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영남 대표누각 '삼척 죽서루'·'밀양 영남루' 국보 된다

이수지 기자 2023. 10. 2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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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은 대형누각인 보물 '삼척 죽서루'와 '밀양 영남루'를 국보로 지정 예고한다고 27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지방자치단체가 '삼척 죽서루'와 '밀양 영남루'에 대한 국보 지정 요청에 따라, 관계 전문가의 지정조사와 문화재위원회 검토를 거쳐 이번에 국보 지정 예고를 실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고려 때 절은 폐사되고 누각만 남았던 것을 1365년)에 밀양군수 김주(1339∼1404)가 중창해 영남루라고 칭한 것이 관영 누각으로서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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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죽서루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3.10,27. phot@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이수지 기자 = 문화재청은 대형누각인 보물 '삼척 죽서루'와 '밀양 영남루'를 국보로 지정 예고한다고 27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지방자치단체가 '삼척 죽서루'와 '밀양 영남루'에 대한 국보 지정 요청에 따라, 관계 전문가의 지정조사와 문화재위원회 검토를 거쳐 이번에 국보 지정 예고를 실시하게 됐다"고 말했다.

'삼척 죽서루'는 고려 명종(1171∼1197)대에 활동했던 김극기(1148∼1209)가 죽서루의 풍경을 시로 썼던 것으로 미뤄 보아 적어도 12세기에는 창건됐음을 알 수 있다,

안축(1282~1348)과 정추(1333~1382) 등 시를 통해 처음에는 '서루'로 불리다가 14세기 후반에 들어서 '죽서루'’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수온(1410∼1481)의 '죽서루단'(1472), 허목(1595∼1682)의 '죽서루기'(1662)에서 '1403년 부사 김효손(1373∼1429)이 옛터에 새로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창건됐다가 조선 전기에 재건된 후 여러 차례 보수, 증축된 기록도 잘 남아있다. 조선후기 증축 후 모습이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서울=뉴시스] 죽서루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3.10,27. phot@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1403년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로 중창된 누정이었다. 1530년 남쪽 한 칸(측면 3칸)이 증축됐다. 1788년 북쪽 한 칸(측면 2칸)이 증축되면서 현재와 같은 팔작지붕 형태가 됐다.

이처럼 조선 초기 중앙 5칸과 조선 중기 후 확장된 좌⋅우측 1칸은 기둥 배열, 가구의 짜임, 천장과 바닥면 처리, 공포 및 세부 의장에서 시기별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죽서루 절경을 표현한 정철의 '관동별곡', 겸재 정선(1676∼1759)의 '관동명승첩'을 비롯해 김홍도(1745∼?), 강세황(1713∼1791) 등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시인, 묵객 등 다양한 계층이 죽서루를 소재로 많은 시문, 가사, 그림을 남겼다. 주변 하천인 오십천과 어우러지는 경관을 자랑한다.

[서울=뉴시스] 영남루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3.10.2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밀양 영남루’는 통일신라 때 세운 영남사라는 절에 있던 금벽루 혹은 소루, 죽루라 불리는 작은 누각에서 시작됐다.

이후 고려 때 절은 폐사되고 누각만 남았던 것을 1365년)에 밀양군수 김주(1339∼1404)가 중창해 영남루라고 칭한 것이 관영 누각으로서의 시작이다.

조선 초 밀양부사 안질(?∼1447)이 영남루를 중창하면서 영남루 서쪽 주변에 소루를 건축했다.1442년 경상도사 권기가 소루로 명명했다. 그 후 부사 이충걸(1465∼1527)이 임경당(현 침류각)으로 바꿨다.

연산군 때에는 밀양부사 김영추가 임경당 반대쪽 영남루 동북쪽에 망호당(현 능파각)을 지으면서 빈객숙소로 이용했다.

임진왜란 때 객사와 모든 부속 시설이 소실됐다. 1844년 이인재가 밀양부사로 재임할 당시 대루를 확장해 많은 부속건물을 지었다. 관원과 지방 빈객을 접대하는 객사로 사용됐다.

[서울=뉴시스] 영남루 능파각 전경 (사진=문화재청 제공) 2023.10.2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경사지를 이용해 건물을 배치한 영남루는 건물 자체 조형미가 뛰어나다.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답다.

경관을 감상하면서 명사들이 수많은 시문을 남겨 조선 선조 때 영남루에 걸린 시판이 30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나 지금은 12개가 남아있다.

믄화재청은 "이들 대형누각은 강원과 영남의 대표 누각으로 건축적 가치뿐만이 아니라 주변 자연과 어우러져 경관적 아름다움도 크다"며 "역사적으로 저명한 인사들이 방문해 시문을 남기는 등 학술적 가치도 높아 국보로 지정할 충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문화재청은 이들 대형누각 2건에 대해 30일간 예고 기간 동안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국보로 지정할 예정이다.

☞공감언론 뉴시스 suejeeq@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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