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백조의 호수'도 날개 접었다…흔들리는 中 '소황제' 경제

베이징(중국)=우경희 특파원 2023. 10. 22.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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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최대 발레교습소 '신데렐라' 이어 베이징 12개점 운영 '백조의 호수'도 한밤 폐업통보
베이징 왕징 카이더몰에 입점한 백조의 호수 발레교습소 문이 20일 현재 굳게 닫혀있다./사진=우경희 기자

베이징(北京) 내 12개 교습소에서 수천명의 중국 어린이가 발레리나·발레리노의 꿈을 키웠던 교습 프랜차이즈 '백조의 호수'(天鵝湖畔, Swan Lakeside). 백조의 호수 베이징 왕징(望京)점은 평소라면 레슨이 한창이어야 할 금요일(20일) 늦은 오후, 불이 꺼지고 셔터가 엉성하게 닫혀 있었다. 먼지 앉은 발레복 마네킹은 돌아서 있었고 백조 인형만 덩그러니 입구를 지켰다.

셔터 위에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는다. 일체 환불은 안 된다"는 내용의 백조의 호수 측 사죄문과 "백조의 호수가 일방적으로 폐업을 선언했으며 관련 손해에 대해 공안에 모든 신고를 마친 상태"라는 내용의 오피스 관리업체 측 경고장이 나란히 붙어있었다.

신도시 왕징의 예체능 교육 메카 격인 이 쇼핑몰엔 스케이트와 농구, 탁구, 쿵푸부터 드럼에 이르는 다양한 어린이 대상 학원들이 들어서 있다. 하지만 이날 수강생으로 북적이는 곳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간혹 지나는 어린이 동반 가족에게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강사들만 속이 탔다. 발레 건너편 드럼 학원 직원은 "코로나가 종식됐는데도 수강생이 늘지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

멀쩡히 수업하다가 한 밤에 "내일 폐업"…성수기에도 못 버텼다
베이징 왕징 카이더몰 내 한 어린이 종합 체육 교육시설. 20일 오후 할머니를 따라 온 어린이 한 명에 두 사람의 강사가 달라붙어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사진=우경희 기자
백조의 호수 측은 토요일인 지난 14일(현지시간) 자정을 몇 분 앞두고 "내일부터 베이징 12개 직영캠퍼스 문을 모두 닫는다"고 통보했다. 한 학부모는 중국 언론에 "오후까지도 수업이 정상 진행됐고 우리가 다니던 교습소엔 부모들이 앉을 자리가 없어 서서 수업을 볼 정도로 수강생이 많았다"면서 "그날 밤에 갑자기 문을 닫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폐업은 누적 적자 때문이다. 학원은 각 교습소에 붙인 사과문에서 "코로나19를 거치고 손해가 쌓이는 동안 임대료 부담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며 "발레강사를 구하기 힘들어 인력 구조조정을 못했는데, 전체적인 소비등급(수준)이 하락하면서 회원 확대나 연장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고 호소했다. 코로나도 버텨냈지만, 내수침체는 못 버텼다는 설명이다.

현재 등록된 학생은 2098명, 떼이게 된 잔여 수강료는 3118만위안(약 58억원)에 달한다. 보다 못한 한 재력가 학부모가 직영 교습소 12곳 중 2곳(IKEA점·왕징카이더몰점)을 '0위안'에 인수해 수업 재개를 준비중인데, 전체 프랜차이즈는 이미 처분 절차에 들어갔다.

중국 여론이 백조의 호수 사태를 심각하게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어서다. 지난 8월 중국 최대 어린이 발레교습 프랜차이즈 '이세 신데렐라'(Isee Cinderella, 灰姑娘)가 돌연 폐업하며 시장에 충격을 줬다. 중국 내 50개 도시에 100개 이상의 센터를 운영한, 어린이 발레교습 대중화의 상징이 문을 닫은 거다. 그리고 석 달도 안 돼 베이징 대표 격인 백조의 호수까지 무너졌다.

중국은 3분기(7~9월)를 소위 '애들 장사'의 최대 성수기로 본다. 어린이 관련 산업군은 다 망해가다가도 3분기가 되면 형편이 편다. 1인 1만5000위안(약 276만원)이나 하는 백조의 호수 3분기 새 레슨 프로그램에도 폐업 직전까지 적잖은 어린이들이 몰렸다. 한 학부모는 "성수기까지 다 누리고 도망갔다"고 비난했지만, 달리 보면 마지막 노력에도 회생에 실패한 셈이다.

꺾이는 '소황제 경제'…고소득층 소비도 흔들리나
식사시간이 지나자 인적은 더 드물어졌다./사진=우경희 기자
중국의 사교육은 알려진 대로 무척 비싸다. 수백만원짜리 발레 프로그램은 차치하고라도 회당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피아노 레슨이나 골프, 축구 등 모든 예체능 강습 비용이 한국보다 훨씬 높다. 모두가 누려야 할 당연한 혜택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인민' 모두에게 필수인 대중교통이나 채소·과일값은 한국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싸다. 베이징의 시내버스 요금은 1위안(약 180원)이다.

그래서 이 '소황제(어린이) 경제' 업종의 불황은 더 의미심장하다. 내수부진 여파가 확산하며 상대적 고소득층에게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국 내수경기의 지표인 9월 소매판매는 전년 동기 대비 5.5%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지만 자녀교육부터 지갑을 닫는 분위기가 감지되는 가운데 가전제품(-2.2%) 등 고가제품 판매는 실제 줄었다.

중국 경제는 GDP(국내총생산) 저성장 우려 속에 내수소비 등 지표가 급락을 멈추고 위태롭게 지지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전폭적인 회복을 말하긴 어렵다는 게 중국 내 중론이다. 디플레이션(장기 내수부진으로 인한 불황) 위기감도 여전하다. 9월 소매판매 증가율 5.5%는 4개월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지만 3~5월 연속 10% 이상을 기록한 데 비하면 만족하긴 어려운 결과다.

특히 중산층과 고소득층 소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부동산 경기는 바닥이다. 9월 전국 70대 도시 평균 집값은 전월 대비 하락했고 부동산 개발 투자도 1~9월 누적 전년 동기 대비 9.1% 줄었다.

한 재중 경제관료는 소황제 경제 업종 추이와 관련해 "최근 부동산 시장 위축으로 중산층 자산규모가 줄어들고, 경기부진으로 상대적 고소득자들의 가처분 소득도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며 "저출산으로 아예 어린이의 수 자체가 줄어든 것도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중국)=우경희 특파원 cheerup@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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