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유가족’이 된 1년 [이태원 참사 1주기]
10월 이태원에는 소슬한 가을바람이 무색할 만큼 나풀거리고 반짝이는 것들이 가득하곤 했다. 이제 이곳에는 흰 국화 송이를 들고 다니는 청년들이 익숙한 풍경이 됐다. 10월29일은 이태원 참사 1주기다. ‘벌써’라는 부사가 먹먹한 이들을 만났다. 이들은 1년 전 ‘그날’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시 산다. 그 탓에 지난 1년을 마치 10년처럼 산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마음의 조각 옆에 여전히 희망의 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박가영씨의 어머니 최선미씨, 생존자 김초롱씨, 상인 남인석씨와 경찰관 윤하성씨(가명)를 만났다. 1년간 네 사람은 닮은 듯 다르게 각자의 위태로움을 지나왔다. 하지만 그 시간을 거쳐 도달한 주장은 같았다. 추상적인 위로 말고 구체적인 사과를 하라는 것. 지난 1년간 이들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명징한 사실을 배웠다.
엄마는 몸을 둥글게 말고 딸이 잠든 봉분을 안았다. 이내 비스듬히 누워 젖은 풀을 쓰다듬었다. 딸의 얼굴이 있는 곳이다. 가을 햇발이 먼 산머리에서 스러졌다. “이렇게 안고 풀을 만지면 꼭 가영이 얼굴을 쓰다듬는 것 같아요.” 차가운 흙이지만 얼굴을 맞대고 쓰다듬다 보면 엄마 팔을 베고 곤히 잠들던 어린 딸을 만지는 것 같다. 굳은 땅이 보송한 뺨이 된다. 코끝에 딸의 체취가 걸린다. 눈을 감으면 이렇게 생생한데 “더 이상 내 새끼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꼭 감은 눈을 뜨면 눈물이 흘렀다.
‘사람들 앞에서 절대 안 울던 사람’ 최선미씨는 이제 어디서든 울고 외치는 사람이 됐다. ‘엄마’에서 ‘유가족’이 된 지 1년. 그는 “이 나라에서 유가족이 되면 겪어야 하는 거의 모든 일”을 겪었다. 단식을 하고, 길 위에서 무릎을 꿇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며 모욕당하는 사람이 됐다.
그래도 지금껏 살아 있다는 사실에 종종 놀란다. 지난해 발인을 하고 딸을 떠나보낸 11월1일은 가영이의 스물한 번째 생일이었다. 선미씨는 한참 동안 추운 줄도, 배고픈 줄도 모르고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 딸의 산소를 지켰다. ‘뭔 일이 나겠다’ 싶어 한동안 추모공원 관리인이 방문을 막기도 했다. 당시 선미씨는 하루하루 딸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가영이 묘를 합장묘로 만들었어요. 내가 한 달 안에 가영이 옆에 갈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추운 데 우리 가영이 혼자 놔두면 안 되니까 내가 같이 들어가서 아이를 안고 있어야겠더라고요.”
그랬던 그는 삼우제를 지내고 국회 앞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 분향소’를 방문했다가 피가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위패도, 영정도, 희생자 이름도 없었다. 어딜 가도 자랑이었던 딸을 정부에서 지우고 있었다. 유가족들에게 사고 경위도, 사고 이후 조치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도 설명하지 않았다. 희생자와 관련한 정보는 언론 보도로 확인해야 했다. 정해진 시간 내 유류품을 찾아가지 않으면 모두 폐기한다는 소식도 뉴스로 알게 됐다.
행정안전부는 이태원참사 유가족협의회(유가협) 설립 여부를 물으며 대답을 재촉하기도 했다. “갑자기 ‘내일까지 유가협 설립에 동의한다는 연락을 하지 않으면 동의하지 않는 걸로 처리하겠다’는 연락이 온 거예요. 언제, 어떤 식으로 유가협을 만들 테니 참석 여부를 알려달라는 게 맞는 거잖아요. 유가협을 만들지 말지 묻는 건 유가족 간 갈등을 일으키려는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거죠.” 최선미씨는 그간 울고 누워만 있느라 보지 못했던 뉴스들을 하나씩 찾아보기 시작했다.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천하보다 귀한 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마음을 굳게 먹었다. 다른 유가족들을 찾아 서울을 오가기 시작했다.
알고 싶은 게 많았다. 사고 당시 가영씨 옆에는 친구 ㄱ씨가 함께 있었다. 구급대원이 이태원 해밀톤호텔에서 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순천향대병원)으로 가영씨를 이송하고 작성한 1차 구급활동 일지에는 ㄱ씨의 연락처와 가영씨의 연락처가 모두 적혀 있다. ㄱ씨는 구급차에도 동승해 신원을 확인해줬다. 신원 파악이 충분히 됐을 텐데도 당시 부부는 경찰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사고가 난 다음 날인 10월30일 새벽 5시 무렵, 가영씨의 주검이 순천향대병원에서 강동성심병원으로 옮겨졌다(2차 구급일지). 그 시간, 부부는 딸이 살아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순천향대병원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날이 밝은 후 명함을 건넸던 기자 한 명이 ‘가영씨와 같은 인상착의의 여성은 장례식장에 없다’며 다른 병원에 이송된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과 병원 관계자들이 출입을 막아서 부부는 장례식장 근처는 가보지도 못하고 있던 터였다. 기자의 말에 부부는 서울 시내 사방을 뛰어다니며 딸의 행방을 찾았다. 그렇게 강동성심병원 안치실에서 딸을 만났다. 12시간 동안 부부는 단 한 번도 경찰에게 먼저 연락을 받지 못했다. 전화를 걸면 그저 ‘그 자리에 있으라’는 한마디가 전부였다.
안치실에서 만난 가영씨는 지저분한 시트에 온몸이 꽁꽁 싸매진 상태였다. 병원 관계자는 천을 열어 얼굴만 겨우 확인할 수 있게 하고 가영씨 몸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내가 우리 딸을 5분도 못 보고 보냈어요. 손발도 만져보지 못하고, 한번 품에 안아보지도 못하고 보낸 거예요. 가는 딸 안아보게는 해줬어야죠. 그거는 하게 해줬어야 하는 거잖아요.”
왜 죽은 딸 손 한번 못 만지게 했을까. 정부는 끝내 답을 주지 않았다. 어떤 유가족들은 자식의 사망 시간도, 사망 원인도, 어떤 응급처치를 받았는지도 여전히 알지 못한다. “어떤 부모가 서울 한복판에서 자식을 잃었는데 이런 기본적인 것도 알지 못한 채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최선미씨는 묻는다.
그는 이제 딸의 묘가 아닌 서울광장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 분향소 앞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일주일의 반은 서울에서, 나머지 반은 남편과 고3 아들이 있는 충남 홍성 집에서 보낸다. 처음 몇 달은 서울에 올 때마다 짐을 들고 모텔을 전전했다. 추모제에서 만난 한 수녀가 그런 유가족의 상황을 듣고 밤에 비는 수녀회 사무실을 임시 숙소로 쓸 수 있게 해주었다.
혼자 임시 숙소에 몸을 누일 때면 선미씨는 쉬이 잠들지 못한다. 뜬눈으로 밤을 새울 때면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러다 보면 매번 그날의 안치소로 되돌아간다. “유가족들에게 애들 이야기를 물어보면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하잖아요. 그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 끝엔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인 안치소로 돌아가기 때문이에요. 생각의 마지막 종착점이 아이를 마지막으로 봤던 그곳인데 어떻게 잠이 오겠어요. 다들 그래요.” 수면제는 잘 먹지 않는다. 불면증이 심해 트라우마센터에서 남편과 함께 다량의 수면제를 처방받아온 날이 있었다. 그날 두 사람은 서로 안 보이는 곳에 약을 숨기고 지금까지 한 번도 다시 꺼내지 않았다. 누구든 이 약을 한 번에 다 먹어버릴 수도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았기 때문이었다.
유가족이 모인 단체 대화방에는 새벽에 글이 올라와도 빠른 속도로 ‘안 읽은 숫자’ 표시가 사라진다. 밤이 너무 길다는 걸 지난 1년간 배웠다.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 “유가족들이 투쟁하고 행진하고 싸우니까, 아직도 자식 생각하면서 우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웃음). 어떻게 안 울겠어요? 만날 울어요. 그래도 이제는 웬만하면 밤에 몰아서 울죠. 아침부터 울면 그날은 진이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거든요. 분향소에도 나와야 하고, 기자회견도 해야 하니까 참는 거예요. 그건 달라졌어요.”
이태원 특별법은 청년을 위한 법
10월8일은 부부가 닷새 만에 만난 날이었다. 충남 삽교역에서 내린 최선미씨는 역으로 마중 나온 남편 박계순씨를 만났다. 부부는 곧장 한 시간을 운전해 보령시 모란공원으로 가영씨를 만나러 갔다. 박계순씨는 들꽃을 꺾어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왔다. 지난 1년 동안 농부는 거친 손으로 계절을 담은 꽃다발 수십 개를 만들었다. 아빠는 딸의 묘 앞에 새로 만든 가을 꽃다발을 세웠다. 자동차 정비사이자 농부인 그는 가족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울곤 했다. 올해 박씨가 거둔 작물은 땀 대신 흙 위로 떨어진 그의 눈물로 컸다.
그에게 지난 1년간 일어난 변화를 물었다. “친구들이 밥을 못 사게 해요.” 박씨의 대답에 부부가 같이 웃었다. ‘불쌍한 사람’이 되고 나니 더 이상 친구 관계가 동등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농담을 해도 친구들이 웃지를 않았다. ‘웃어도 되나?’ 서로 눈치를 봤다.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네가 무슨 정신이 있어서’라며 애경사 소식을 알려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동등한 건 유가족들밖에 없었어요.”
선미씨는 ‘이태원 분향소’가 유가족들이 죽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한쪽에서는 부둥켜안고 울고, 한쪽에서는 웃고, 한쪽에서는 맛있다며 밥 먹고. 남들이 말하는 ‘유가족다움’에 갇히지 않고 보통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공간. 애들 이야기를 마음껏 하면서 여전히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공간.” 유가족들은 세월호 기억공간처럼 아이들을 애도하고, 유가족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길 바란다고 말한다.
그는 시청이나 행정안전부가 있는 정부청사 같은 공공기관에도 이 일을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져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청년 159명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정부는 사과 한마디 없어요. 그런데 한 명, 한 명의 죽음은 어떻게 대하겠어요? 이태원 특별법 제정은 청년들이 더 이상 허망하게 죽지 않도록, 이들을 귀하게 여기는 법을 만들자는 거예요.”
딸을 만나고 집에 돌아온 최선미씨는 활짝 웃으며 ‘이태원 특별법 제정’이라고 적힌 작은 현수막을 펼쳐 보였다. 그는 홍성에 머무르는 날이면 하릴없이 아파트 정문에 나가 혼자 현수막을 들고 서 있다 돌아온다. 여전히 집에 돌아올 딸을 기다리는 엄마의 등이 굽었다.
※이태원 참사 2차 피해 우려가 있어 이 기사의 댓글 창을 닫습니다.
홍성·김다은 기자 midnightblu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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