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선진국’ 사장님들도 한국만 오면 ‘악덕 보스’…“여기서는 그래도 되니까”

조해람 기자 2023. 10. 20. 12:1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일본, 미국, 스웨덴…
한국만 오면 ‘블랙기업’ 변신?
“기업 불법 처벌 확실히 해야”
페르노리카코리아 프란츠 호튼 대표가 지난 17일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 왼쪽은 통역사. 연합뉴스

지난 17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장. 국내 노동문제를 다루는 자리에 외국인 CEO(최고경영자) 두 명이 증인으로 출석했습니다. 한 명은 프랑스에 본사를 둔 양주회사 페르노리카코리아의 프란츠 호튼 대표, 다른 한 명은 일본에 본사가 있는 가네보코스메틱스코리아의 히가시우라 미치나오 대표였습니다.

좋은 일로 불려나온 건 아니었습니다. 페르노리카코리아는 올해가 3번째 국회 출석인데요. 노조를 탄압하고 불이익을 주는 ‘부당노동행위’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가네보코스메틱스코리아 히가시우라 대표는 직원에게 여러 차례 ‘대표 가족 시중’을 시켜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당했죠.

이상합니다. 프랑스와 일본이라면 우리가 으레 생각하는 ‘노동 선진국’ 아니었나요? ‘노조의 나라’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 정부는 최근 자국 기업이 해외에서 인권침해를 하는지 조사할 수 있는 지침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그런 ‘노동 선진국’ 사장님들도 한국만 오면 ‘악덕 보스’가 되는 겁니다.

이쯤에서 만화 <송곳>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갑니다. 프랑스 기업이 소유한 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회사도 프랑스 회사고 우리 점장도 프랑스인인데 왜 노조를 거부할까’ 물으니, 주인공인 구고신 노동상담소 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는 그래도 되니까.
만화 ‘송곳’의 한 장면. 네이버웹툰 제공
“우리 아들 여드름 치료제 좀 알아봐”

다시 지난 17일 국감 현장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발렌타인’ ‘시바스 리갈’ ‘로열 살루트’ 등 고급 양주를 수입하는 페르노리카코리아는 7년째 노사 분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임금협약은 7년째, 단체협약은 6년째 타결되지 않았죠. 페르노리카코리아는 부당노동행위, 생리휴가 거부,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등으로 고용노동부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2018년 국정감사와 2021년 안경덕 노동부 장관 인사청문회에도 대표가 출석했죠.

오랜 분쟁은 노조를 ‘무시’하는 사측의 태도 때문이라고 국회의원들은 지적했습니다. 올해 공개된 사진을 보면, 호튼 대표가 사장실에서 책상에 발을 올린 채 사장실 유리창 밖에서 대화를 요구하는 노조 조합원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호튼 대표를 부른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비례)은 “한국인에게 이건 모욕감을 주는 행위”라고 지적했습니다. 호튼 대표는 “성실하게 교섭에 임하겠으며, 필요하다면 노동당국의 중재도 고려하겠다”고 했습니다.

프란츠 호튼 페르노리카코리아 대표가 지난 9월 책상에 다리를 올린 채 대표실 앞에서 대화를 요구하는 노조를 보고 있다. 한국노총 전국식품산업노조연맹 페르노리카코리아임페리얼노조 제공

페르노리카코리아를 질타하는 데는 여야가 따로 없었습니다.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은 “2018년 장 투불 전 대표를 증인으로 불렀던 사람이 저”라며 “(이번에도) 흔쾌히 해결이 안 되면 청문회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투불 전 대표는 2018년 부당노동행위 등 혐의로 검찰에 넘겨졌고 2021년 노동부 장관 인사청문회 직후 한국을 떴습니다.

가네보코스메틱스코리아 히가시우라 대표에게도 질타가 쏟아졌습니다. 히가시우라 대표는 직원에게 아내의 병간호를 맡기고 아내가 다닐 마사지 가게를 알아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아들의 여드름 치료제를 알아보라고도 했다고 합니다. 해당 직원은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며 병가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가네보의 대표 화장품 제품들. 가네보코스메틱스코리아 제공

히가시우라 대표를 증인으로 부른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개인 심부름’ 지시가 사실이냐고 지적하자, 히가시우라 대표는 “정중하게 부탁드린 적은 있다”고 했습니다. 윤 의원이 “그게 갑질이고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하자 히가시우라 대표는 “직장 내 괴롭힘 신고 후 해당 직원을 만나지 못했지만, 만나면 사과할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미국에선 ‘우수 사례’ 코스트코, 한국에선…

이번 국감에서는 또 다른 외국계 기업도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미국에 본사가 있는 코스트코코리아인데요. 여기서는 사람이 죽었습니다. 폭염특보가 내려졌던 지난 6월19일, 코스트코 하남점 직원 김동호씨(29)가 주차장에서 수백 대의 카트를 끌며 3만~4만보를 걷다가 쓰러져 숨진 겁니다. 유족들은 코스트코가 적절한 휴식도 제공하지 않고 적은 인력으로 무리하게 일을 시킨 탓에 사고가 났다고 주장합니다.

사고 이후 코스트코의 대처도 물의를 빚었습니다. 유족들이 동호씨 관련 서류와 폐쇄회로(CC)TV 영상을 요청해도 ‘그게 왜 필요하냐’ 등 비협조적 태도로 시간을 끌었다고 합니다. 노동부 현장조사 때는 냉풍기를 틀어 사고 당시보다 온도를 낮추고, 동호씨 동료들이 노동부에서 참고인조사를 받을 때 동의 없이 사측 변호사를 동석시킨 것도 경향신문 보도로 드러났습니다.


☞ [단독]‘폭염 직원사망’ 코스트코, 노동부 조사 나오자 냉풍기로 온도 낮춰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8101547001


☞ [단독]‘직원 사망’ 코스트코, 동료직원 참고인 조사에 변호사 붙여···“진술 감시 의혹”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7301046001

코스트코는 미국에서는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우수 사례’로 칭찬받는다고 합니다. 저임금과 노동착취로 악명 높은 월마트의 대척점으로 꼽혀 여러 연구자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네요. 2007년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상황실태조사 연구용역 보고서도 “(코스트코는) 고임금과 각종 고용 혜택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며 “친노동자적인 모델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코스트코가 한국에 오니 ‘악덕 기업’으로 국감장에 불려나왔습니다. 지난 12일 노동부 국감에서 동호씨의 친형 김동준씨는 “사고 이후 회사로부터 아무 연락도 없고 소통 창구도 없어 미국 코스트코 본사 회장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한 달 만에 답장이 왔다”며 “그나마도 형식적인 사과 1~2줄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지난 12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서 코스트코 하남점에서 일하다 숨진 김동호씨의 친형 김동준씨가 발언하고 있다. 국회방송 제공

동준씨는 조민수 코스트코코리아 대표가 장례식장에서 ‘동호가 병을 숨기고 입사한 게 아니냐’ ‘원래 아프지 않았냐’ 등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조 대표가 “그런 말을 한 적 없다”고 하자 동준씨는 동호씨의 사진을 꺼내 들며 “눈을 시퍼렇게 뜨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동호 사진이 여기 있다. 보라. 동호 앞에서 그때 했던 말을 똑같이 해보라”고 했습니다.


☞ [국감 현장]“현관문 열고 돌아올 것 같은데…” 국감장 선 코스트코 동호씨 친형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10121805001

‘복지국가’ 스웨덴 기업도 “K는 못 참지”

‘노동 선진국’ 회사들도 한국만 오면 ‘블랙기업’이 되는 현실은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례는 2006년 화물차 제조 기업 스카니아코리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스카니아는 스웨덴 기업인데요. 아시다시피 스웨덴은 ‘복지 천국’ ‘노동권의 나라’로 칭송받는 국가죠. 국제노총이 2014년부터 발표 중인 세계노동권지수에서 매년 최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나라의 기업도 한국에 오면 ‘K의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2006년 10월 스카니아코리아는 판매실적이 부진한 영업사원 10명을 ‘해병대 캠프’에 보냈습니다. 영업사원들은 1박2일동안 휴대전화와 지갑을 압수당한 채 PT체조(유격체조), 레펠(강하) 훈련, 고무보트를 머리에 이는 훈련, 단체줄넘기, 구보·행군 등을 했습니다. 스카니아코리아는 훈련 참가자들에게 훈련 사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스카니아코리아 영업사원들이 2006년 10월 해병대 캠프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당시 훈련 참가자가 언론에 제공한 사진

왜 이러는 걸까요? 당시 ‘스카니아 해병대 캠프 사건’ 공론화를 도왔던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기업이 외국계냐 한국계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한국은 그렇게 해도 처벌받지 않는 나라니까요. 임금명세서를 안 줘도, 대놓고 육아휴직자에게 불이익을 줘도 처벌을 안 하잖아요. 분명한 불법인데도요. 기업들도 다른 회사들이 다들 그렇게 해서 이윤을 쥐어짜니 우리도 한다는 거죠.”
-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

박 운영위원은 “정부는 법치주의를 얘기하지만, 한국은 사측의 불법에는 관대하다 못해 자비로운 사회”라며 “윤석열 대통령이 좋아하는 법치주의를 제대로 확립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외국 기업이든 한국 기업이든 불법과 갑질은 안 될 일이죠. 이정식 노동부 장관은 국감 현장에서 코스트코 동준씨의 이야기를 듣고 “노동자들은 단순히 쓰다가 필요 없으면 갈아 끼우거나 버리는 존재가 아니라 존중받으며 같이 가야 할 동반자”라며 “어깨가 무겁다”고 했습니다. 국감일 하루만의 ‘반짝 다짐’이 아니길 기대해봅니다.

조해람 기자 lennon@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