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숨은 명산 합천 악견산] 600m급이지만 이름대로 '악'소리

김재준 '한국유산기' 작가 2023. 10. 3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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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능선과 합천호 전경

땡볕에 주차장은 후끈 달았지만 불어오는 강바람에 어느덧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돌부리를 넘는 물소리, 아직 풋풋한 갈댓잎과 달뿌리풀, 매미와 풀벌레 소리 모여 가을 강을 만들고 있다.

아침 8시 반, 악견산·의룡산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 닿으니 절집의 염불 소리. 개 몇 마리 연신 졸졸 따라오며 걸음을 훼방 놓는다. 스님인지 처사인지 웃통 벗은 채 때려주라고 하지만 꼬리 흔드는데 어떻게 박대할 수 있나. 절집보다 산길이 더 오래됐는지 법당 앞으로 등산로 팻말을 따라가야 한다. 뒤쪽 바위에서 폭포처럼 물이 쏟아지는데 요란하던 염불은 물소리에 묻혀버렸다.

오전 9시 갈림길(악견산 1.7·해탈바위0.1km) 주변에 연분홍 꽃을 피운 누리장나무는 누린내가 진동한다. 상수리나무 아래 널따란 바위는 도 닦기 좋은 터, 세상의 물욕을 잊고 면벽 수도할 수 있다면 호사라 할 것이다. 바위마다 실사리·돌이끼, 빨간 열매를 매단 대팻집나무도 소나무만큼이나 연세가 만만찮다. 악견岳堅은 굳은 멧부리, 이름값을 하는 험한 바위산 올라가는데 땀이 흘러 물을 뒤집어쓴 듯하다.

등산로 입구.

8부 능선에 서면 합천호가 그림처럼

해발 634m 악견산岳堅山은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에 있는 바위산으로 발아래 황강이 흘러간다. 정상에서 내려가면 산성 터가 있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바위에 구멍을 뚫어 붉은 옷을 입힌 허수아비를 매달고 달밤에 줄을 당겼다 놓았다 하니 홍의장군(곽재우)인 줄 알고 왜적들이 겁을 먹고 달아났다는 얘기가 있다. 8부 능선에 올라서면 합천호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정상을 지나면서부터 바위산 아래 댐, 유람선, 의병기념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산행은 악견산·의룡산 주차장(용문사, 2코스)에서 정상을 거쳐 산성 터 따라 내려서면 도로변 악견산 주차장(3코스),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데 5.5km·4시간 남짓 걸린다. 험한 바위산이므로 실족 사고에 각별 주의해야 한다. 남쪽의 금성산(592m)·허굴산(682m)과 아울러 대병大幷 삼산三山으로 알려져 있다.

법당 앞으로 지나가는 등산로.

소나무 산길 가장자리마다 쪽동백·생강나무 어린나무들이 많이 올라왔는데 가만히 보니 등산로 정비사업을 한 것인지 소나무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조리 벴다. 드문드문 형질이 우수한 넓은 잎나무들을 키웠더라면 좋았을 텐데 올라갈수록 더하다.

우리나라 숲은 잎이 넓은 활엽수보다 소나무 같은 침엽수가 얼추 10%가량 많다. 소나무를 우대하고 활엽수는 쓸데없는 것으로 인식해 땔감으로 많이 써 왔던 탓이다. 소나무를 최고로, 그 외는 모두 잡목으로 천시했다. 나무 종류도 균형을 맞춰주지 않으니 산불에 취약하고 숲의 생태계에도 바람직하지 못한 것 아닌가? 활엽수를 잡목이라 하지 말고 합당한 이름을 불러줘야 할 것이다. 딱총·물푸레·쪽동백·생강·대팻집나무, 정겨운 이름 가진 우리 나무들.

오전 9시 반 너럭바위 쉼터(악견산 1.2·용문사 1.2km). 곧추선 바위산 경사는 대개 50~60도 될 것인데 이름대로 '악' 소리 나는 산, 바위의 노간주나무는 굵어서 마치 향나무 같다. 새소리 들리는 나무 사이로 흘러가는 강을 안고 산은 서북쪽을 바라보며 섰고 얼굴에는 땀이 뚝뚝 듣는데 마냥 흘리기로 했다. 건너편 산마다 첩첩이 하늘·구름과 닿아 있다. 시립侍立하는 듯, 읍揖하는 듯 산들은 저마다 공손한 형상이다. 좁은 산골짜기 냇가, 합천陜川은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계곡이 많다는 뜻으로 여긴다. 물 한 잔 마시고 곧바로 갈림길(의룡산 2·악견산 0.8km)에 선다.

악견산 산성 터.

나무보다 바위가 더 많은 산

이 산은 나무보다 바위가 더 많고 소나무 줄기에 이끼가 붙어 옛 정취가 묻어난다. 오전 9시 45분, 지금부터 산 너머 서쪽으로 합천호가 보이는데 옆으로 오도산, 가야산이 우뚝하다. 습관처럼 정상을 향해 내닫는 등산화를 내려본다. 주인을 잘못 만나 많이도 헐거워졌다. 바위에 실사리 파랗게 붙어살고 소나무 혹병으로 부르는 부엉이 방귀나무를 지나 어느덧 갈림길(악견산 정상 0.3·의룡산 2.5·용문사 2km) 표고점 492m, 10시다.

정상 오르는 바위와 소나무 길.

맴맴 찌르르 지지배배 온갖 풀벌레와 새들, 계절을 재촉하는 자연의 소리를 듣는다. 확실히 가을은 매미, 풀벌레와 같이 온다. 뭉게구름도 파란 하늘 다 차지하고 있다. 곧바로 바위 오르막길인데 사람주나무 잎을 바라보다 발아래 군데군데 으스스한 바위굴, 어설픈 날씨에는 몇 사람 들어가 비긋기 좋겠다. 디디는 곳은 철제 계단을 받쳐 튼튼하게 만들어 놨다. 밧줄은 금방 손상되어 부스러기까지 생겨 불편할뿐더러 내구성도 약하지만 쇠사슬은 바위산에 잘 맞는 재질이라 여긴다.

뒤를 보니 황강이 휘돌아 치고 발아래 강원도 고원 같은 산골 마을인데 '노약자 외출을 삼가라'는 폭염특보 방송이 흘러나온다. 개 짖는 소리, 매미 소리, 자동차 질주 소리, 정상까지 360m 표지판이 잘못됐다고 여기는데 갑자기 시커먼 모기가 왱왱거리며 달려든다. 바위 벼랑이라 힘들고 지루해서 멀게 느껴진대도 1km 이상 될 것이다.

악견산 정상 표석.

악견산 정상에 다 온 것 같은데 다시 내려간다. 여기저기 먹이를 찾은 듯 멧돼지가 산길을 파헤쳐 놓았다. 긴 주둥이로 땅을 뒤져 나무와 풀뿌리까지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운다. 멧돼지가 뒤진 땅 주변에는 으레 둥굴레·더덕·원추리·버섯 등 산·약초가 많다. 개체수도 많아졌다지만 인간들에게 서식지를 빼앗겨 종종 민가 근처까지 출몰하기도 한다.

합천호와 산성 터, 의병의 아버지 남명 조식

바위 사이로 돌을 쌓은 산성 터. 때죽·노각나무 풋풋한 열매를 바라보다 10시 20분경 해발 634m 악견산 정상(의룡산 2.6·용문사 1.9·댐운동장 1.4·댐주차장 1.5km). 사람주나무는 표지판과 같이 바위에 서 있다. 기암괴석 켜켜이 쌓인 바위츠렁 너머 산마을, 강줄기, 산중호수에 양식장 같은 시설이 띄엄띄엄 떠 있는데 수상 태양광 패널이다. 그때의 붕어·잉어·메기는 지금도 잘살고 있는지? 합천호는 낙동강 지류인 황강黃江을 막아 1988년 댐을 만들면서 생긴 인공호수다. 높이 96m·길이 472m·넓이 25㎢ 정도, 호반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의병 창의사에서 바라본 악견산.

젖꼭지 같은 사람주나무 열매를 남겨두고 돌비알 산성 터를 따라 조심조심 발을 딛는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이 맨손으로 쌓았을 돌마다 빛바랜 이끼가 하얗게 덮여 치열했던 악견산성 전투의 애환을 알려주는 듯하다. 이 지역 의병대장이 정인홍이었는데 합천을 중심으로 최초 1,000명이 창의倡義, 나중에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임진왜란을 맞아 곽재우·정인홍·김면 등 조식 선생의 제자 50여 명이 의병장이 되어 국난 극복의 선봉에 섰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1501년 합천 삼가 외토 출생, 벼슬을 마다하고 실천하는 선비의 학풍을 세웠다. 지리산 아래 산천재를 짓고 학문과 인재 양성에 전념한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행동하는 선비의 사표로, 칼 찬 선비, 의병의 아버지로 불린다. 실사구시의 실학, 구한말 의병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조정의 부패 척결을 설파한 단성소丹城疏가 유명하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됐다.

의병 창의 기념탑.

귀 기울여보면 여전히 풀벌레와 온갖 새소리, 바람은 이파리 흔들며 팔락팔락한다. 산성 터를 내려가며 합천댐과 의병 창의탑, 선착장, 유람선을 바라본다. 자칫 발아래 풍경에 긴장을 놓았다간 불분명한 바위 산길에 넘어져 다칠까 염려되는 구간이다. 내리막길 철계단을 지나 초콜릿·자두·건빵·물, 간식을 먹으며 바위에 앉아 쉰다. 산 아래서 불어오는 강바람 맞으며 소나무 그늘에 땀을 식히니 구름 위로 날아갈 듯. 나무·풀·호수의 초록빛과 파란 하늘, 하얀 뭉게구름까지 어우러졌으니 별유천지別有天地 아닌가?

돌너덜길 한참 내리 걸어 11시경 소나무 숲길, 시멘트 통나무계단이 주변과 이질적이지 않아서 좋다. 봉안묘를 지나 도로변 악견산 주차장(악견산 정상 1.5·용문사 2.2km)에 다 내려왔다. 정오 무렵. 어림잡아 원점까지 2km 남짓, 평지일 경우 1시간에 4km 걸을 수 있으니 30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다. 강줄기 따라 생긴 아스팔트 길을 콧노래 부르며 걷는다. 며칠 동안 비가 많이 내렸는지 수로에는 물이 콸콸 흐른다. 한낮의 땡볕을 염려했지만 벚나무 가로수 그늘까지 시원하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구간은 지나는 계절의 선물인 듯. 물에 빠진 산과 나무들도 모두 초록이 되어 흘러간다.

산행길잡이

악견산·의룡산 주차장(용문사, 2코스) ~ 용문사(법당 앞) ~ 의룡산 ~ 악견산 갈림길 ~ 바위길 쇠사슬 구간 ~ 악견산 정상 ~ 산성 터 (3·4코스 갈림길) ~ 바위능선 ~ 철계단 내리막길 ~ 도로변 악견산 주차장(3코스) ~ 군도 12호선 도보(모토라드 캠프장) ~ 주차장(원점회귀)

※ 왕복 5.5km·4시간 정도, 주차장 주차료 없음.

교통

광주대구고속도로 고령IC(하차) → 쌍림·합천 방면 → 합천 방면(33번국도) → 합천읍 경유 → 대병면 → 악견산·의룡산 주차장(용문사)

※ 내비게이션 → 악견산 주차장,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합천호수로 584-14(성리 산18-1)

※ 대중교통 불편

숙식

합천 읍내, 합천댐 근처에 다양한 식당과 모텔이 많음(읍내 청학동 식당).

남명 조식 생가.

주변 볼거리

합천호, 의병 창의사, 조식 생가, 황매산, 가야산, 해인사 등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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