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의 태동을 도운 것은 이스라엘이었다
가자 지구에서 자선 단체로 시작한 하마스, 1987년부터 ‘발톱’ 드러내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가 된 하마스. 그러나 이렇게 된 배경에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적잖은 이스라엘 전직 군ㆍ정보 관리들이 지금까지 수차례 언론 인터뷰와 책을 통해서 “40여 년 전 하마스의 태동을 도운 것은 이스라엘 정부였다”고 말했다.
하마스의 ‘어머니’격인 이슬람주의자들이 가자에 들어온 것은 1970년대. 가자 지구는 이스라엘이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이래, 2005년 철군(撤軍)할 때까지 이스라엘군 점령 하에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야세르 아라파트(2004년 사망)가 이끄는 좌파 세력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저지르는 테러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때 코란 경전 연구에만 몰두하는 듯한 ‘평화적’ 이슬람주의자들이 가자에 등장하자,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을 PLO와 아라파트의 ‘대항마’로 간주했고, 이들의 세(勢) 확장을 도왔다.
그러나 처음에 ‘자선 단체’로 시작한 이 이슬람주의 조직은 1987년말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제1차 봉기(인티파다) 때 ‘이스라엘 제거’를 강령으로 채택한 지금의 하마스로 발전했다. 그리고 1989년 이스라엘 병사 2명의 납치ㆍ살해를 시작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에 나선다.
◇1970년대 가자에 나타난 ‘무슬림 형제단’
1970~1980년대 PLO는 여객기 납치, 암살, 버스 폭발 등으로 이스라엘 안팎에서 테러를 저질렀다. 이 PLO의 핵심 정파(政派)는 아라파트 PLO 의장이 이끄는 파타(Fatah)로, 공산주의 세력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좌파 집단이었다. 이스라엘은 이 PLO를 ‘테러집단’으로 규정했다.
한편, 1967년 이집트가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이스라엘에 패하면서, 가자의 지배권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넘어갔다. 이어 1970년대 들어, 이집트에서 극심한 탄압을 받던 ‘무슬림형제단’의 팔레스타인 분파와 추종자들이 이스라엘 군정 하의 가자로 유입됐다.
1928년 창설된 무슬림형제단은 아랍세계의 고통은 사회가 세속화하고 이슬람 신앙을 저버리면서 비롯했다고 주장했고, 슬로건은 “이슬람이 답이고, 코란은 우리 헌법”이었다.
그러나 세속적 민족주의자였던 이집트의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1966년 무슬림형제단의 창시자인 사예드 쿠틉(Qutb)을 처형했다.
이집트 지배에서 벗어난 가자의 팔레스타인 이슬람주의자들은 1973년 ‘무자마 알-이슬라미야(이슬람 센터)’라는 단체를 자선 기구로 이스라엘 군정에 신청했다. 이스라엘은 이 무슬림형제단의 후예들이 코란 연구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판단했고, 단체 설립을 승인했다.
◇이스라엘, 아라파트와 PLO에 맞설 대항마 찾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주민의 신뢰도 받고 이스라엘에 테러를 저지르지 않을 ‘말랑말랑한’ 파트너를 계속 찾았다.
이스라엘 정보 당국은 처음에는 이슬람 전파에만 집중하며 도서관ㆍ유치원ㆍ병원ㆍ학교 등을 세우는 이슬람 성직자 야신을 호의적으로 봤다. 쿠틉의 추종자인 야신은 하반신이 마비돼 휠체어 신세를 지는 인물이었다.
야신은 공개적으로 이슬람 메시지를 전했고, 이스라엘 정부는 야신의 가자 이슬람대학교 설립도 승인했다. 가자 이슬람대학교는 나중에 반(反)이스라엘 저항운동의 구심점이 된다. 이런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을 놓고, 아라파트의 PLO는 그때는 이스라엘의 “부역자”라고 비난했다.
야신에 대한 경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자의 전통적인 이슬람 성직자들은 이스라엘 정보 관리들에게 “야신은 악마 같은 인물이고, 무자마 단체를 방치하면 나중에 위험한 세력이 된다”고 계속 경고했다. 그러나 이런 정보는 이스라엘 정부 내에서 무시됐다.
이스라엘과 야신 모두에게, PLO와 파타(Fatah)는 ‘공통의 적’이었다. 1979년에 이스라엘의 가자 군정(軍政)을 이끌었던 이츠하크 세게브 준장은 2009년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우리의 주적(主敵)은 파타였고, 야신은 아직 100% 평화적이었다”며 “이스라엘도 야신을 탄압해 ‘이슬람의 적’으로 불리기를 꺼렸다”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국내 정보기관 신베트(샤바크)의 관리였던 로니 샤케드는 1994년 하마스에 대해 쓴 책에서 “야신과 추종자들은 무슬림형제단의 계획에 따라 아주 장기적 관점에서 차근차근 움직이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걸 몰랐다”고 했다.
◇발톱을 드러낸 하마스
야신은 1987년 12월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이스라엘을 향해 1차 봉기(인티파다)를 일으키자,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을 부인하고 파괴와 반(反)유대주의를 앞세운 하마스를 출범한다. 그리고 1989년 2명의 이스라엘 병사를 납치 살해하면서, 처음으로 이스라엘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도 야신을 비롯해 400명의 하마스 대원들을 체포했다.
한편, 이스라엘과 PLO는 19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을 통해서 팔레스타인 땅에 2개의 국가를 설립하는 안에 동의하고 서로를 인정했다. 이제 PLO와 파타는 이스라엘의 파트너로,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최대 적(敵)이 됐다. 하마스가 2004년 개발한 대전차(對戰車) 로켓의 이름도 ‘야신’이었다.
이스라엘은 본격적인 하마스 지도부 제거에 나섰다. 1997년 이스라엘의 해외정보기관 모사드는 요르단에 망명 중인 하마스의 정치지도자 칼레드 마샬을 독살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모사드 요원 2명이 요르단 경찰에 체포됐다. 이스라엘은 모샤드 요원의 석방을 위해서, 종신형을 받았던 야신을 풀어줘야만 했다.
이스라엘은 2004년 3월 야신을 암살했다. 이스라엘 공격 헬기는 이날 이슬람 사원에서 아침 기도회를 마치고 나오는 야신을 향해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했다. 접근하는 헬기 소음을 덮으려고, 이스라엘 공군의 F-16 전투기가 상공을 날았다.
◇가자를 지배하는 유일한 정파가 된 하마스
야신은 살해됐지만, 2006년 1월 치러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하마스는 가자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모두 44.5%를 득표해 제1당이 됐다. 전체 132석 중에서 하마스 74석, 파타는 45석이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파타의 극심한 부패와 정실주의, 오슬로 평화협정의 이행 실패, 지도력 부재 등에 환멸했고, 하마스를 대안으로 택했다.
그러나 하마스와 파타는 권력 분점을 놓고 유혈 충돌을 벌였고, 하마스는 결국 가자 지구를 일당(一黨) 지배 하에 장악했다. 서안 지구는 팔레스타인자치정부(PA)를 구성한 파타에게 넘어갔다.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민주주의의 확산’을 지지하며, 팔레스타인 총선을 밀어붙였다. 부시는 하마스가 승리하자 “평화롭게 선거가 치러졌고, (부패한) 팔레스타인 지도력에 경종을 울렸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가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무장 테러를 포기하지 않은 하마스의 등극에 대해, 부시 행정부 내에서도 “도대체 어떤 놈이 선거를 권고한 것이냐”는 불평이 나왔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하마스가 가자를 장악하자, 가자ㆍ이스라엘 간 국경 봉쇄에 들어갔다.
◇현재 가자 주민의 70%는 17년 전 투표권도 없었다
가자 지구 주민의 중간 연령은 18세다. 인구의 절반은 17년 전 하마스가 제1당이 되는 선거 때 태어나지도 않았다. 또 30세 이하 인구가 70%에 달한다. 가자 인구의 70% 이상이 당시 투표권조차 없었다는 애기다.
지난 22일 뉴욕매거진은 “많은 가자 주민은 하마스 민병대원들이 지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저항할 힘도 없고, 그날 그날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다”고 전했다.
이스라엘군 팔레스타인국 국장이었던 아리에 스피첸은 “하마스를 일찍 제거했었더라면 달라졌을까”라며 “모기를 없애면 생태계 균형이 깨져 모기보다 더 위협적인 해충이 극성을 부리는 것처럼, 하마스를 없애면 알 카에다가 이스라엘에 나타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자에서 이스라엘 정보 관리로 일했던 애브너 코헨은 2009년 WSJ 인터뷰에서 “1970년대 전통적인 팔레스타인 이슬람 성직자 한 명이 내게 ‘야신 일당과 협조하면 20,30년 뒤에 크게 후회할 것이요’라고 했는데, 그가 옳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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