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 <31>]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어디고 인간 세상 좋은 시절은 언제인가

홍광훈 2023. 11. 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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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안견(安堅)이 그린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에서 본 무릉도원을 말해주어 그렸다고 전해진다. 일본 덴리(天理)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동진(東晉) 태원(太元·376~397) 때 무릉(武陵)의 한 어부가 배를 타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꽃이 만발한 복숭아 숲을 만났다.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계속 노를 저었다. 숲이 끝나는 곳에서 물길도 끝났다. 앞을 가로막은 산 밑에 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동굴이 있었다. 호기심에 배에서 내려 들어갔다.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았으나 몇십 걸음 가자 눈앞이 훤해지며 한 마을이 보였다. 그곳에는 문전옥답과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고 닭과 개 소리도 들렸다. 논밭 일 하는 남녀의 옷차림도 외부와 다름없었다. 노인과 아이들도 모두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중 한 명이 낯선 사람을 보자 놀라면서도 반가워하며 집으로 데려가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이것저것 물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진(秦)나라 때의 난리를 피해 이곳에 와서 숨어 살게 된 사람들의 후손이었다. 수백 년 동안 바깥으로 나가지 않아 지금이 어느 시대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번갈아 어부를 집으로 초대했다. 며칠 뒤 어부가 작별을 고하자 그중 하나가 “여기는 바깥사람들에게 말할 만한 곳이 못 되오(不足爲外人道也)”라고 당부했다. 동굴 밖으로 나온 어부는 돌아오면서 곳곳에 표시를 해두고 바로 태수를 찾아가 이런 곳이 있다고 알렸다. 태수가 어부에게 사람을 딸려 보내 그곳을 찾게 했으나 길을 잃어버렸다.

홍광훈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도연명(陶淵明·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 이야기다. 그 전집에 장편의 ‘도화원시’와 함께 실려 있다. 도연명이 지은 것인지 전해오는 이야기를 듣고 옮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넓은 중국 땅 어디엔가 충분히 있을 만한 마을이다. 특별히 신기할 것이 없는 이 이야기의 요지는 그곳 사람들이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평화롭고 안락하게 잘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은 후대에 도연명의 명성과 함께 갈수록 유명해져 지상의 낙원이나 이상향(理想鄕)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게 됐다.

완조(阮肇)와 유신(劉晨)의 이야기도 다시 찾을 수 없는 행복한 공간을 그리고 있다. 남북조시대 송(宋)의 유의경(劉義慶)이 지은 ‘유명록(幽明錄)’에 실려 전한다. 둘은 산에서 약초를 캐다가 길을 잃고 헤매던 끝에 아리따운 두 여인을 만난다. 여인들은 둘을 집으로 초대한다. 그 뒤 그들은 각각 결혼해 신선과도 같은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반년쯤 지난 뒤 둘은 집안이 걱정돼 잠시 작별하고 산에서 내려온다. 집에 가보니 가족이 모두 없어지고 동네에는 아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미 몇 세대가 지난 뒤였다. 둘은 슬퍼하며 다시 산으로 들어가 여인들을 찾았으나 행방이 묘연했다. 후대에 이를 소재로 ‘완랑귀(阮郎歸·완씨 낭군이 돌아오다)’라는 악곡이 만들어지고, 사패(詞牌)로 널리 애용됐다. 명(明)나라 초에는 ‘유신완조오입도화원(劉晨阮肇誤入桃花源·유신과 완조가 도화원에 잘 못 들어가다)’라는 희곡도 만들어졌다.

같은 시기의 임방(任昉)이 지은 ‘술이기(述異記)’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보인다. ‘난가(爛柯·도낏자루를 썩히다)’의 고사다. 왕질(王質)이 땔나무를 베러 도끼를 들고 산으로 들어갔다. 산중에서 동자들이 바둑을 두며 노래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노랫소리가 좋아 가까이 가서 들었다. 한 동자가 대추 알 같은 것을 주었다. 이를 받아먹었더니 배가 고프지 않았다. 잠시 후 동자가 왜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왕질이 일어나 도끼를 보니 이미 자루가 다 썩어 있었다. 그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으나 온 동네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우라시마타로(浦島太郎)’라는 일본의 민간 설화도 이런 이야기다. 바닷가에 살던 주인공이 아이들이 잡아서 놀던 거북이를 가엽게 여겨 돈을 주고 사서 바다로 돌려보냈다. 며칠 뒤 거북이가 나타나 은혜를 갚겠다며 주인공을 태우고 용궁(龍宮)으로 간다. 거기서 공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즐거운 나날을 보내다가 집안이 걱정된 주인공이 돌아가려 하자 공주가 열면 안 된다고 당부하며 옥 상자 하나를 건네준다. 집으로 돌아오니 가족은 모두 사라졌고 마을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사이 너무 긴 세월이 흐른 것이다. 슬픈 나머지 무심코 상자를 열자 흰 연기가 피어나오며 그는 백발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으로 변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이상세계를 꿈꾸는 까닭은 현실에 대한 절망과 반감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정치적 모순이나 사회의 타락과 부패, 전쟁 등 인위적 환란이나 자연재해 그리고 세상살이에서의 좌절과 불만 등이 요인이다.

‘시경(詩經)’의 ‘석서(碩鼠)’ 편은 부패한 위정자의 수탈을 견디지 못한 백성이 괴로운 현실을 벗어나 ‘낙토(樂土)’로 가고 싶다는 갈망을 그렸다. “큰 쥐야, 큰 쥐야, 내 기장 먹지 말라. 세 해 동안 너에게 내주었는데, 나를 돌아보려 하지 않는구나. 네가 있는 여기를 떠나 저 낙토로 가야겠다. 낙토여, 낙토여, 거기서 내 살 곳을 얻으리라(碩鼠碩鼠, 無食我黍. 三歲貫女, 莫我肯顧. 逝將去女, 適彼樂土. 樂土樂土, 爰得我所).”

이러한 현실 정치에 대한 불만에서 상고시대의 요순(堯舜)이 등장했다. ‘논어(論語)’나 ‘맹자(孟子)’ 등에서 그 이상세계를 동경하고 있다. 황보밀(皇甫謐·215~282)이 지은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그때의 시가로 전해진다는 ‘격양가(擊壤歌)’가 실려 있다. “해가 나오면 농사짓고, 해가 들어가면 쉰다네. 우물 파서 마시고, 밭 갈아서 먹으니, 제왕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 있으리오(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飲,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 훌륭한 위정자 밑에서 걱정 근심 없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내용이다.

유가 경전 ‘예기(禮記)’의 ‘예운(禮運)’ 편에는 ‘대동(大同)’이 언급돼 있다. 사회가 안정되고 평화로워 모든 사람이 걱정 없이 다 함께 잘 사는 이상세계를 뜻한다. 근현대의 학자 겸 정치가 캉유웨이(康有爲·1858~1927)는 이 이상세계의 구체적인 모습을 상상해서 묘사한 ‘대동서(大同書)’를 펴냈다.

‘노자(老子)’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을 이상세계로 보았다. 세상의 모든 나라가 작고 국민이 적으면서 서로 왕래하지 않으면 다툼이 없어 함께 평화롭고 행복하게 잘살 수 있다는 주장이다. ‘장자(莊子)’는 ‘소요유(逍遙遊)’ 등 여러 편에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안락한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을 꿈꿨다.

전국시대 말기에는 신선 사상의 유행으로 중국의 동해에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灜洲)의 ‘삼신산(三神山)’이 출현했다. 이를 믿은 사람도 적지 않았다. 진시황(秦始皇)까지 현혹돼 불로초를 구하려고 애를 썼다는 역사 기록이 전해진다.

후한(後漢) 이후로 발전한 도교(道敎)도 이상향을 추구하는 염원에서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당(唐)나라 때는 이에 심취한 사람이 많았다. 유명한 인사 중에 도사가 되어 이상향을 찾겠다고 산속으로 들어간 이들도 있었다. 이백(李白) 또한 젊은 시절 유행을 좇아 여러 명산을 돌아다녔다. 그의 유명한 시 ‘산중문답(山中問答)’도 그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에게 무슨 뜻으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물으면, 웃으며 대답하지 않으니 마음이 절로 한가롭다. 복숭아꽃이 물을 따라 아득히 흘러가니, 인간 세상 아닌 별천지가 여기에 있네(問余何意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 桃花流水杳然去, 別有天地非人間).”

일본에서는 예부터 낙원이나 이상향을 가리키는 ‘마호로바(まほろば)’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렸다. 훌륭한 곳 또는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의 고어다. 이 말은 712년에 편찬된 ‘고지키(古事記)’에 실린 한 편의 와카(和歌)로 유명해져 오늘날에도 널리 쓰인다. 철도나 버스의 노선을 비롯해 호텔이나 료칸(旅館) 등의 이름에 자주 붙여지며 예술 분야에서도 애용된다. 그만큼 이상향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다.

그러나 고대로부터 많은 철인이나 식자에 의해 생겨난 각양각색의 이상향은 모두 동경과 갈망에서 빚어진 허구와 환상의 세계일 뿐이다. ‘유토피아’의 뜻이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다 함께 평등하고 행복하게 잘 산다는 대동 세계나 공산 사회 또한 물론이다.

요컨대 이상향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서 즐거움을 느낀다면 자기가 사는 곳이 바로 낙원이며 이상향이다. 남송(南宋)의 선사(禪師) 무문혜개(無門慧開)가 지은 다음의 시가 이런 이치를 말해 준다고 하겠다.

“봄엔 백화가 만발하고 가을엔 밝은 달이 뜬다. 여름엔 서늘한 바람이 불고 겨울엔 눈이 온다. 쓸데없는 일 마음에 걸려 있지 않다면, 그때가 바로 인간 세상 좋은 시절이리라(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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