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 높은 마라톤화… 오븐 장갑 모양 도루 글러브

이영빈 기자 2023. 11. 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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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백과사전] 진화하는 스포츠용품

최근 세계 스포츠계 최대 화두는 단연 마라톤의 ‘서브2′(2시간대 이하 기록)였다. 지난달 8일 케냐 남자 마라톤 선수 켈빈 킵툼(24)이 2시간00분35초로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서브2는 마라톤 역사에서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는데, 어디선가 등장한 젊은 선수가 한계를 넘어설 준비를 마친 것이다.

이목이 집중됐던 건 킵툼의 신발이었다. 킵툼은 내년 발매 예정인 나이키 알파플라이3(가칭)를 신고 뛰었다. 마라톤용 신발 바닥은 밑창, 중창, 깔창 세 겹으로 이뤄져 있다. 알파플라이3는 중창 부위에 두꺼운 카본 플레이트(탄소섬유판)를 삽입하는 신기술로 만들어졌다. 카본 플레이트는 철보다 5배 정도 단단하면서도 유연해 다리 부하를 줄여준다. 과거에는 무게 탓에 얇은 탄소섬유판을 썼는데, 나이키가 가벼우면서도 두꺼운 탄소섬유판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래픽=백형선

종전 신기록 보유자 엘리우드 킵초게(39·케냐)는 2019년 이 신발의 시초격인 나이키 알파플라이1의 시제품을 착용하고 거뜬히 ‘서브2′를 넘어선 1시간 59분 40초 기록을 세웠다. 이 운동화에는 탄소섬유판 네 장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한 장만 허용하는 세계육상연맹 규정에 따라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스포츠 과학 기술에 따라 선수의 역량이 얼마나 극대화되는지 보여줬다. 그 뒤 이윽고 나이키가 탄소섬유판 한 장만으로도 네 장 효과를 내는 신발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난달엔 에티오피아 여자 마라톤 선수 티지스트 아세파(27)도 비슷한 신발을 신고 여자 신기록 2시간 11분 53초를 세웠다.

지난 달 8일 시카고 마라톤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운 케냐의 킵툼. [AFP 연합뉴스]

선수들이 흘리는 땀만큼이나 스포츠 과학 기술자들도 더 나은 장비를 만들기 위해 온 관심을 쏟는다. 몇몇 프로야구 선수는 출루한 뒤 오븐 장갑처럼 생긴 장갑을 손에 착용한다. 손가락을 넣는 곳이 없는 이 장갑은 슬라이딩 시 손가락 부상을 방지해 준다. 이 합성고무 장갑은 일반 장갑보다 두툼하다. 슬라이딩할 때 손가락이 베이스에 부딪혀 꺾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손가락 끝부분이 특히 푹신하게 제작됐다.

주루용 장갑을 처음 낀 선수는 2013년 뉴욕 양키스에서 도루로 유명했던 브렛 가드너(40·FA). 가드너는 2009년 슬라이딩을 하다가 왼쪽 엄지를 다친 이후로 부상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고, 이를 없애기 위해 고민하다가 주루 장갑을 만들어냈다. 그 뒤 유행처럼 퍼져나가 많은 선수가 장갑을 꼈다. 그 탓에 미국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레딧’에는 ‘왜 선수들이 오븐 장갑을 끼고 있느냐’는 질문이 주기적으로 올라온다. 올 시즌 38도루를 해낸 김하성(28·샌디에이고 파드리스)도 종종 쓴다. 선수용 장갑 가격은 10만~15만원 정도다.

지난달 3일 경기에서 홈으로 들어오는 필라델피아 필리스 타자 브라이스 하퍼. 왼손에 도루용 장갑을 꼈다. [USA투데이 연합뉴스]

한국에서는 2016년부터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이 쓰면서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키움 히어로즈는 장갑 10개 정도를 구매해 공동으로 쓴다고 한다. 일부 선수는 한 발 더 나아가 장갑을 손보다 조금 길게 빼 베이스에 먼저 닿게 하는 ‘꼼수’를 썼다. 이에 한국야구위원회(KBO)는 2022년 주루용 장갑의 최대 길이를 30㎝로 제한했다.

쇼트트랙에선 손가락 끝에 둥근 플라스틱이 붙은 장갑을 볼 수 있다. 쇼트트랙은 코스 111.12m 중 반절가량(약 53m)이 곡선이다. 이 구간에선 몸이 원심력 때문에 트랙 바깥쪽으로 밀려난다. 그래서 거의 눕듯이 몸을 트랙 안쪽으로 기울이는데, 이때 빙판에 손을 짚으면서 마찰력이 생긴다. 너무 세게 짚으면 마찰력 때문에 속도가 줄어들어 선수들은 그 균형을 잡느라 애를 먹었다.

지난달 28일 쇼트트랙 월드컵에서 경쟁하는 선수들. 왼손에 다들 개구리 장갑을 꼈다. [AP 연합뉴스]

1988 캘거리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있던 김기훈(51·현 울산과학대 교수)도 골머리를 앓던 선수 중 하나였다. 기술뿐 아니라 장비도 고민이었다. 장갑에 비닐 테이프를 감는 등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방법을 찾았다. 당시 스케이트화 발목 부분의 고정력을 높이기 위해 사용했던 에폭시(epoxy) 액을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장갑 손가락 끝부분에 발랐다. 에폭시는 접착제 등으로 쓰이는 물질이다. 에폭시가 굳자 장갑 끝부분이 딱딱해져서 일반 장갑보다 적은 마찰력으로 코너를 매끄럽게 돌 수 있었다. 딱히 규정을 어긴 것도 아니었기에 김기훈은 캘거리 대회에서 첫선을 보였고, 1992 알베르빌 대회에서 이 장갑을 끼고 2관왕에 올랐다. 개구리 앞발 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른바 ‘개구리 장갑’이라 불린다. 현재는 플라스틱 방울을 붙인다. 쇼트트랙 선수 중 착용하지 않는 선수가 없을 정도로 대중적인 장비가 됐다.

전통에서 해법을 찾기도 한다. 장미란(40·현 문체부 차관)은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옛날에 자주 사용하던 나무 뒷굽 역도화를 신고 나왔다. 당시 선수들이 많이 쓰는 가죽이나 고무 재질 대신이었다. 충격 완화가 되지 않는 딱딱한 나무 재질이 장미란의 몸에 힘을 그대로 실어줄 수 있다는 이유. 또, 장미란은 중학교 때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 근력이 미세하게 떨어졌다. 이에 굽의 높이를 살짝 다르게 해야 했는데, 세밀한 조정엔 나무 재질이 최적이었다. 세계역도연맹은 신발의 높이가 13㎝가 넘지 않게만 제한할 뿐, 재질에 대한 규정은 없다. 장미란은 나무 뒷굽과 함께 베이징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장미란의 역도화. 뒷굽에 나무가 들어있으며, 신발을 발과 고정시키기 위한 별도 스트랩이 달려있다. [조선일보DB]

과도한 기술 발전은 선수들의 열정을 가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이언 소프(41·호주)가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전신 수영복을 입고 나와 3관왕에 올랐다. 물과 마찰력이 가장 덜하고 부력도 제공하는 소재인 폴리우레탄을 사용하고, 표면을 프라이팬에 사용하는 재질인 테프론으로 코팅, 상어 피부와 비슷하게 만든 옷이었다. 이에 세계 수영계는 너나 할 것 없이 전신 수영복을 입었다. 그 뒤로 세계 신기록이 쏟아졌다.

급기야 자유형 200m 세계 랭킹 9위였던 파울 비더만(37·독일)은 2009 로마 세계선수권에서 전신 수영복을 입고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38·미국)의 주종목인 200m에서 세계 신기록(3분 40초 07)을 깨면서 우승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그전까지 2008년 유럽 선수권 우승 경험만 있을 뿐 세계 무대에서는 입상한 경험이 없는 선수였다. 펠프스는 당시 “이건 수영이 아니다”라고 했다. 선수끼리 경쟁이 아니라 사실상 ‘수영복 대결’로 변질됐다는 비난이 일었다. 결국 국제수영연맹은 2009년 직물(織物) 수영복만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면서 첨단 수영복을 퇴출시켰다.

그러나 상흔은 남았다. 현재 남자 자유형 6종목 중 쑨양(32·중국)이 2012년 세운 1500m 기록(14분 31초 02)을 제외한 세계 신기록 5개가 그 당시에 세워졌다. 비더만의 기록 역시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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