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판 깔리자…고기, 고귀해지다[이우석의 푸드로지]

2023. 10. 19. 09: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 이우석의 푸드로지 - 불판 요리
가스버너 등장하며 불판도 발전
솥뚜껑·투구 등 모양 다양해져
불 조절·육즙 가두는 공간까지
석쇠 쓰면 불향 배어 풍미 증폭
무쇠 ‘웍’은 화력 고루 퍼뜨려
고기맛 높인 ‘주방과학의 절정’
한우전문점인 ‘배꼽집’은 열전도율이 높은 벌집 구리석쇠를 불판으로 쓴다.

이젠 정말 무더위가 언제였나 싶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다 못해 바람 끝이 싸늘하다. 길었던 지난여름과는 달리, 열기로 사나운 불판 앞에 옹기종기 모여드는 게 하나도 두렵지 않다.

‘불판’이란 무엇인가. 무언가를 불에 익히기 위해 만든 평평하고 번듯한 조리도구. 즉 석쇠나 적쇠, 적철, 번철 등을 통칭하는 말이다. 원래는 꼬치(꼬챙이) 이후에 세계적으로 등장한 팬(Pan)이나 그릴(Grill)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요즘은 한식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이젠 ‘불판’ 하면 조리기구가 아니라 식탁 위에 화구를 가져다 놓고서 즉석에서 조리하는 식문화를 포괄해 뜻한다.

식재료의 차이도 존재하고 양념 등 조리법에 따라 맛이 달라지겠지만 고기와 생선 같은 재료는 불판 하나로 맛이 확연히 달라지기도 한다. 맛있고 편리한 불판이 계속 개발되고 있고, 식당마다 각각 독특한 불판을 쓴다며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식에서는 자주 쓰는 조리법이지만, 주방에서가 아닌 식탁 위에서 불판을 만날 수 있는 식문화는 퍽 드물다. 서양식의 기본은 대형 화덕이나 바비큐 그릴을 주방에 비치해놓고 구워서 식탁으로 서비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꼬챙이에 꿴 것을 구워 내주거나 잘라서 파는 노점의 경우, 협소한 공간 탓에 주방이 손님 앞에 나와 있는 것일 뿐이다. 우리처럼 식탁 위에 화구와 그릴을 함께 올려 바로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니다.

피아노선처럼 가는 철사를 이어 만든 당산오돌의 ‘실실이 불판’.

우리나라도 애초 화로구이나 신선로 정도만 식탁에 올랐다. 1970년대 돼지갈비가 유행하면서 드럼통에 장착한 구이 불판이 처음 등장했다. 특히 1980년대 들어 ‘부루스타’로 통칭되는 휴대용 가스버너가 등장해, 직접 상 위에 불을 피우고 불판을 올려 고기나 해물을 조리하는 방식이 크게 유행했다. 부엌 곤로 위 프라이팬에서 구워서 주던 삼겹살도 이때부터 즉석조리로 바뀌었다.

쿠킹포일을 깔아내던 프라이팬에서 직화 석쇠로, 무쇠로 주물을 뜬 철판을 만들어내더니, 급기야 여러 종류의 것을 고안해내기에 이르렀다. 전 세계적으로 우리 불판 문화가 가장 선진적으로 발달하게 된 계기다. 이때부터 우리의 불판 문화가 널리 알려졌다.

우리 불판은 종류도 많다. 프라이팬, 넓적한 번철, 투구 모양, 솥뚜껑 모양, 삽 모양 등 무쇠 철판부터 구리 석쇠, 실실이 불판, 철근 용접 석쇠, 격자 철망, 가운데 구멍이 송송 뚫린 신선로 판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불판이 유통되고 있다.

보는 재미도 있다. 과거 솥뚜껑에 구워 먹던 것에서 착안, 정말 무쇠 솥뚜껑처럼 만들기도 하고 숯가마 초고온에 고기를 올린 삽을 집어넣고 3초만 구워내던 방식에서 나온 삽 모양 불판도 한때 인기를 끌었다. 특히 과학적으로 열전도율을 높이기 위한 노력은 ‘실실이(피아노) 불판’ 같은 희대의 발명품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피아노선처럼 얇은 철사를 일정 간격으로 연결한 실실이 불판은, 마치 고기가 숯불 위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직화로 구워지는 까닭에 요즘도 많은 고깃집에서 애용하고 있다. 양념이나 고기 살점이 눌어붙지 않아 소비자도 선호하는 편이다.

고기나 생선을 굽는 데 쓰는 전형적인 직화 불판 석쇠.

예전부터 사용하던 것은 역시 철사를 엮은 석쇠다. 고기 구울 적(炙) 자를 써서 적쇠나 적철이라 부르기도 한다. 19세기 초 발간된 조선의 ‘브리태니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지금은 철망을 써 꼬챙이가 필요 없다’는 구절이 나오니 철망(석쇠)이 이미 널리 쓰이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음력 초하룻날의 한양 지역 풍속을 소개하며 화로에 숯을 피우고 석쇠에 고기를 구워 먹는 ‘난로회’가 나오는데 이때도 석쇠가 꼬치를 대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숯불 위에 삼발이를 놓고 그 위에 석쇠를 얹는다. 형태나 조리법이 서양의 바비큐 그릴 방식과 유사하다.

요즘도 불판 중에서 유독 석쇠 형태를 고집하는 곳이 있는데 직화로 불향이 고기에 배게 하려는 까닭이다. 다만 석쇠는 타기 쉽고 양념이 낭비되는 까닭에, 불고기 전용 불판처럼 이를 절충한 것도 있다. 가운데는 구멍을 뚫어 불이 올라오고 가장자리는 오목하게 눌러서 육수가 고이도록 했다. 요즘은 아예 오목한 부분에 달걀을 굽거나 육수를 부어 사리를 넣을 수 있도록 한 것도 찾아볼 수 있다.

음식(주로 고기)을 좀 더 맛있게 먹기 위한 한국인의 창의성은 불판의 다양성에 그대로 반영됐다. 원적외선을 활용하기 위해 맥반석을 박아넣거나, 기름을 빼기 위해 앞뒤로 구멍을 내거나 하는 등 여러모로 고려했다.

오래된 노포의 경우, 직접 주문 제작한 불판을 수십 년째 사용하기도 한다. 단골들은 음식을 보지 않고 얼핏 불판 사진만 봐도 바로 그 노포를 떠올린다. 평양집의 철근 불판이나 서서갈비로 유명한 연남서식당의 철판 사다리 불판의 경우가 그렇다. 이처럼 불판은 우리 식생활에서 이미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필자만 해도 당장 올해 얼마나 많은 날을 불판 앞에 앉았는지 사진을 검색하다 느꼈다.

가장자리에 국물이 끓는 보건옥의 서울식 불고기판.

고기 종류에 따라 불판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특정 요리에는 무조건 전용 불판이 정해지는 경우도 있다.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의 양고기 요리 징기스칸(칭기즈 칸)은 숯불구이 형식인데 볼록한 전용 불판을 사용한다. 이 모양은 몽골리안 무쇠 투구에서 유래했다 하는데, 실제 징기스칸 요릿집 대부분이 이런 모양의 불판을 사용한다. 볼록한 가운데 부분에 고기를 구우면 양고기 기름이 흘러내리는데 거기다 채소나 곁들임 찬을 구워 먹기에 좋다.

외국은 커다란 철망(barbeque grill)이나 번철(teppan), 그리고 프라이팬을 주로 쓴다. 불판 하면 ‘후라이팬’인 셈이다. 프라이팬이라고 하면 모두 똑같은 것 같지만 여러 종류가 있다. 스킬릿(바닥은 평평하고 살짝 옆면이 벌어지는 가장 익숙한 형태의 프라이팬)부터 옆면이 수직으로 올라가 원통을 자른 듯한 모양의 소테(saute), 바닥이 깊은 소스팬(Sauce Pan), 대칭형 양면 팬, 사각팬, 패티를 굽기 좋도록 테두리가 거의 없는 그리들(Griddle) 팬, 바닥에 볼록하게 나온 요철로 고기가 눌어붙지 않도록 한 그릴 팬 등이 알려졌다.

평평한 불판에 깐 쿠킹포일에 내는 서린낙지의 낙지볶음.

흔히 중국요리 조리에 쓰는 웍(wok) 역시 불판이자 프라이팬이다. 중식 전반에서 쓰이는 그야말로 만능 팬이다. 글자 그대로 무쇠솥 확(확)의 광둥어 발음이다. 재질은 단조로 두드려 만든 탄소강 무쇠, 바닥은 오목한 반구형이고 얇지만 무겁다. 하지만 내구성이 좋아 전 세계 모든 중국 음식집에서 쓴다. 중심이 깊어 화력을 골고루 받을 수 있으며 기름을 낭비하지 않아 재빠르게 식재료를 볶아내기에 유리해 지금까지도 이 유용한 발명품을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이 없다. 웍을 써서 음식을 조리하는 것을 아예 ‘웍질’이라 한다. 식재료에 열을 가하는 불판과 기본원리는 같지만 주방 한정이라 조리기구로 봐야 한다.

어디를 둘러봐도 우리 불판만큼 유용한 게 없다. 불을 조절하거나 기름을 빼고 육즙을 가두는 공간까지 모두 고려한 주방 과학의 절정이다.

이 많은 것을 불과 40여 년 새 해냈다. 고기(식재료)야 어쨌든 불판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은 분명하니, 한국인의 불판에 대한 집념은 일정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가능한 한 무엇이든 보다 맛있게 먹기 위함은 만인의 바람이자 인지상정인데, 어찌 고기만 바라보며 맛을 논할까. 그 바닥에 있는 불판은 고기를 요리로 완성시키는 주역이며 맛을 다루는 연출임이 틀림없다. 곁들여서 불판이 좋아 음식까지 만족스러운 집을 몇 집 소개한다.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맛볼까

◇연남서식당 = 자리가 없어 서서 먹는 일명 ‘서서갈비’로 유명한 노포. 아예 이름을 명동서서갈비로 바꾸고 서울 중심인 명동으로 옮긴 지 몇 년 됐다. 넓적한 철판을 용접해 붙인 특유의 불판이 처음 온 이를 압도한다. 가운데 뼈를 남기고 양쪽으로 펼친 소갈비를 뭉텅뭉텅 잘라 익혀 먹기에 딱이다. 그릴의 면적이 넓어 직화와 팬의 장점을 고루 살렸다. 서울 중구 명동7가길 20-8. 1대(170g) 1만8000원.

◇당산오돌 = 돼지 꼬들살(목살 뒷부분)과 소갈비를 LA갈비식으로 가로로 자른 눈꽃갈비로 유명한 맛집. 단단하고 화력 좋은 고급 비장탄을 쓰기에 직화에 최적화된 실실이 불판을 채택했다. 화력과 일정 간격을 두고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고기가 원적외선에 의해 서서히 익어가는 풍경만 봐도 입맛을 다시게 되기 마련이다. 서울 영등포구 국회대로37길 6. 꼬들살 1만6000원. 눈꽃갈비 2만4000원.

◇배꼽집 = 참숯에 열전도율이 높은 벌집 구리 석쇠를 쓴다. 여기다 특안심과 눈꽃등심, 안창살 등 특수부위를 골라 구워 먹을 수 있다. 쨍하게 구워낸 질 좋은 소고기 맛이야 원래 소문난 집이고, 평양냉면과 갈비탕 등 런치세트 메뉴도 훌륭해 상암동에선 미팅이나 회식 장소로 늘 손꼽히는 집이다. 다양한 고기 메뉴에 허투루 내지 않는 깔끔한 곁들임 찬이 인기 비결.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54길 17 사보이시티 DMC 2층.

◇냉갈집 = 가는 철망 석쇠를 쓴다. 한 번 쓴 불판은 재활용으로 거둬가는 방식이라 위생적이다. 불판에 불만이 있을 수 없다. 지리산 흑돼지 오겹살을 철망 위에서 단숨에 익혀내니 육즙이 잘 익은 과일처럼 터진다. 두툼한 돼지갈비는 달콤 짭조름한 양념이 잘 스며들었고 속에는 돼지고기 본연의 육즙을 가득 품었다. 매운 양념갈비도 인기가 많다. 김치와 장아찌 등 곁들임 찬은 남도 특유의 상차림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광주 광산구 수완로52번길 13 1층. 돼지갈비 1만5000원.

◇서린낙지 = 이렇다 할 불판을 쓰지 않는데도 모두 ‘낙지불판’이라 한다. 알루미늄 쿠킹포일에 콩나물과 소시지, 베이컨을 얹은 메뉴 이름이 불판으로 통용된다. 여기에 매운 낙지볶음을 올려 비벼 먹는다. 마늘과 고추가 범벅된 맛에 기름진 재료가 들어가면 희한하게도 잘 어울린다. 탱글탱글한 낙지 살점도 아삭한 콩나물과 만나 시너지를 낸다. 서울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종로타운. 베이컨소시지구이 1만8000원.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