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급 외국산에 밀린 국산 합판...공장 문 안 닫는 뜻있는 '고집'

김성진 기자 2023. 10. 22.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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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前 '수출효자' 저가 외국산 공세에 시장 점유율 12%로 '뚝'
직원 월급도 못 줘 '희망퇴직'...합판업체도 두곳 줄어

1960년대 총 수출의 10% 이상을 감당하던 '효자' 합판업계가 저가 외국산 공세에 밀려 고전하고 있다. 생산업체가 두곳으로 줄고 희망퇴직도 받았다. 하지만 생산 설비와 공장은 처분하지 않고 유지하고 있다. 경영 여건이 매우 어렵지만 합판 공장이 유지돼야 향후 국산 원목이 국내에서 소비되는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2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1948년 생산을 처음 시작한 국내 최장수 합판회사 성창기업은 지난 7월부터 일부 생산 시설 가동을 중단하고, 6월 말에는 생산직 직원들 희망 퇴직을 받았다. 하지만 생산 설비를 처분하지는 않을 계획이다. 선앤엘도 지난 4월30일부로 합판 생산 일부 공정을 중단했지만 생산 설비는 유지하고 있다.

국내 합판업계는 고사 직전이다. 최근 10년 사이 신광산업과 동일산업, 선앤엘이 생산을 완전 중단했다. 남은 기업이 부산의 성창기업과 인천의 이건산업 두곳이다. 본래 합판업계는 1968년 수출액이 6800만 달러를 넘어 한국 총수출의 10% 이상을 차지하고 1976년에는 수출액 3억5900만 달러를 기록해 그 당시 한국의 경제 성장을 이끌던 산업이다.

산업이 고꾸라진 것은 '저급 외국산' 때문이다. 국내에서 합판은 한해 평균 2000㎥(입방)씩 소비되는데 외국산 공세에 국내산 점유율이 2013년 23.6%에서 지난해 12.9%로 줄었다. 동남아산 합판이 저렴한 가격 덕분에 많이 들어온다. 동남아는 합판의 원료인 목재를 싸게 구할 수 있고, 노동집약적인데 인건비가 저렴해 규격이 같으면 합판 가격이 국산보다 30~40% 싸다.

동남아산 중에도 KS 인증을 받지 않은 제품은 인증 제품의 절반 가격에 팔린다. 이에 건설 단가를 낮추려는 국내 공사 현장에서 비인증 제품을 쓰는 꼼수가 성행해 단속된 건수가 적지 않다.

국내 생산은 외국산과 가격 경쟁을 할 수 없다. 합판은 원목을 자르는 '절동', 이후 나무를 연필 깎듯 얇게 자르는 '로타리', 그 결과로 나온 베니어를 말리는 '물기 제거', 말린 베니어를 겹치고 판에 짜 넣는 '재단', 화학 처리, 검사 과정으로 나뉜다. 원목의 모양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절동과 로타리 과정에 인력이 많이 필요하고, 생산 설비가 커 전기료 등도 많이 든다.

국내 원목 가격과 인건비가 우상향해 국내 업계는 만성적인 실적 부진에 시달렸다. 선앤엘은 생산을 중단할 당시 "적자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했고, 성창기업은 10여년째 적자를 내고 있다. 성창기업은 최근 희망퇴직으로 생산직 직원 120여명 중 80여명이 퇴사했다.

이런 실적 부진으로 생산을 완전히, 또는 일부 중단했지만 국내 업체들이 생산 설비나 부지를 처분하지 않는 것을 두고 업계 관계자는 "한때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는 자긍심과 사업의 모태를 포기하면 안 된다는 의지"라고 풀이했다.

일각에서는 합판 생산은 일시 중단돼도 공장은 유지돼야 앞으로 국내 목재 자원이 선순환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산림청은 정기적으로 '산림 탄소 흡수능력 강화 사업'을 하는데 나무도 나이가 들면 탄소 흡수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나무를 수확해 '후계림'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이 과정에 목재가 생산되는데 원재료로 활용되지 않는 목재는 소각된다.

나무가 생전 흡수한 탄소는 베어진 나무 속에 저장돼 있다. 그런 나무를 소각하지 않고 합판으로 가공해 거푸집으로 쓰거나 가구를 제작해야 탄소 배출량을 절감하는 효과가 있다. 합판은 수명을 다해 폐기될 때까지 탄소를 제품 안에 저장하는데, 폐기된 후에도 다시 톱밥으로 갈아지고 MDF 합판 등으로 재활용될 수 있어 탄소를 반영구적으로 제품에 가둬두는 효과가 있다.

한국의 산림비율은 63%로 OECD 4위지만 목재수확률은 0.5%로 낮고, 목재자급률도 16%로 낮다. 산림청은 목재생산량을 2020년 460만㎥에서 2030년 550만㎥, 2050년 800만㎥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앞으로 국산 원목이 국내에 소비되려면 합판업계가 생산 설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성진 기자 zk00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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