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탐사] 우리는 '雪山 강의실'에서 고난과 동지애를 배웠다

김정은 대원 2023. 10. 18.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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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탈가르 21박 22일
푸르마노바 등정, 메딕·우즐로바야 등반
우즐로바야 정상으로 향하는 김연태 대원 뒤로 설산이 웅장하게 들어섰다.

산이 좋아서 시작한 산악회, 그 계기로 알게 된 오지탐사대. 산을 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오지탐사대 모집에 덜컥 합격했다. 너무나 감사했고 내 몸은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그 열정을 가지고 '큼직한 산타'팀 대원들과 함께 6주간 영남알프스부터 설악산까지 매주 국내훈련을 진행했다. 이번 우즐로바야 탐사가 가치 있는 경험이 되려면 우리 스스로 그 의미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다짐하며 7월 21일부터 8월 11일까지 카자흐스탄 우즐로바야 탐사를 다녀왔다.

우리의 첫 행선지는 푸르마노바Furmanova(3,029m)였다. 일리 알라타우 산에 있는 푸르마노바는 향기로운 소나무 숲이 울창하고 야생화가 무성하다. 걸음을 내딛을수록 이국적인 풍경이 점점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경험했던 국내의 산들과는 다르게, 부드러운 초지와 침엽수림이 어우러진 녹색의 풍경을 보며 지금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점점 실감이 났다. 또 걸으면 걸을수록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기에, 다음으로 마주할 풍경에 대한 기대감은 계속 부풀어 올랐다. 고도 2,000m 이후부터는 이때까지 올라간 고도 중 가장 높았기에, 한 걸음 한 걸음 깊은 의미를 부여하면서 발을 디뎠다.

해발고도 2,300m를 넘겼을 때 태엽 대원이 코피가 터졌다. 나 또한 한국과 다른 건조한 날씨에 숨을 쉬는 데 불편했기에 산행하는 내내 물 묻힌 손수건으로 코를 감싸고 운행했다. 고소는 자신이 파악하지 못해도 몸에서 반응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불편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인지하고 주위에 알려야 한다.

푸르마노바 정상에 선 김연태, 남광준, 김정은(왼쪽부터).

9부 능선까지는 초지가 형성된 것에 반해 정상부는 커다란 암석이 뒤엉킨 너덜지대였다. 정상에 오르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대원들이 고소가 온 듯했다. 나 역시 세 걸음 내딛는 순간 숨이 찼다.

처음에는 국내훈련과 다른 새로운 고산환경과 그로 인해 약해진 내 체력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두려워할 건 없었다. 그동안 국내훈련을 통해 단단해졌고, 모든 고난을 헤쳐나갈 자신이 있었다. 또 새로운 곳을 갈 용기와 도전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숨이 차도 묵묵히 발걸음을 옮겨 마침내 푸르마노바 정상에 도착했다.

배낭의 무게는 무겁지 않았지만, 고소와 이중화 모두 처음이었기에 쉽지 않았다. 그랬기에 시간이 지체되었고 우리는 서둘러 하산을 준비했다. 하산은 올라왔던 길이 아닌 크고 작은 바위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너덜사면을 따라 이어졌다. 돌을 잘못 밟으면 그대로 쭉 미끄러지기에 정신없이 다음에 디딜 돌을 찾아보며 내려왔다. 어느새 해가 져 우리 모두 헤드랜턴을 켰고, 하산을 마친 후 시계를 보니 밤 10시였다.

숙소에 도착해 신발을 벗자 발등에 새끼손가락 크기의 커다란 물집이 잡혀 있었다. 물집이 잡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새로운 탐사지에 대한 기대와 정신적 피로로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했었다. 마지막으로 이번 운행의 아쉬운 점을 스스로 되짚어보며 우즐로바야를 오르기 위한 원동력으로 삼기로 했다.

화창한 날씨에 메딕을 향해 오르는 대원들. 그러나 그날 밤 폭우를 동반한 낙뢰가 찾아왔다

내리 꽂는 번개에 필사적 하산

이어 3박4일간 투육수협곡에 위치한 뭉즐키Mynzhylky(3,000 m)와 메딕Medik(3,578m) 등반을 시작했다. 메딕 정상은 말로알마틴스크협곡과 골린협곡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번 등반은 가이드 없이 운행담당인 연태 대원의 리드로 진행되기에 더욱 더 우리끼리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그 전날 여러 가지 업무로 대부분의 대원들이 잠을 3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 그 결과 고소 증세 중 하나인 무기력증이 대원 대부분을 덮쳤다. 몸이 너무 무거웠고 바쁘게 걸어가고 있는 내 발과 달리 눈은 계속 감겼다.

다음날 해발고도 3,000m 가까이 올라 비교적 평탄한 곳에 전진 캠프를 설치하고, 메딕과 뭉즐키를 등반하기로 했다. 텐트를 치고 난 후 대원들과 함께 고소적응을 위해 메딕 9부 능선을 올라갔다. 올라가는 동안 머리 위로는 정상이 보이고 발아래로는 투육수협곡이 내려다보였다. 우리는 말 그대로 거대한 자연 속에 파묻혀버렸다. 바로 앞에 보이는 메딕은 당장이라도 뛰어올라갈 수 있을 것 같지만, 한 걸음 오를 때마다 숨이 차 가슴이 답답했다. 고산을 맨몸으로 온전히 느낄 수 있던 순간이었다.

메딕 등반 중 잠시 쉬는 시간에 한 대원이 오지탐사대 깃발을 펼쳐 들고 섰다.

그날 밤 폭우를 동반한 낙뢰가 찾아왔다. 먼 산에서부터 시작되었던 벼락은, 강풍과 함께 점점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는 텐트 안에서 공포에 떨며 숨을 죽이는 방법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번개가 우리를 발견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 우리 텐트에서 600m 떨어진 지점에 낙뢰가 떨어지는 것을 끝으로 뇌운은 다른 계곡으로 넘어갔다.

밤새 공포에 떨고 난 우리가 마주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3,000m에 위치한 전진 캠프에서 쉼불락으로 다시 하산해야 했다. 밤새 내린 비로 미끄러운 데다가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몇 미터 앞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직 산길샘 어플로 기록해 둔 코스를 더듬어 GPS에 의존해 탈출해야 했다. 급경사를 오르는 와중에 또 한 번 뇌우가 찾아왔고 우리는 다시 공포에 떨었다. 고정로프가 필요할 정도의 급경사를 내려오며 대원들은 수없이 많이 미끄러졌고, 한 번 미끄러지면 언제 멈출지 모르기에 그저 내가 밟은 풀이 덜 미끄럽길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투육수강까지 내려오니 간밤의 폭우로 인해 다리가 유실되어 있었다. 우리는 말 그대로 고립 상태에 놓인 것이다. 다행히 현지 산악인들이 주위에 있었고, 다음날 우즐로바야 탐사를 시작해야 하는 우리는 애절한 마음으로 차에 태워 달라 부탁했고, 그들의 호의로 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이날 하루로 우리는 자연의 거대함과 그 앞에서 우리의 무력함을 느꼈다. 이는 산을 다니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이다.

투육수협곡에 설치한 베이스캠프.

마음보다 몸이 먼저 무너졌다

이제 우리의 마지막 행선지 우즐로바야Uzlovaya(4,950m)다. 우즐로바야는 알마티, 라임베크 지역에 있는 메리디안능선의 북쪽에 자리 잡은 주요 산등성이다.

첫날은 바얀콜계곡을 따라 12km를 이동해 해발고도 3,20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쳤다. 길은 쉽지 않았다. 처음 보는 고산 빙하 옆 빙퇴석 지대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했고, 산에서 흘러내린 커다란 돌들이 뒤엉켜 있어 걷기가 쉽지 않았다.

우즐로바야 캠프1에서 악천후로 긴급히 탈출하는 대원들의 뒷모습.

우리는 낙석 위험이 있는 곳은 대열을 좁혀 지그재그로 올라갔고, 산사태 지역을 통과할 때는 대열을 넓혀 한 명씩 지나갔다. 덕분에 국내훈련 동안 왜 그렇게 다들 대열을 강조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대열이 흐트러지면 낙석으로 인해 나뿐만 아니라 다른 대원들 또한 다칠 수 있었기에 더욱 조심했다. 그렇게 힘들게 도착한 베이스캠프에서의 밤은 정말 황홀했다. 고개를 들면 거대한 빙하를 두른 산이 우리의 텐트를 따뜻하게 품는 듯했고, 밤하늘의 별들은 당장이라도 내 손에 닿을 것만 같았다.

다음날은 해발고도 3,200m의 베이스캠프에서 4,200m인 캠프1으로 오르는 일정이다. 무려 고도를 1,000m나 높이는 날이다. 아침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나는 빙퇴석 지대의 오르막을 올라갈 때부터 더욱 악화되었다. 당장이라도 멈추어 쉬고 싶었지만, 내가 멈추면 낙석 때문에 다른 대원들이 다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쉬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스로 올라갔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김예랑 대원이 우즐로바야에서 하강기를 이용해 하산하고 있다.

마침내 오르막을 다 오르자 살았다는 안도감에 눈물이 났다. 내가 흘렸던 눈물은 슬픔이라는 감정의 눈물이 아닌, 육체적 한계의 눈물이었다. 지금까지는 살면서 정신이 육체보다 먼저 무너져왔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육체가 먼저 무너졌다. 이는 오지탐사대에서만 겪을 수 있는 정말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언제 또 육체적 한계를 경험해 보겠는가.

국내훈련 때부터 지금까지 힘든 순간이 정말 수없이 많았지만, 나는 모든 순간에 혼자가 아니었다. 내 곁에는 우리 대원들이 있었기에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었고 다시 한 번 도전할 수 있었다. 이번에 마주한 육체적 한계에서도 또 한 번 대원들의 도움을 통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힘들어하는 내 옆에서 태엽 대원은 "정은아, 힘들면 안 올라가도 돼. 무리하지 마. 우리 모두가 서 있는 곳이 피크라고 했잖아"하며 다독여 주었고, 가이드 페리는 "You are champion"이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시 앞이 보이기 시작했고, 거짓말처럼 힘이 났다. 그 후로는 점차 몸이 적응되며 나의 원래 페이스를 되찾을 수 있었다.

고소 적응을 위해 우즐로바야 3,800m 지점까지 오른 박경아 대원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정상 단 300m 앞두고 후퇴

정상 공격의 날, 저 멀리 있는 우즐로바야를 향해 앞으로 나아간다. 바위 능선을 지나 설벽으로 진입했고 준비한 크램폰을 꺼냈다. 하지만 그 순간 가이드가 한 말이 모두를 주춤하게 했다. 그는 우리가 준비한 크램폰은 "프런트 포인트가 불안정해, 녹아 있는 빙하를 충분히 오를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설벽을 오르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가 앞둔 설벽과 정상 부근의 설벽에 각각 고정로프를 설치해야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데, 주어진 시간 안에 모든 설치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 말인즉 정상 등정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갈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가 보고 싶었다. 고정로프를 설치한 뒤 한 명씩 설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머지 인원들은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했다. 옷을 파고드는 매서운 바람에 발가락이 얼 것만 같았다. 그때 태엽 대원은 "펭귄은 추울 때 어떻게 하는지 알아?"라고 묻는다. 이후 대원들을 동그랗게 모이게 한 뒤 서로를 끌어안게 했다. 그리고는 "발가락을 움직여! 발가락을 움직여!"하며 우리 모두 발가락을 꿈틀댔다. 우리를 공격하는 매서운 날씨 속 파란색 패딩을 입은 대원들은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온기를 공유했고, 마치 방어막이 생긴 것처럼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우즐로바야 정상 공격.

우리는 크램폰을 찬 발로 설벽을 꽝광 치며 올라갔고 마침내 그 너머의 빛을 마주했다. 이후부터는 크레바스 지역을 통과해야 한다. 안전을 위해 안자일렌으로 서로를 연결해 빙하지대와 너덜지대를 통과한다. 발이 푹푹 빠지는 너덜지대를 지나가며 점점 지쳐갔다. 우모복 속 몸은 답답해져가고 점차 속이 울렁거렸다. 아침에 먹었던 오트밀이 금방이라도 올라올 거 같았고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하산까지 컨디션도 고려해야 했기에 결국 우리의 도전은 4,611m에서 막을 내린다. 우즐로바야를 정말 눈앞에 두고 멈추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서 있는 곳이 곧 정상"이라 생각했고, 그랬기에 모두 함께 그동안 치열하게 몰아친 우리의 도전의 결과를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산도 순탄치 않았다. 7시에 캠프1에서 베이스캠프로 가려 했으나 밤새 몰아친 강풍과 눈보라로 조금이라도 지체되면 바로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일어나자마자 주인도 모르는 물건을 잡히는 대로 배낭에 넣고 텐트를 철수했다. 긴급 탈출이다. 엄청난 눈보라에 앞은 보이지 않았고 오직 앞 대원의 형광색 레인커버 만을 뒤쫓아 갔다. 로프를 타고 위험한 너덜지대를 내려가다가 결국 앞으로 엎어졌다. 이중화에 크램폰을 착용한 무거운 발에 내 다리가 맞았지만 아파할 새도 없이 바로 일어나 다시 로프를 잡고 한 발 한 발 디뎠고, 우리는 마침내 안전하게 알마티로 돌아왔다.

카자흐스탄 오지탐사대원들.

카자흐스탄 산엔 정해진 등산로 없어

오지탐사대에 참가하기 전, 21년을 매순간 바쁘게 살아오면서 이렇게 힘든 순간이 있었는가 생각해 본다. 육체적 한계에 다다르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 또 한 번 같은 한계에 마주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다시 도전할 용기. 이는 오직 오지탐사대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석 달간 대장님과 부대장님, 대원들과 함께 지내면서 '같이의 가치'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다.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는 늘 함께였고, 돌아가며 서로의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우리 앞에 아무리 급한 강줄기나 아무리 큰 산이 있어도, 서로를 디디며 앞으로 나아갔고 마침내 여기까지 도달했다.

카자흐스탄은 한국 산과 다르게 딱히 정해진 등산로가 없어 우리가 걷는 곳이 곧 길이 되었다.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진 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정해진 길이 아닌, 우리가 직접 만드는 길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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