.

경제 외교 분야에서도 두드러진 행보를 보이고 있다. 류 회장이 취임 후 처음 참석한 국제행사는 폴란드 ‘크리니차 포럼’이었다. 한덕수 국무총리 등 정부 인사와 20여 개 기업이 참여하는 민·관 합동 한국 사절단을 이끌고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과 방위산업,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 기업과 폴란드가 협력할 수 있는 부문을 논의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사우디·카타르 국빈 방문 당시에는 중동 경제사절단을 구성해 21조 원이 넘는 규모의 공사 수주와 업무협약(MOU)을 끌어내는 데 이바지했다.

■ 류 회장의 인맥…

부시 가문·오바마와 친분
파월 前장관 자서전 번역
대미외교 ‘막후조정’ 역할

류진 한국경제인협회 회장의 인맥은 ‘마당발’이란 표현이 부족하다. 특히, 미국 거물들과의 인맥은 깜짝 놀랄 정도로 화려하다. 한국 기업인 중에서는 류 회장이 가장 깊은 최고의 미국 인맥을 가진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류 회장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 내외 및 그의 아들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 친분이 깊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2003년,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을 한국에 초청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등 노무현 정부 당시 대미 외교와 관련해 막후 조정자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2008년 3월 아들 부시 대통령 내외를 초청해 당시 취임 보름가량 지난 이명박 대통령 내외와 배석자 없는 관저 식사를 주선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훗날 부시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으로까지 이어져 한·미 관계를 격상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부시 가문과 끈끈한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류 회장의 부인인 노혜경(63) 여사의 공이 컸다는 후문이다. 노 여사는 고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둘째 딸로, 장인인 노 전 총리가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류 회장을 연결해 주면서 친분을 쌓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2019년 고 노무현 대통령의 10주기 행사에 아들 부시 전 대통령이 초대를 받아 방한했을 때, 부시 전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의 초상화와 함께 류 회장의 초상화를 그려서 가져올 정도였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다. 2011년 10월 당시 한·미 단독 정상회담이 개최됐을 때 류 회장이 국빈만찬에 초대돼 참석하기도 했다. 2008년 오바마 대통령 당선 초기,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과 앨 고어 부통령의 한국 방문을 류 회장이 성사시킨 것도 잘 알려진 이야기다. 류 회장은 파월 전 장관의 자서전인 ‘나의 미국여행(My American Journey)’을 직접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파월 전 장관의 이름을 딴 뉴욕시립대 내 리서치센터인 ‘Colin Powell School for Civic and Global Leadership’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하다. 2020년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이사회 이사에 추천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당시 존 햄리 CSIS 소장과도 두터운 친분을 쌓게 된다. 햄리 소장은 “CSIS는 류 회장의 글로벌 시각과 혁신적인 정신에 많은 도움을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로런스 서머스 전 재무장관, 리언 패네타 전 국방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 등도 류 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미국 정계 인사들이다.

임대환 기자 hwan91@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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