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단군신화부터 한국고전문학까지…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다

최재봉 2023. 10. 20.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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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자 박희병 명예교수의 마지막 강의 책으로
하위주체 부각하고, 토풍과 화풍 길항에 주목
“고전문학은 탈근대문학 모색에도 중요한 원천”
18세기 조선의 문인화가 윤덕희의 ‘독서하는 여인’. 조선의 여성 독자층은 국문소설의 형성과 전개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한국고전문학사 강의 1~3
박희병 지음 l 돌베개 l 1권 2만5000원, 2·3권 각 2만7500원, 세트가 8만원

정년을 앞두고 있던 2021년 봄 학기, 박희병 서울대 명예교수는 국문학과 학부 강의로 ‘한국고전문학사’ 과목을 맡았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40년 가까이 가르쳐온 익숙한 주제였다. 코로나 사태의 한복판이라 비대면 온라인으로 행해진 이 강의의 수강생은 61명. 국문학과 학생 40명에 다른 전공 학생 21명이 추가됐고, 타 대학 교수와 박사과정생,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교수를 포함해 16명도 청강생으로 합류했다. 이 강의를 녹취하고 수정·보완해 출간한 책이 세 권짜리 ‘한국고전문학사 강의’다.

‘한국고전문학사 강의’(전3권)의 지은이 박희병 교수.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모두 32강으로 이루어진 책은 단군신화에서부터 19세기 말까지에 이르는 한국고전문학의 흐름을 시간 순서대로 훑는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나 지식을 건조하게 나열하는 방식은 아니다. 지은이는 문학의 본령이 인간의 마음과 정신, 삶을 탐구하는 데에 있다고 보며, 문학사 속 인간을 크게 세 가지 지평 속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사회역사적 지평과 집단적 지평, 젠더적 지평이 그것이다. 그는 특히 여성과 서얼, 중인 같은 “하위 주체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상하층이 망라되어 등장하며 특히 “하층의 이름 없는 백성들에 대한 존중과 친화감이 대단히 짙게 표출되어 있다.” 꾸준한 염불 정진으로 서방 정토로 올라간 여종(‘욱면비염불서승’), 서답(월경대) 빠는 여인으로 몸을 바꿔 원효에게 가르침을 준 관음보살(‘낙산 이대성 관음 정취 조신’) 등의 이야기는 하층민에 대한 존중과 함께 진보적인 젠더 관념을 보여준다. 나말여초에 창작된 전기소설 ‘호원’(虎願)은 ‘삼국유사’에는 ‘김현감호’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는데, 주인공인 호랑이 여인을 밀어내고 조연인 남성을 앞세웠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박 교수는 지적한다. 황진이를 필두로 한 16~17세기 여성 작가들과 조선에서 제일 긴 소설 ‘완월회맹연’을 쓴 이씨 부인,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철학자 임윤지당과 국문 기행문 작가 남의유당, 작중 인물인 초옥과 덴동어미 등은 여성 주체의 새롭고도 적극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최치원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담헌 홍대용과 연암 박지원을 리더로 하는 문인·지식인 집단 ‘담연그룹’의 대다수를 이루었던 서얼 출신 문인들에 대한 평가가 제25회 강의를 이룬다. 게다가 이어지는 26회 강의는 스물일곱 나이로 요절한 중인 역관 출신 시인 이언진에게 온전히 할애된다. 지은이가 한국의 4대 문호로 꼽은 최치원, 이규보, 김시습, 박지원 가운데 김시습을 제외한 세 사람만 한 회분 강의를 독차지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대단한 파격이다. 이언진의 시 쓰기는 “신분 차별에 대한 항의와 부정”을 담은 “생사를 건 행위”였다. 생전에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한 그는 죽기 전에 평생 쓴 글을 모두 불태워 버리는데, 부인이 가까스로 수습한 남은 작품만으로도 “우리 문학사에 처음 보는 ‘괴물’”이라는 평을 들을 만하다. 한시가 주로 5언과 7언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데 비해 그가 남긴 시 170수는 모두 6언절구로 되어 있다. 형식에서부터 삐딱한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콧구멍 치들고 주인 뒤를 졸졸 따르니/ 종이라 불리고 하인이라 불리지./ 천한 이름 뒤집어쓰고도 고치려 않으니/ 정말 노예군 정말 노예야” 같은 작품에서 보듯 내용에서도 지배 체제를 향한 반감과 투쟁 의지를 불태웠다.

토풍(土風)과 화풍(華風) 개념을 통해 한국고전문학사에서 주체성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 것 역시 이 책의 커다란 특징이다. 토풍이란 우리 고유의 풍속이란 뜻이고, 화풍은 우리나라에 수용된 중화의 영향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 두 지향이 길항하고 습합하면서 전개된 것이 한국고전문학사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신라 향가는 중국의 당시와 일본의 단카와 비슷한 시기에 창작되었는데, 서정시로서의 깊이와 주제의식에서 중·일 두 나라의 경쟁자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과거제가 시행되면서 중국 경전에 대한 지식을 중시하는 바람에 화풍이 강해지고 토풍은 위축되기에 이른다. 묘청의 난을 계기로 김부식이 정지상을 숙청한 일은 토풍에 대한 화풍의 승리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토풍이 우리말 노래에 대한 애호와 결부되고 화풍은 한시문에 대한 애호로 이어지지만, 정지상의 ‘팔성 제문’처럼 표기는 한문으로 되어 있어도 내용은 토풍에 해당하는 작품이 있고 한 작가 내부에도 토풍과 화풍이 병존할 수 있다고 지은이는 설명한다.

‘열녀춘향수절가’ 앞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 세종 때 훈민정음이 창제되자 시조와 가사 같은 우리말 문학 작품이 활발하게 생산된다. 송순의 ‘면앙정가’를 거쳐 그의 제자인 정철의 가사에 오면 “우리말의 표현력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있음을 목도”하게 된다. 정철의 ‘훈민가’ 제16수 중 “늙기도 설워라커든 짐을조차 지실까”는 절묘한 언어 구사로 대상에 대한 연민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중 “우는 것이 뻐꾸긴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같은 대목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의문형으로 서술함으로써 “풍경을 창조적으로 전유”했다. 이런 흐름을 이어받아 조선 후기에는 우리말 시와 소설이 활발히 창작되면서 토풍이 화풍보다 우세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한국 최초의 소설로 보는 게 정설이지만 ‘호원’을 쓴 최치원을 최초의 소설 작가로 보아야 한다거나, 훈구파가 보수적이고 사림파가 진보적이라는 통념은 잘못된 이분법이라는 설명, 허균의 ‘홍길동전’은 흔히 알려진 대로 국문소설이 아니라 한문 소설이라는 등의 새로운 주장 역시 책에서는 만날 수 있다. 박 교수는 고전문학은 낙후된 것이고 근대문학은 발전된 형태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세계 속 인간의 고통과 슬픔을 다룬다는 점에서 양자 사이에 우열은 없으며, 고전문학의 전통은 근대문학 속에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고전문학은 “근대문학의 극복과 탈근대문학의 모색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적, 미학적 원천이 되리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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