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0원짜리 온기 꺼질라…사랑의 연탄 300만장 나눔 시작

박수혁 2023. 10. 25.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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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오전 강원도 춘천의 옛 도심인 소양동의 주택가에서 정해창 춘천연탄은행 대표(오른쪽)와 전상영 춘천연탄은행 대외협력국장이 손수 등짐을 지고 주민 김운숙씨의 창고에 연탄을 나르고 있다. 박수혁 기자

“요즘 누가 연탄을 때고 싶어 때나. 기름값은 비싸고 돈은 없지, 연탄 없었으면 벌써 얼어 죽었어.”

지난 18일 오전 강원도 춘천의 옛 도심인 소양동의 낡은 주택가. 주민 김운숙(78)씨가 정해창 춘천연탄은행 대표를 보자 활짝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김씨는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는데 집에 연탄이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창고에 쌓인 연탄을 보니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고 안도했다.

김씨를 따라 들어간 집 안 바닥은 얼음장처럼 찼다. 낡은 현관문과 새시 틈 사이로 바람이 들이쳤다. 집 안 곳곳에는 벽에서 새어 나오는 한기를 막기 위해 보온벽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김씨는 냉골 같은 이곳에서 맨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을 잔다고 했다. “여긴 보일러가 없어서 한겨울에도 바닥 난방은 꿈도 못 꿔. 그나마 연탄난로라도 있으니 겨우 버티는 거지. 겨울이란 계절이 아예 없으면 좋겠어.” 김운숙씨는 아직 오지도 않은 겨울 추위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비좁은 골목길을 따라 연탄을 실은 트럭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춘태(82)씨가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집 밖으로 뛰어나왔다. 집 입구에 마련된 이씨의 연탄창고도 시커먼 탄 부스러기만 곳곳에 남았을 뿐 연탄은 한장도 없었다. 이씨는 “전기장판이 있지만 전기요금이 무서워 제대로 못 튼다. 우리 처지에선 연탄은행 말고는 연탄조차 제대로 구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이씨 옆에서 연탄 배달을 지켜보던 유근국(80)씨는 “연탄은 서민들에게 싸고 따뜻한 최고의 연료다. 나라가 어렵다 보니 자원봉사자뿐 아니라 후원도 급격하게 줄어 연탄은행이 힘들다고 하던데 큰 걱정”이라고 불안해했다.

이날 춘천연탄은행이 준비한 연탄은 한 집당 100장씩 모두 2천장이다. 이씨와 같은 홀몸노인이 사는 작은 단칸방에서도 하루에 보통 연탄이 5~6장씩 필요하다. 100장이면 보름 남짓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정해창 대표는 “보통 집마다 200장씩 나눠드리는데, 다들 급한데 연탄이 없다고 해서 일단 100장씩 먼저 나눠드리고 있다. 경기침체 영향으로 자원봉사자뿐 아니라 후원도 사실상 끊어지다시피 했다. 춘천에선 지난 5일 연탄은행 재개식을 하고 연탄 배달을 시작했지만 아직 기관·단체 자원봉사 신청이 한 건도 없다”며 아쉬워했다. 실제 이날 연탄 배달도 자원봉사자가 없어 정 대표와 전상영 춘천연탄은행 대외협력국장 2명이 손수 등짐을 지고 트럭과 창고를 오가며 구슬땀을 흘렸다.

서울연탄은행이 지난 7일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백사마을 주차장에서 ‘사랑의 연탄 300만장 나눔’ 재개식을 하는 모습. 연탄은행 제공

서울연탄은행도 지난 7일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백사마을 주차장에서 ‘사랑의 연탄 300만장 나눔’ 재개식을 했다. 이 자리에서 안금옥(80)씨는 “겨울에는 연탄이 없으면 추워서 단 하루도 버티기 힘들다. 우리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연탄 한장 한장이 정말 소중하다. 그나마 연탄은행에서 해마다 연탄을 나눠주고 있어 우리의 삶이 조금이나마 따뜻할 수 있었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연탄은행이 백사마을에서 연탄나눔 재개식을 한 것은 이곳이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릴 정도로 에너지 취약계층이 많이 모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백사마을은 청계천과 남대문 판자촌이 철거되면서 오갈 곳 없어진 사람들이 모여 자리 잡은 마을로, 아직까지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는다. 2004년 연탄은행이 생길 때만 해도 이 마을엔 1천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재개발 등으로 모두 떠나고 200가구 정도만 남았다.

실제 연탄은행이 지난 7일 발표한 ‘2023년 전국 연탄사용가구 조사 결과’를 봐도 전국 연탄 사용 가구는 7만4167가구로 2021년(8만1032가구)에 견줘 8.5%(6865가구)나 줄었다. 국내 연탄 사용 가구의 흐름을 보면, 2006년 27만가구로 최고점을 찍었다가 점차 감소 추세다. 이런 추세라면 연탄 사용 가구는 앞으로 계속 줄다가 5만가구 선에서 고착화될 것으로 연탄은행은 전망하고 있다.

허기복 밥상공동체 연탄은행 대표는 “기후위기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연탄으로 겨울을 나는 에너지 취약계층은 여름이면 폭염에 시달리고, 겨울에는 혹한에 노출돼 더 힘들고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한다. 에너지 취약계층이 기후위기 취약계층으로 이동하는 것이 서글픈 현실이다. 우리가 모두 연탄 한장(850원)이라도 후원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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