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나지 않아도…가을에 소임 다한 ‘폐쇄화’ [ESC]

한겨레 2023. 10. 2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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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식물학자S의 열두달 식물일기 피지 않는 난초꽃
손가락만 한 작은 키 산호란류
꽃잎 열지 않고 열매·씨앗 결실
자가수정 비법으로 자손 퍼뜨려
북미에서 자라는 산호란류인 ‘오텀 코럴 루트’. 이 난초는 키가 작고 줄기는 가늘며 꽃도 좁쌀 만하다.

꽃에 어떤 동물이 찾아오는지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실험방법은 단순하다. 그 꽃을 내내 지켜보고 있으면 된다. 이론적으로는 간단한데 실제 실험은 어떨까? 우리 실험실에선 이와 관련된 실험을 꽤 오랫동안 진행했고 며칠 전 그 결과가 나왔다. 야생 난초 근처에 오랫동안 카메라를 설치하고 기록된 동영상을 보며 찾아오는 동물을 일일이 확인한 것이다. 난초에 따라 어떤 동물이 오는지, 지역과 밤낮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기 위해 많은 카메라를 미국 동부 곳곳에 설치했다. 카메라는 비바람에 떨어지거나 꺼지기도 하고, 24시간 영상을 찍다 보니 건전지는 며칠을 견디지 못했다. 문제가 생기거나 건전지를 갈아야 할 때마다 숲 속에 있는 카메라를 찾아가야 했고, 문제없이 영상이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엄청난 양의 영상을 확인하는 건 더 막막한 일이었다.

꽃가루를 암술에 스스로 옮겨

이론은 단순하나 과정은 대장정이었던 이 실험의 결과는 아주 간단했다. 난초에 따라 헤아려진 동물의 수가 색색의 그래프로 완성되었다. 좀 허무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보다 명료한 결과도 없다. 나는 그 발표를 들으며 문득 내가 실험해야 할 난초가 동물을 거의 초대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 여겨졌다.

어떤 꽃들은 꽃가루를 옮겨줄 동물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런 꽃들은 대개 꽃이 생겨도 꽃잎을 꾹 다물고 피지 않는다. 어떨 땐 꽃잎조차 만들지 않는다. 이런 꽃들을 ‘폐쇄화’라고 한다. 폐쇄화는 곧바로 열매가 되고 씨앗을 맺는다. 폐쇄화는 자신의 꽃가루를 자신의 암술에 옮겨 자가수정을 하는 것이다. 동물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니 꿀이나 화려한 꽃잎처럼 동물의 관심을 끌 방법도 고민하지 않는다. 심지어 꽃잎을 펼치지도 않는 것이다. 폐쇄화를 만드는 식물은 정상적인 꽃도 함께 만든다. 대표적으로 땅콩과 제비꽃이 있는데 이들도 꽃잎을 꾹 닫은 폐쇄화와 활짝 꽃잎을 펼쳐 동물을 기다리는 정상적인 꽃, 두 종류의 꽃을 모두 가진다.

내가 실험하려는 난초는 ‘오텀 코럴 루트’(Autumn Coral Root)라는 영어 이름을 가진 아주 작은 난초다. 한글로 바꾸면 ‘가을 산호 뿌리’인 셈인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가을에 꽃을 피우고, 땅속줄기가 바닷속 산호를 닮았다. 이 난초는 다른 식물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징이 많아 흥미롭다. 광합성을 하지 않아 스스로 에너지를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잎은 퇴화했고 식물체도 초록색이 아니다. 대신 산호 모양의 뿌리줄기가 땅속 곰팡이들에게서 영양분을 얻는다. 폐쇄화를 만드는 식물들이 폐쇄화와 정상적인 꽃을 적절히 분배해 만드는 것과 달리 이 난초는 대부분 폐쇄화만 만든다는 점이 독특하다. 꽃대에 꽃이 줄줄이 여러개 달리는데 모두 다 폐쇄화인 경우가 흔하다. 연구소 숲 속에는 이 난초의 서식지가 있다. 이 서식지엔 수백개의 난초가 자라는데 그 많은 꽃이 모두 폐쇄화인 경우도 있다. 10년 넘게 이 서식지를 관찰해 온 연구관님께 물어보니 지금까지 활짝 핀 정상적인 꽃의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봄부터 이 난초에 대한 실험을 계획했고 드디어 채집할 수 있는 가을이 왔다. 5년 전에 이 난초의 모니터링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래서 예전에 기록해 둔 좌표를 확인하고 갈까 잠시 고민했는데 모니터링 때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이라 좌표가 없어도 숲에 가면 기억이 날 것 같았다. 서식지와 가까운 곳까지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다 나무가 덜 우거진 곳에서 길이 없는 숲을 헤치고 들어갔다. 11월을 맞이할 숲은 색도, 생기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늘진 숲 속엔 가을꽃도 보이지 않았고 떨어지는 잎은 쓸쓸함을 더했다. 저녁에 큰 폭풍우가 온다더니 숲 속에 들어서자마자 먹구름이 가득해 어두워졌다. 나는 약간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때 저 멀리 우리 실험실에서 꽂아놓은 색색의 작은 깃발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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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유전자만으로 씨앗 만들어

실험실에선 매년 올라오는 난초마다 깃발을 꽂는다. 난초마다 일일이 깃발을 꽂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지만 꼭 필요한 작업이다. 왜냐하면 이 난초는 이쑤시개처럼 얇은 줄기에 키가 손가락만큼 작고 꽃은 쌀알보다 더 작기 때문이다. 잎도 없고 초록색도 아니어서 주변에 떨어진 나뭇가지나 낙엽과 함께 있으면 그야말로 ‘숨은그림찾기’다. 깃발로 표시해 두지 않으면 밟고 지나치기 일쑤다. 나는 깃발을 찾아다니며 폐쇄화가 아닌 꽃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작은 키에 좁쌀보다 더 작은 꽃 때문에 난초를 만날 때마다 무릎을 꿇고 관찰해야 했다. 꽃이 펴도 다른 꽃들처럼 활짝 피는 게 아니라 폐쇄화보다 조금 벌어지는 정도여서 하나하나 유심히 보아야 한다. 낙엽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난초를 찾고,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고, 꽃대에서 하나하나 꽃이 피었는지 확인하는 건 고된 일이었다. 나는 넓은 서식지에서 그 많은 꽃을 하나하나 다 살펴본 후 알게 되었다. 모두 폐쇄화라는 걸 말이다. 꽃이 핀 건 하나도 없었다.

폐쇄화는 자신의 꽃가루를 자신의 암술에 옮기면 되기 때문에 수정이 보장된 셈이다. 그래서 꿀, 꽃잎 등을 만드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다. 대신 자신의 유전자만으로 씨앗을 만들어내는 것이니 유전적으로 다양하다거나 건강하다고 보긴 힘들다. 그러나 이 난초는 폐쇄화를 고집함에도 넓은 지역에 많은 자손을 퍼뜨리며 잘 살아가고 있다. 자신만의 생존 비법으로 말이다.

나는 두 종류의 꽃을 비교해 그 비밀을 조금이나마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 가을에 활짝 핀 꽃을 찾지 못했고 결국 폐쇄화와 정상적인 꽃을 비교하는 실험은 포기하게 되었다. 동물이 찾지 않는 꽃이라 다행으로 여겼던 나 자신을 반성하면서. 햇빛 좋은 봄·여름 동안 잎 한번 내지 않고 가을에 게으르게 꽃을 만들어 그마저도 피워내지 않지만, 꽃은 나와 달리 이번 가을에도 자신의 소임을 모두 마쳤다.

글·사진 신혜우 식물분류학자

미국 스미소니언에서 식물을 연구하고 있다. ‘식물학자의 노트‘, ‘이웃집 식물상담소’를 쓰고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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