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1년 후]⑤“아이 보낼 때도 단풍 들었었는데”…잔인한 10월
일상 생활 지속하기 어려운 고위험군 28명
올해 10월 29일은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1주기가 되는 날이다. 159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사건으로 인해 사고 방지 대책 미흡, 안전 불감증 등 우리가 그동안 소홀히 여겼던 여러 문제점이 부각됐다. 참사 후 1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달라지고 개선됐을까. 조선비즈는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그 변화를 짚어본다.[편집자 주]
“이태원 참사 초기에는 너무 힘들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참사 1주기를 앞둔) 지금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요. 트라우마가 심해서 아무하고도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요.”
작년 10월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자녀를 잃은 한 유족은 최근 이같이 말했다. 참사로 159명이 숨진 지 1년이 지났고 유족들은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불안, 불면, 우울 같은 정신적 고통을 겪는 등 이들의 삶은 참사 이전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유족·부상자 트라우마 상담 2900건, 고위험군 28명
보건복지부가 더불어민주당 인재근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국가트라우마센터에서 참사 직후인 작년 10월 30일부터 올해 10월 5일까지 제공한 참사 관련 심리 상담 건수는 7141건이었다. 유족 1880건, 부상자 1041건, 부상자 가족 157건, 대응 인력 196건, 목격자 1818건, 일반 국민 2049건이었다.
국가트라우마센터의 최종 심리 평가(CGI-S) 결과 28명은 지속적인 상담과 관리가 필요한 고위험군으로 분류됐다. 고위험군은 심리적 어려움으로 일상 생활에 지장이 있거나 지속적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고위험군 28명 중 유족은 11명이었다. 목격자 등 일반 국민이 12명, 부상자는 5명이었다.
현장에서 구조 활동을 했던 소방관 사정도 마찬가지다. 소방청이 민주당 오영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참사 트라우마로 치료·관리를 받는 소방대원은 1316명이다. 서울이 906명으로 가장 많았고 경기 남부(192명), 경기 북부(128명), 충북(33명), 인천(30명), 충남(27명) 순이다.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과 후속 조치 등 지원 업무를 담당한 인력을 포함한 수치로 분석된다.
◇“웃을 수도,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는 1년”
고(故) 정주희씨 어머니 이효숙씨는 지난 23일 오후 6시쯤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시민대책회의가 주최한 ‘유가족 말하기’ 추모제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10월이 너무 잔인한 것 같아요. 아이를 마지막으로 보내기 위해 선산에 갔을 때 단풍이 제법 있었는데… 지금 다시 단풍이 눈에 들어오네요.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전화해야지,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문득문득 놀라요. 1년이 너무 길었어요. 견디기 힘들어 새벽 4시부터 일어나 바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고(故) 오지민씨의 어머니 김은미씨는 “지민이가 사무치게 그립고 보고 싶다”고 했다. 김씨는 “1주기가 다가오는 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며 “눈 뜨고 잠들 때까지 지민이 생각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목소리를 내지만 아무 것도 이뤄진 게 없어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착잡하다”며 “(훗날) 아이와 만났을 때 엄마, 아빠가 최선을 다했다고 떳떳하게 말하고 싶다”고 했다.
김씨는 “요즘 사람들도 안 만나고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웃을 수도 없고, 분향소에 나와서 엄마들을 만나면서 서로 아이들 이야기를 하고 위로하며 1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이정민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위원장은 “날짜가 다가올수록 힘들어서 오히려 바쁘게 지내려 한다”며 “사람들을 못 만나고,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유족들과 만나서 떠드는 게 그나마 조금 치유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고(故) 이상은씨 어머니 강선이씨는 “지난 1년은 오롯이 상은이만 생각하며 보냈다”며 “아무 일도 하기 힘들고 49재까지 두문불출했다”고 했다. 강씨는 “우리 아이들의 존엄을 찾고 싶다”고 했다.
일부 유족은 자녀의 모교에 조의금을 기부하며 슬픔을 승화하고 있다. 고(故) 신한철씨 유족은 조의금 전액인 8791만5000원을 아들의 모교인 서울 발산초·신월중·광영고에 기부하기로 했다. 참사 후 고인의 통장을 열어보니 서울 강서구 장애인 일터에 매달 3만원씩 7년 3개월간 기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고(故) 신애진씨 유족도 부의금과 고인이 아르바이트로 저축한 2억원을 고려대에 기부하기로 했다. 고인의 친구들이 장례식장에 낸 부의금을 함부로 쓸 수 없었고, 생전 고인의 버킷리스트가 모교 기부였던 점을 고려했다고 한다.
◇“빨리 일상으로 돌아가길…”
참사 1주기를 앞두고 유족들이 원하는 것은 진상 규명과 회복, 치유다. 코로나19에서 벗어나 일상이 회복되며 평소보다 많은 10만여명의 인파가 몰릴 것이 예상됐지만, 경찰은 마약 단속·범죄 예방에만 관심을 갖고 구청은 불법 주정차·쓰레기 투기만 단속하는 등 제대로 된 안전 대비가 없었다는 게 유족 측 입장이다. 이 위원장은 “빨리 참사 원인이 제대로 밝혀져서 유가족이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란다”며 “그래야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고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날 서울광장에는 이런 내용의 유족 측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유가족, 생존자, 구조자, 상인 등 피해자들의 회복과 치유를 위한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유가족, 생존자에 대한 2차 가해에도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159번째 희생자가 발생했고 현재까지도 많은 유가족과 피해자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시민들의 추모 문구를 적은 포스트잇도 벽에 가득 붙어 있었다. ‘가영아, 사랑해’ ‘죄송합니다’ ‘내 안전을 위해서라도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아픔이 없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진실은 힘들더라도 추구할 의미가 있죠, 함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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