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당근색은 없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2023. 10. 1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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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농산물’(2023), 캔버스에 유채(8F). 강석기 제공

“당근색이 안 나오네요...”
“음... 잠깐 있어봐.”

글도 그렇지만 그림도 소재를 찾는 게 일이다. 연초에 마땅히 그리고 싶은 게 없던 차 주방 창고에 있는 당근이 눈에 들어왔다. 막 캐낸 것처럼 색이 짙고 신선해 보여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고구마, 감자 등 여러 채소 가운데 당근을 배치하는 구도를 만들었다.

그런데 막상 그리다 보니 내가 가진 주황색 물감으로는 당근색 느낌이 안 났고 다른 색 물감을 조금 섞어봐도 영 아니라 고민하는 모습을 화실 선생님이 지나가다 본 것이다. 잠시 뒤 선생님이 주황색 물감을 갖고 와 내 파레트에 짜줬다. 

딱 봐도 주황색 톤이 깊었고 아니나 다를까 칠해 보니 당근이 그럴듯해졌다. 화가들이 마음에 드는 물감을 사려고 기꺼이 비싼 돈을 들이는지 알 것 같았다. 

사실 내가 갖고 있던 물감으로도 느낌은 좀 덜하겠지만 당근의 정체성을 주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당근을 옆에 있는 고구마의 자주색이나 감자처럼 노르끼리한 색으로 묘사하면 어떨까. 아마도 한눈에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인터넷 국어사전에서 ‘당근색’을 검색해봐도 ‘당근의 빛깔과 같은 주황색’으로 정의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 인삼이 연상되는 야생 당근

당근은 원래 약용식물이었다. 2000년 전 그리스와 그 뒤 로마 문헌에는 야생 당근의 씨앗을 최음제나 해독제 등 여러 용도로 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오늘날에도 유럽과 서아시아 일대에는 야생 당근이 자생하는데 뿌리의 생김새와 색이 우리가 익숙한 작물 당근과는 전혀 다르다. 

희고 가는 뿌리가 얼핏 보면 인삼 같다. 이럴 수 있는 게 둘 다 미나리목(目)에 속하는 친척 관계이기 때문이다. 게놈 분석 결과 인삼의 조상과 당근의 조상은 약 5100만 년 전 갈라진 것으로 나온다. 

당근이 작물화돼 식탁에 오른 역사는 이보다 훨씬 짧아 10세기 이란고원(현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뿌리채소로 먹었다는 최초의 기록이 있다. 당시 당근은 주황색이 아니라 노란색이나 자주색이었다고 하고 그림에도 그렇게 묘사돼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니콜라스 마스의 유화 작품 ‘채소 가게’(1655-65). 당근이 옅은 노란색과 자주색으로 묘사돼 있다. 원예연대기 제공

오늘날도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는 이런 재래종 당근을 재배하고 있는데 이를 ‘동양 그룹’으로 부른다.

서아시아에서 작물화된 당근은 동서로 퍼져나갔고 16세기 스페인과 독일에서 주황색 당근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품종개량으로 나온 주황색 당근이 큰 인기를 끌면서 세계로 퍼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우리가 익숙한 주황색 당근을 ‘서양 그룹’이라고 부른다. 

지난달 학술지 ‘네이처 식물’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은 야생 및 작물 당근 630개 유전자원의 게놈 분석으로 당근의 작물화와 개량의 역사를 재구성한 논문이 실렸다. 아울러 오늘날 당근색이라고 인식되는 진한 주황색이 나오게 된 주요 유전 변이의 실체도 밝혔다. 이 결과는 지난 2000년에 걸쳐 문헌이 당근에 대해 언급한 내용과 대체로 맞지만 세부 사항은 좀 다르다. 
 

당근의 작물화와 개량 과정을 지도로 나타냈다. 유라시아에 자생하던 야생 당근은 수천 년 동안 약용식물로 쓰이다가 6~10세기 서아시아에서 작물화가 일어나 뿌리채소가 됐다. 이때 개화 시기와 관련된 유전자 변이가 일어나 꽃이 늦게 피고 뿌리가 굵어졌다. 당근의 색은 노란색과 자주색이었다. 그 뒤 유럽으로 건너간 노란색 당근과 현지의 야생 당근이 교잡하는 과정에서 16~18세기 주황색 당근이 나왔고 그 뒤 세계로 퍼졌다. 이때 카로틴 관련 유전자 3개의 변이가 일어났고 아울러 개화 관련 다른 유전자에서 추가 변이가 생겨 뿌리가 더 굵어졌다. 네이처 식물 제공

세계에서 수집된 630개 유전자원의 게놈을 해독해 비교한 결과 다섯 그룹으로 나뉘었다. 야생과 재래종(landrace)-A, 재래종-B, 초기 재배품종(cultivar), 개량 재배품종이다. 지금까지는 야생과 동양, 서양으로 이렇게 세 그룹으로 나눴는데 동양 그룹이 재래종-A 그룹과 재래종-B 그룹으로 나뉘고 서양 그룹이 초기 재배품종 그룹과 개량 재배품종 그룹으로 나뉜 것이다. 

그리고 13세기 유럽으로 건너간 동양 그룹에서 서양 그룹(초기 재배품종)이 나온 게 아니라 동양 그룹과 당시 유럽에 자생하던 야생 당근 사이에 교잡이 꽤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어쩌면 서양 그룹 당근의 주황색도 뿌리가 주황색인 변이 야생 당근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논문은 작물 당근의 특성을 두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먼저 당근이 처음 작물이 되게 한 특성인 굵은 뿌리를 만든 변이이고 다음은 개량을 통해 뿌리가 더 굵어지고 아울러 짙은 주황색을 띠게 한 변이다. 

뿌리를 보면 뿌리의 가로 성장에 관여하는 유전자 변이가 아니라 개화 시기와 관련된 몇몇 유전자의 변이가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얼핏 이해가 안 가는 측면이지만 당근의 성장 과정을 보면 이해가 된다. 

야생 당근은 1년생 풀로 싹이 터 잎이 나고 자라다가 추대(bolting)로 불리는 꽃줄기가 올라와 꽃이 피고 열매(씨앗)를 맺는다. 일단 추대가 올라오면 뿌리는 더이상 자라지 않는다. 그런데 개화 시기를 조절하는 유전자에 변이가 생겨 꽃이 늦게 피자 뿌리가 계속 자라 굵어지면서 사람들의 주의를 끈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재배 과정에서 뿌리가 더 굵은 쪽으로 선별했을 것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기여한 유전자는 CHE, TCP23, TCP7으로 작물 게놈 대다수가 변이형이다. 대략 6~10세기에 이런 변이를 지닌 개체가 선택되면서 작물 당근이 나왔을 것이다. 게놈 비교 분석에 따르면 오늘날 재래종-A가 초기 작물 당근의 특성을 가장 많이 지닌 것으로 보인다.

● 짙은 주황색 당근 선호

1831년 독일의 화학자 하인리히 바켄로더는 구충제를 찾는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당근 주스에서 미세한 루비색 결정 조각을 발견했다. 그는 물에는 잘 안 녹고 에테르나 기름에 녹는 이 물질을 당근의 학명(Daucus carota)에서 따온 카로틴(carotene)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거의 100년이 지난 1915년 역시 독일의 화학자인 리하르트 빌슈테터가 카로틴의 분자식(C40H56)을 규명했다. 당근의 카로틴은 알파-카로틴과 베타-카로틴 두 가지로 서로 이성질체다. 

그 뒤 카로틴처럼 탄소 40개 골격을 지닌 분자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이를 묶어 카로티노이드(carotinoid)라고 부른다. 주황색인 카로틴과 함께 노란색인 루테인과 빨간색인 라이코펜이 대표적인 카로티노이드다.

뿌리가 흰색(엄밀히는 옅은 노란색)인 야생 당근에는 루테인이 미량 들어있다. 여기서 나온 작물인 동양 그룹 당근 가운데 노란색은 루테인 함량이 높아진 것이고 자주색은 카로티노이드가 아닌 안토시아닌 색소가 만들어진 결과다. 오늘날에도 천연 자주색 색소를 얻기 위해 자주색 당근을 재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서양 당근의 주황색은 어떤 유전자 변이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번 논문 이전까지 염색체 8개로 이뤄진 당근 게놈에서 주황색과 관련된 변이가 두 곳 밝혀졌다. 3번 염색체의 Or자리와 7번 염색체의 Y2자리다. 그런데 이들 자리에 위치한 유전자들 가운데 카로틴 생합성 효소를 지정하는 게 없어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2018년 Or자리에서 변이가 일어난 유전자의 실체가 밝혀졌다. Or-유사 유전자로 이름을 지었는데 변이형은 단백질의 아미노산 하나가 바뀌었다. 

이 단백질의 작동 메커니즘은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변이형은 세포소기관인 유색체(잡색체라고도 부른다)의 구조에 영향을 줘 카로틴이 더 많이 저장되게 하고 카로틴 생합성 단계에 관여하는 효소인 PSY에도 영향을 줘 카로틴을 더 많이 만들게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 논문에서 연구자들은 Y2자리 변이 유전자 실체를 밝혔고 동시에 2번 염색체에서 주황색 관련 변이 유전자를 새로 찾아냈다. 각각 EX1-유사 유전자와 REC1-유사 유전자로 이름 지었는데 정확한 작동 메커니즘은 아직 밝히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이들 세 변이 유전자는 모두 열성이다. 뿌리가 흰 야생 당근과 교배해 얻은 1세대 당근은 모두 흰색 뿌리라는 말이다. 

유라시아에 자생하는 야생 당근(wild)은 뿌리(주근)가 가늘고 흰색이다.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재배하는 재래종인 동양 그룹(eastern landrace)은 뿌리가 다소 굵어졌고 색이 노란색 또는 자주색이다. 16세기 무렵 유럽에서 옅은 주황색 당근이 나왔고 뒤이어 짙은 주황색과 더 굵어진 당근이 육종돼 세계로 퍼졌다. 유전학 제공

변이 유전자의 영향력을 보면 셋 가운데 두 개는 변이형이어야 주황색이 나오는데 조합에 따라 차이가 있다. 즉 Or-유사 유전자와 EX1-유사 유전자가 변이형일 때는 셋 다 변이형일 때에 가까운 짙은 주황색이지만 REC1-유사 유전자와 Or-유사 유전자 또는 REC1-유사 유전자와 EX1-유사 유전자가 변이형일 때는 옅은 주황색이다.

문헌을 보면 옅은 주황색에서 짙은 주황색이 나왔으므로 아래 두 조합인 당근이 먼저 나왔을 것이다. REC1-유사 유전자 변이형을 지닌 당근(아직은 노란색 뿌리)에서 Or-유사 유전자 또는 EX1-유사 유전자에 변이가 생겨 뿌리가 옅은 주황색이 됐다. 

다만 초기 재배품종 유전자원에 두 조합이 있어 어느 쪽이 먼저 생겼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 뒤 나머지 유전자에도 변이가 생겨 짙은 주황색 당근이 나왔을 것이다.

20세기 초 당근의 베타-카로틴이 프로비타민A, 체내에서 비타민A로 바뀌는 선구물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당근이 몸, 특히 눈에 좋은 채소로 널리 알려졌다. 

그 결과 사람들이 주황색이 더 짙고 선명한 당근을 찾으며 이런 방향으로 개량이 이뤄졌고 지난 60년 사이 카로틴 함량이 두 배나 늘어났다.

당근의 정체성이라고 알고 있었던 짙은 주황색 뿌리가 당근의 입장에서는 길어야 500년 전부터 지니게 된 낯선 특성이라는 사실이 왠지 아이러니하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10권), 《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 《식물은 어떻게 작물이 되었나》가 있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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