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3.수원 국립농업박물관

경기일보 2023. 10. 26.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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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의 ‘땀방울’로 지어낸 따뜻한 밥 한그릇에 감사

 

한국인들이 쌀밥을 먹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인구의 80%가 농촌에 살았지만,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배를 채워야 했던 ‘보릿고개’가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식량을 자급하고 쌀밥을 먹게 된 것은 불과 50년 전인 1970년대 중반이다. 쌀로 대표되는 농업은 한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지금의 아이들이나 젊은 세대에게 까마득한 이야기 같으나 한국전통문화는 대부분 농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국 농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곳이 있다.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여기산 자락에 있는 국립농업박물관(관장 황수철)이 바로 그곳이다. 지난해 12월 개관한 국립농업박물관은 개관 10개월 만인 올해 10월 관람객이 40만을 돌파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여러 기후대에서 자 라는 식물과 다양한 포토존이 있는 식물원. 윤원규기자

■ 농업의 성지에 자리를 잡다

‘농업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박물관’을 주제로 하는 국립농업박물관은 전체면적 약 1만8천㎡ 규모로 전시동, 식물원, 교육동을 갖추고 있는 국민휴식처이자 교육장이다. 전시동에는 두 개의 농업관을 비롯해 기획전시실과 어린이박물관이 있고 식물재배시설도 갖추고 있다. 문득 궁금하다. 국립농업박물관이 삼성전자로 기억되는 인구 120만의 수원특례시에 왜 설립됐을까? “농업박물관이 자리한 이곳은 2014년까지 농촌진흥청이 있었던 곳입니다. 수원은 농업과 관계가 아주  깊은 도시인데, 박물관이 자리한 이곳 서둔동은 한국 농업의 성지라 할 수 있어요.”

수원특례시 권선구에 위치한 국립농업박물관은 농촌의 가치, 우리 농업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알리고 있다. 박물관 모습. 윤원규기자

농업박물관이 개관할 때부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에 귀가 솔깃하다. “박물관 옆에 220년 전 정조대왕의 명으로 수원사람들이 만든 축만제가 있어요. ‘서호’로 불리는 축만제는 농사에 쓸 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인공저수지입니다. 서둔동은 축만제의 물로 농사를 지었던 국영농장이 있었던 마을이지요. 2003년까지 서울농대가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국립농업박물관에는 ‘호호부실 인인화락’이라는 정조대왕의 꿈이 깃들어 있다. 박물관 뒤편 여기산에 있는 우장춘 박사의 무덤도 이곳이 한국 농업의 성지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농업은 땅, 물, 씨앗이 어우러져 나라의 근본이 됐다. 농업을 소개하는 영상. 윤원규기자

■ 한 그릇의 밥이 상에 오르기까지

박물관에 들어서면 아홉 개 커다란 콩을 만날 수 있다. ‘임원경제지’에 기록된 재래종 콩인 ‘까치콩’을 모티브로 한 설치미술 작품인데, 예쁜 색깔의 커다란 콩 위에 걸터앉을 수도 있어 아이들이 좋아한다. 옆에는 둥글고 커다란 식탁에 네 가지 곡물이 진열돼 있고, 네 개의 모니터에서 네 가지 곡물로 음식을 만든 사람들의 인터뷰가 상영되고 있다. “메밀은 베지근한 맛, 옥수수는 배틀한 맛, 수수는 들척지근한 맛, 팥은 훗 맛”이라 소개한 글을 나직하게 소리 내 읽어본다. 농업관1에 들어서면 벽면 스크린에서 영상을 보여준다.

하늘과 땅, 사람의 조화 속에 발전한 우리 농업의 역사와 문화가 화려한 영상으로 펼쳐진다. 문명의 시작과 함께 한 농사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땅과 물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온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전시된 쟁기와 멍에가 농사를 홀로 지을 수 없었던 사실을 일깨워준다. 경운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누렁소는 농사일에 빠트릴 수 없는 존재였다. 품앗이와 두레의 전통이 보이는 유물도 있다. 뒤웅박에 담긴 것은 내년 농사에 쓸 종자다. 농부는 가장 좋은 과일이나 씨앗을 먹지 않고 종자로 남겨두었는데 이것을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 한다.

파종법, 농업용수의 이용, 제초, 비료 등의 주요 농사 기술의 발전상이 눈부시다. 식량 자급을 위해 분투한 한국인의 굳센 의지를 거듭 확인한다. 짚을 촘촘하게 꼬아 항아리처럼 만든 씨오쟁이와 탐스러운 곡식이 그려진 백자철화광구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농업의 근본이 되는 것은 땅과 물과 종자입니다. 종자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한 도구들이 이처럼 다양합니다.” 땅을 개간하고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확보해도 좋은 씨앗을 마련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예전에는 흔했으나 이제는 보기 어려운 농업 관련 유물을 살펴보며 이런 물건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궁금하다. 귀중한 유물과 마주한다. “세종의 명으로 편찬된 ‘농사직설’과 장영실이 발명한 해시계 ‘앙부일구’는 진품입니다. 국립농업박물관을 대표하는 귀중한 유물이지요.” 세종대왕이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온 조선 팔도 농민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편찬한 ‘농사직설’의 가치를 강조한다. 농서를 편찬하기 위해 신하들의 의견을 널리 구한 정조대왕의 글 ‘어제권농정구농서윤음’도 꼭 살펴봐야 하는 유물이다.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서유구 같은 학자들이 정조의 뜻에 따라 농업을 개혁할 방안을 올린 사실을 떠올리며 세종과 정조처럼 위대한 지도자들의 공통점을 발견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리나라 농경의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는 농업관. 윤원규기자

■ 농(農), 한국전통문화의 숲

농업박물관의 첫 기획전의 주제는 ‘농農, 문화가 되다’이다. 지난달 시작된 이 기획전은 우리 역사와 문화의 줄기이자 뿌리가 농업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황수철 관장은 관람객에게 기획전의 의도를 이렇게 소개한다. “우리 역사의 근본이자 문화의 밑바탕이 된 농업의 가치를 새롭게 찾아보고, 농(農)이 우리 사회의 뿌리임을 되새겨보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수렵과 채집 활동을 하던 인류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이 탄화미는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부터 한반도 전역에서 조·수수·기장·보리 등의 곡물이 출토돼 농사가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유물이지요.” 불에 탄 볍씨 한 알이 우리 고대사를 새로 쓰게 했다니 놀랍다. ‘농업, 먹거리, 삶’은 고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가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작고한 오윤의 판화 ‘춘무인추무의’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몸짓이 흥겹다. 풍물패들이 들고 등장하는 ‘농자천하지대본’은 농업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말이다. 밥을 지을 때마다 한두 숟갈을 통에 담았던 플라스틱 절미통이 여러 개 전시돼 있다.

1970년대까지 서민들의 부엌에 놓여 있었던 물건이지만, 어린이들이 저 물건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게에 장군이 올려져 있다. “인분을 담는 장군 앞에서 유치원생들이 사진 찍기를 아주 좋아했는데, 똥오줌을 담는 것이라고 알려준 뒤로는 멀찍이서 바라만 봐요.” 겨울이면 농부들이 사랑방에서 볏짚으로 만들었던 짚신과 멍석과 가마니도 쌀을 주식으로 삼았던 한민족의 문화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3부 ‘삶 속의 예술, 농업’은 농업을 예술가의 눈으로 그려낸 것이다. 밥상으로 사용되던 소반, 만(卍)자가 조각된 고급스러운 찬합, 오색실로 국화꽃을 수놓은 수저집, 대한제국의 관인이 찍힌 됫박과 저울추 등 곡물을 계량하기 위한 물건이 시간을 과거로 돌려놓는다.

한국 농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수원 국립농업박물관. 윤원규기자

■ 과거를 지키고 현재를 지탱하며 미래를 준비해 가는 일

본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교육동에 마련된 식문화체험관도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별관인 식문화관에서는 한식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전시 관람과 요리강좌, 농생명과학 실험, 농업특화교육 등 다채로운 체험형 농업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야외체험시설은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계절별로 여러 가지 농작물을 재배해 농촌 경관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다랑논에서 자란 벼는 이미 추수했고, 밭에는 김장용 배추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층층이 펼쳐진 다랑논이 포근하고 정겨운 농촌의 모습을 연출한다.

농사일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를 위한 농업박물관의 배려는 체험을 비롯한 교육프로그램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농업박물관은 교육박물관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수준 높은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연령대별 공간에서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이 장점입니다. 수요자 맞춤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해 전시주제 기반 자기주도형 교육과 활동지를 제공하고 있지요.” 사실적인 전시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생각하는 체험을 통해 농업에 대한 즐겁고 감각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국립농업박물관의 부단한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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