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표정으로 묻는다 ‘국가는 무얼 하고 있었냐’고

한겨레 2023. 10. 2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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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이태원 참사][한겨레S]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다큐 인사이트 이태원
최초 신고 3시간 동안 수수방관
희생자 부당하게 공격하는 세상
딸·친구·연인 잃은 이들의 회한
“놀러 다니다 죽을 필욘 없잖아요”
다큐인사이드 이태원. KBS 유튜브 채널 갈무리

다큐멘터리는 밝고 경쾌한 톤으로 시작한다.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기록한 홈비디오 영상으로 시작된 다큐멘터리는,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청춘, 한강변에서 친구와 망중한을 즐긴 순간을 기록한 영상, 여행지 기념사진, 친구들과 조기 축구를 즐기는 모습 등 수많은 젊은이들의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록들을 빠른 속도로 훑고 지나간다. 화면 한켠에는 그 즐거운 청춘들의 이름이 적힌다. 그러고는 암전. 검은 화면 위에 “10·29 이태원 참사 생존자의 증언이 있습니다. 참사 현장에 대한 시각적 묘사와 소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라는 자막이 떠오른다. 지난 26일 한국방송1(KBS1)을 통해 방영된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 다큐멘터리, 다큐인사이트 ‘이태원’이다.

희생자 행복했던 일상 복원한 이유

희생자들의 밝았던 모습으로 문을 여는 건 이런 종류의 다큐멘터리에서 종종 쓰이는 기법이다. 희생자들에 관한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함으로써 감정이입을 유도해 사건의 비극성을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으니까. 다큐인사이트 ‘이태원’은 더더욱 그런 방식으로 문을 열어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을 것이다. 다양한 국적과 정체성의 소유자들이 한동네에 모여 있는 유흥가라는 지역적 특성상, 이태원은 다분히 일상에서 유리된 특이한 공간으로 인식되곤 한다. 그런 곳에 외국의 명절을 즐기겠다고 비일상적인 옷차림과 분장을 하고 놀러 나간 젊은이들. 그런 까닭에 10·29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은 종종 “누가 거기 가라고 등 떠민 것도 아니고, 이상한 동네에 놀러 나갔다가 죽은 애들을 왜 추모해야 하느냐”는 식의 부당한 공격을 당하곤 한다. 다큐인사이트 ‘이태원’은 희생자들의 행복하고 싱그러웠던 일상을 화면 위에 복원한다. 그저 막연한 숫자와 이름으로만 존재해 더 손쉬운 공격의 대상이 되곤 했던 희생자들은, 이제 구체적인 실체가 되어 시청자의 뇌리에 박힌다.

한국방송1(KBS1) 다큐인사이트 ‘이태원’ 방송화면 갈무리.

이미 다큐인사이트 ‘여성 아카이브×인터뷰’ 시리즈를 통해 인화성이 있는 이슈를 담담하지만 강렬하게 담아낸 바 있는 이은규 피디는, 이번에도 같은 문법으로 10·29 이태원 참사의 그날을 차근차근 되짚는다. 내레이션을 배제한 채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 직접 경험을 전해 듣고, 아카이브 영상으로 서사를 풀어내는 방식의 객관적인 다큐멘터리 문법. 참사 생존자이자 사랑하는 연인과 친구를 잃은 병우와 주나, 딸을 잃은 아버지 성환, 고독한 서울살이를 함께 견뎠던 친구를 잃은 코린, 그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자 쉴틈없이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구조자 진욱이 카메라 앞에 앉는다. 주나는 자신의 친구 송채림이 꿈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었는지 회고한다. 4년여의 연애 끝에 연인 이주영과의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병우는 갑자기 왈칵 울음을 터뜨린다. 그날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골목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기 자리에서 꿈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던 청년,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소중히 키워가던 사람들이었다.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한 다큐인사이트 ‘이태원’은, 위험을 일찌감치 감지했던 이들의 112 신고 내역을 하나씩 짚어본다. 저녁 6시34분, 저녁 7시5분, 저녁 8시53분, 밤 9시, 밤 9시7분, 밤 9시51분…. 저녁 6시34분부터 밤 10시11분까지, 총 11건의 ‘압사’를 언급한 112 신고가 접수됐다.다큐인사이트 ‘이태원’은 조용하지만 서늘한 표정으로 국가에 질문한다. 안전인력을 배치해 참사를 막을 수 있었던 시간이 못해도 3시간은 있었는데,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었냐고. 시민들이 많이 모이는 걸 예측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대응하지 않았냐고. 인원 통제만 됐더라도, 일방통행만 했더라도, 도로 가운데에 중앙선만 있었더라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경찰은 왜 신고를 받고도 출동하지 않았냐고. 왜 아직도 누구 하나 나서서 “내 잘못이다, 미안하다, 우리들의 실수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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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의 희생자라도 더 보여주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으니, 책임은 살아남은 개인에게 전가된다. 주나는 자신이 채림을 데리고 이태원을 더 빨리 빠져나가지 않아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하고 자책한다. 그날 골목에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고 심폐소생술을 시행한 진욱은, 자신이 더 잘하지 못해서 더 많은 사람을 살리지 못한 게 아닐까 죄책감에 시달린다. 딸 상은을 잃은 성환은 딸의 전화를 더 기쁘게 받아주지 못한 걸 후회한다. 2년6개월간의 수험 생활 끝에 미국 공인회계사 자격증 시험에 붙었다고 전화했을 때, 회사여서 덤덤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자책한다. 생존자와 유가족이 자신을 책망하는 동안, 사회는 오히려 희생자들을 ‘놀러 나갔다가 죽은 사람들’이라 힐난한다. 자신이 주영에게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주영이 살아 있지 않았을까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병우는 말한다. “놀러 다닐 수 있잖아요. 놀 수 있는데, 그렇다고 죽을 필요는 없잖아요. 그게 너무 억울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과 살아남은 사람들이 비난을 당하는 세상 속에서, 친구를 잃은 코린은 말한다. “그날의 상황만 ‘이태원 참사’는 아닌 것 같아요. 이런 모든 상황이 아직도 저는 참사 속에 있는 것 같거든요.”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기에 아직도 참사는 끝나지 않았노라 이야기한 다큐인사이트 ‘이태원’은, 조금의 자투리 시간이라도 할애해 어떻게든 한명의 희생자라도 더 보여주려 노력한다. 이름이 공개된 115명의 희생자들과 여전히 익명으로 남아 있는 44명의 희생자들을 자막으로 기록한다. 그날 그 거리에서 스러져간 평범하고도 찬란했던 청춘들을 기억해달라고, 그들의 옆에 서달라고 말한다. 물론 46분짜리 다큐멘터리 한편을 봤다고 해서 충분한 애도를 했노라 말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애도의 시작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다큐멘터리의 시작에 인용된 김훈 작가의 말처럼 “피해자의 고통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것이 비극에 접근하는 입구”니까. 다큐인사이트 ‘이태원’은 오티티(OTT) 웨이브, 케이비에스플러스(KBS+)를 통해 다시 볼 수 있으며, 참사 1주기를 맞는 10월29일(일) 저녁 8시10분에 한국방송1 채널을 통해 재방송된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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