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마을 한가운데 세워진 ‘친일파’ 비석, 마을 주민조차 몰랐다 [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친일 문화 잔재②]

2023. 10. 21. 13:5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기념비 등 일제 잔재에 대한 관리 전무
충남, 2021년 관련 연구용역 진행하기도
충남 아산시 공세리 한 폐가 앞에 세워진 이석구의 애민선정비. 친일 행적이 있는 그의 비석에 대한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15도가량 뒤편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김영철 기자

〈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국내편〉 [3] 친일 문화 잔재-충청남도편

[헤럴드경제(아산)=김영철 기자] 충남 아산시 공세리의 한 작은 마을에 들어서면 도로 바로 옆 폐가 앞에 두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 중 하나가 지난 1930년부터 아산군수를 지낸 이석구의 ‘애민선정비’다. 애민선정비는 송덕비(頌德碑)의 일종으로, 선정을 베푼 관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이석구는 친일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지난 8월 24일 헤럴드경제가 돌아본 기념물들은 언제든 망가질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열악했으며, 사람의 손길이 닿아 있지 않았다. 이 비석들을 알아보는 지역주민은 아무도 없었다. 수년간 방치된 나머지 언제든 비석이 무너지는 등 훼손될 가능성도 커 지역사회의 관리가 시급해 보였다.

이석구는 진보 성향의 민간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이다. 이 연구소는 이석구가 자신이 관리하던 지역에 애민선정비를 세울 수 있었던 건 일제에 대한 협조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연구소에 따르면 이석구는 1928년 히로히토 일왕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그는 아산군수로 부임한 뒤로 충청남도 지역의 소작관을 역임했다. 이 기간에 일제의 제국주의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보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충남 아산시 공세리 한 폐가 앞에 세워진 친일파 이석구의 ‘애민선정비’. 김영철 기자

그러나 마을주민조차 마을 한가운데 세워진 이석구의 비석에 대해 알지 못했다. 비석이 세워진 부근에서 40년 넘게 떡집을 운영한 한 마을주민도 “수십년 넘게 방치된 비석이라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서도 “비석 뒤편 저택에 누군가 살았더라면 정문 앞에 세워진 비석을 치우는 과정에서 관심을 기울였을 텐데, 해당 저택도 버려진 지 수십년이 넘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석구의 애민선정비 관리 상태는 매우 열악했다. 비석은 이미 15도 정도 뒤편으로 기울어져 있어 무게중심이 뒤로 쏠려 있었다. 언제든 비석이 뒤로 쓰러져서 훼손돼도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비석이 세워진 지반 역시 여기저기 금이 가고 깨져 있었다. 오늘 내일은 무사할 수 있어도 관리가 되지 않으면 향후 몇 년 내 친일 잔재가 훼손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초교 후문 쪽 수풀 속 친일파 기념비 ‘덩그러니’
충남 아산시 음봉면 음봉초등학교 후문 쪽에 있는 ‘윤치호 기념비’. 김영철 기자

애국자이자 친일 전력 논란이 함께 있는 윤치호의 기념비 역시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충남 아산시 음봉면 음봉초등학교 후문에 있는 ‘윤치호의 기념비’는 수풀 속에서 비석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윤치호는 대한제국 당시 중추원의관, 한성부 판윤 등을 역임했다. 갑오개혁에 동참했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동의 주역이었다. 부친이 사망하자 남작 작위를 이어받았고 1911년 105인 사건인 이른바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 암살 미수 사건’ 주모자로 검거됐다가 일왕 특사로 풀려났다. 해당 사건은 조선총독부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해 105인의 독립운동가를 감옥에 가둔 사건이다.

반면 윤치호에 대한 친일 논란도 존재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윤치호가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을 지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거액의 국방헌금을 내고 각종 시국강연에서 일제 찬양과 조선인 동원을 촉구했다고 보고 있다. 윤치호는 또 1942년 2월에는 국방비 5000원을 종로경찰서에 헌납했다. 같은 해 일본 내각이 조선인 징병제를 실시한다고 발표하자 이를 환영하는 기고문을 신문에 게재했다는 게 이 연구소 설명이다.

윤치호에 대한 실체적 흔적은 기념비가 유일한 상태다. 그러나 해당 기념비마저 어느 순간 부서지거나 사라지면 윤치호에 대한 기록은 역사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2021년 친일 잔재 기초조사를 진행할 당시 윤치호의 기념비는 음봉초등학교 후문 입구 쪽에 있었다. 비석 주위에는 석조로 건축된 조형물도 10개 정도 있었다”면서 “누군가 공사를 진행하면서 값어치가 있는 조형물들은 가져가고, 비석은 옆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고 아쉬워했다.

충청남도, 친일 잔재 기초조사 추진하기도

충청남도의 경우 일재 잔재를 재발굴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2021년 10월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 잔재 기초조사 연구용역사업 계약을 했다. 충청남도는 친일파들의 목록이 정리된 ‘친일인명사전’에서 충청남도와 관련된 친일 인물을 선별, 이들의 활동 내용을 조사했다. 조사 대상은 친일 인물들의 흔적이 있는 ▷기념비 ▷기념탑 ▷송덕비 ▷동상 ▷식민지 시기 건축물 등 조형물 및 건축 현황 등이다.

지난해 3월 이 연구소가 충청남도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역 내 친일 기념물은 65개로, 이 중 9개가 멸실된 것으로 조사됐다. 남겨진 친일 기념물 56개 가운데 해당 기념물들의 행적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된 곳은 11개에 불과하다. 친일 청산 과정에서 친일 재산이 몰수되기도 했다. 지역별 친일 재산 국가 귀속 결정 토지 현황을 보면 충남 지역에서 국가에 귀속된 친일 인사의 토지는 241만2068㎡에 달한다.

방 실장은 “기존에 조사된 내용은 교육과 문화 콘텐츠를 개발해 국민에게 친일 잔재를 알릴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
헤럴드경제 ‘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은 역사적 논쟁 속에 사라지는 한국 근현대사 유적을 조명하는 기획 시리즈입니다. 본 기획은 정부 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기획 : 김빛나 기자


팀 구성원 : 김빛나·김영철·박지영·박혜원 기자


지원 :

〈지워진 역사, 잊힌 유적 전체 시리즈〉




〈독일편〉


[1] 뉘른베르크편


[2] 베를린편


〈국내편〉


[1] 근현대사 유적지도


[2] 당신이 모르는 6·25


[3] 잊힌 친일문화 잔재


[4] 누구의 것도 아닌, 적산


[5] 남영동과 32개의 대공분실

yckim6452@heraldcorp.com

binna@heraldcorp.com

park.jiyeong@heraldcorp.com

klee@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