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스님 말씀 담긴 56년된 릴테이프… 한 톨도 안 놓치려 반평생 들었다

합천/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3. 10. 17.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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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24] 성철 스님 제자 원택 스님
원택 스님이 1967년 성철 스님의 ‘백일법문’ 원본 릴테이프를 들고 있다. 원택 스님은 백일법문 테이프를 들으며 한 글자씩 옮겨 적어 47년 만에 ‘백일법문’을 책으로 완간했다. 원택 스님 뒤의 그림은 김호석 화백이 그린 성철 스님 초상. /김동환 기자

은사(恩師) 생전 21년, 입적(入寂) 후 30년 시봉(侍奉)-. 백련불교문화재단 이사장 원택(圓澤·79) 스님에게 ‘보물 1호’는 은사인 성철(性澈·1912~1993) 스님이다. 1967년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72년 출가한 원택 스님은 불교계의 유명한 ‘효(孝)상좌(제자)’다. 성철 스님의 법문과 어록, 저술을 출판하고 학술 대회를 개최하는 등 스승을 현양하는 일에 평생을 바쳐왔다. 최근 경남 합천 해인사 백련암에서 만난 스님은 반세기 넘게 비장해 온 원반 모양 테이프를 꺼냈다.

◇녹음 후 47년 만에 완간한 ‘백일 법문’

“이 테이프들이 성철 스님 ‘백일 법문’을 녹음한 원본 릴테이프와 복사한 카세트 테이프입니다. 큰스님 말씀이 워낙 빠르고 사투리도 심해서 계속 다시 돌려 듣느라 1시간짜리 카세트를 베껴 적고 나면 완전히 뻗었지요.”

‘백일 법문’은 성철 스님이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 취임 후 동안거(冬安居) 기간 100일 동안 불교 핵심 교리를 설파한 것을 가리킨다.

성철 스님은 한국 현대 불교의 대표적 선승(禪僧)으로 누구나 법명 정도는 알고 있다. 조계종 종정을 지냈으며 ‘산은 산, 물은 물’ 같은 법어(法語)와 ‘누더기 승복’으로도 익숙하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까지 성철 스님은 일반인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은둔 수행하던 성철 스님이 자신이 공부한 불교의 핵심을 쏟아내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강의한 것이 바로 백일 법문이었다. ‘전설’로만 남아있던 ‘백일 법문’이 책으로 엮여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92년. 법문이 있은 지 25년, 성철 스님 입적 1년 전이었다. 원택 스님이 백일 법문을 녹취해 책으로 펴낸 과정은 인연과 인연의 연속이다.

성철 스님의 제자들에게 참선 수행은 기본이었다. 원택 스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머리가 아파 오는 상기병(上氣病)이 찾아왔다. 참선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무렵 ‘백일(법문) 테이프’의 존재를 알았다. 성철 스님의 맏상좌인 천제 스님이 스승 몰래 릴테이프로 실황 녹음해둔 것을 당시 막 출시된 카세트테이프로 복사한 것이었다. ‘참선을 할 수 없게 됐으니 법문을 들으며 공부해보자’고 마음먹은 원택 스님은 테이프를 하나씩 빌려 듣고는 반납했다. “들을 때는 이해할 것 같았는데 몇 달 지나고 나니 ‘뭘 들었지?’ 싶더라고요. 그래서 녹취를 시작했지요. 제가 출가하기 5년 전에 하신 법문인데 녹음 테이프가 있다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었지요.”

녹음을 문자로 전환해주는 프로그램 같은 것은 상상도 못 하던 시절, 원택 스님은 “큰스님 말씀을 한 톨도 빠뜨리지 않으려” 듣고 또 들었다. 책으로 엮을 때에는 생략했지만 노트엔 ‘멈춤’ ‘숨’ ‘후’ ‘웃음’까지 낱낱이 적었다. 백일 법문은 1960년대 중반까지 세계 불교학의 흐름을 망라하고 있었다. 일본, 영국, 인도 등의 불교학자와 아인슈타인 등 현대 물리학 이론까지 등장했다. 성철 스님이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부처님의 중도(中道) 사상으로 선(禪)과 교(敎)를 하나로 꿰어서 불교를 설명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며 자부심을 보일 만했다. 그렇지만 녹취 노트를 책으로 펴낼 생각은 못 했다. ‘절집에서 후배 행자(行者)들이 불교 핵심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하는 바람 정도였다. 그렇게 테이프는 성철 스님 방, 녹취 노트는 원택 스님 방에서 따로따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원택 스님이 ‘은사 스님 생전에 어록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1983년 무렵. 1992년 4월 마침내 ‘백일 법문’이 상·하권으로 출간됐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성철 스님의 속가 딸인 불필 스님의 법보시 제안으로 2000년대 초반 녹음 테이프를 CD 3장으로 만들어 나눴더니 “책엔 없는 내용이 CD엔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황급히 백련암에 보관된 테이프를 다시 꺼내 들어보니 과연 누락된 부분이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개정 증보판이 3권으로 완간된 것이 2014년. 원택 스님은 “이 책이 1970년대에 나왔다면 성철 스님에 대한 당대의 돈점(頓漸) 논쟁 평가가 달라졌을 것”이라며 “큰스님은 생전에 저희 상좌들을 보고 ‘미련한 곰 새끼’라 부르시곤 했는데, 백일 법문 완간에 47년 걸린 걸 보면 진짜 곰 새끼 맞는 것 같다”며 웃었다.

성철 스님이 평생 간직한 장서 앞에 선 원택 스님. "책 보지 말라"는 말씀으로 알려진 성철 스님은 각국의 서적 1만권을 소장한 장서가였다. /김동환 기자
성철 스님의 장서목록. 성철 스님은 장서에 모두 '법계지보'라는 장서인을 찍었다. 장서 가운데는 '신약'도 포함돼 있다. /김동환 기자

◇”책 보지 말라”던 스님의 장서

“이 책을 한번 보세요.” 원택 스님이 건넨 책은 ‘신약(新約)’이었다. 표지 안쪽엔 ‘법계지보(法界之寶)’라는 성철 스님의 장서인(藏書印)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흔히 “책 보지 말라”고 한 것으로 알려진 성철 스님은 1만권을 소장한 장서가였다. ‘책 보지 말라’는 것은 참선 수행하는 선승(禪僧)들을 대상으로 한 특별한 당부(수좌 오계) 중 하나다. 성철 스님은 만 스무 살 때인 1932년에 ‘이영주(성철 스님의 속명) 서적기’라는 소장 도서 목록을 적었는데, 여기에 이미 동서양 철학서를 비롯해 ‘에스페란토 독습서’와 신구약 성서까지 포함됐다. 성철 스님의 장서가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1947년 가을 봉암사 결사가 시작된 후 김병용 거사에게 1700여 권을 기증받은 때부터. 이후 스님은 6·25전쟁 피란 중에도 거처를 옮길 때마다 ‘책 이사’가 가장 큰 일이었다. 장경각 열쇠는 성철 스님이 손수 관리했다. 법문에 참고할 책이 있으면 몸소 찾아오거나 상좌들에게 “어느 책꽂이 어느 칸에 있는 책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 모든 책에 ‘법계지보’ 장서인이 찍혀 있다. 성철 스님에겐 불교 경전뿐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성경까지 어떤 책이라도 한국 불교를 일으켜 세우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법계’의 보물이었던 것. 이제 장경각 열쇠는 원택 스님이 관리하며 동국대 불교학술원 등 필요한 후학들이 참조·연구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해인사 경내의 성철 스님 사리탑. 1998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화제를 모았다. /김동환 기자

◇헛 불사(佛事) 말고 우리 시대의 디자인으로-사리탑

1993년 11월 성철 스님의 다비 의식은 당대의 사건이었다. 다비를 치르는 동안 해인사 일대는 조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사리가 얼마나 나오나’에 관심이 쏠리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수습된 사리는 110 과(顆). 사리탑 건립이 숙제가 됐다.

황수영 전 동국대 총장, 정영호 전 단국대 교수, 김동현 전 문화재연구소장 등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는 “국보·보물 베끼는 사리탑 불사는 ‘헛불사(佛事)’”라며 ‘우리 시대의 디자인’을 권했다. 현상 공모에선 당선작을 내지 못했고 사진가 주명덕씨의 추천을 받은 재일 설치미술가 최재은씨가 설계를 맡게 됐다. 원택 스님은 최씨와 함께 부처님 진신 사리를 모신 통도사 적멸보궁탑을 참배하며 기본 아이디어를 상의했다. 수많은 논의를 거쳐 사각형과 원, 구(球)와 반구(半球)로 구성된 인도 불교에서 시작된 단순하면서 파격적인 디자인이 확정됐다. 석재는 인도에서 공수했고, 일본 기술자들도 작업에 참여했다. 건립 비용은 신도들이 십시일반했고, 삼성그룹 고 이건희 회장과 부인 홍라희 여사가 큰 몫을 맡았다.

성철 스님 사리탑은 참배와 수행의 공간이다. 신도들이 사리탑 주변에서 3000배를 올리는 모습. /백련불교문화재단

‘불교는 고리타분하다’는 선입견을 단숨에 날려버린 파격적 디자인의 사리탑은 1998년 성철 스님 5주기에 맞춰 화제 속에 완공됐다. 최 작가는 공사 당시 ‘지진 대비’를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 철저한 내진 설계와 시공 덕분에 사리탑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돌 사이에 작은 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성철 스님 사리탑은 단순한 참배 공간이 아니라 신도들이 3000배를 올리고, 좌선(坐禪)할 수 있는 수행 공간 역할까지 겸하는 한국 불교의 명소가 됐다.

올해는 성철 스님 30주기(11월 3일). 원택 스님은 은사 생전에 간행한 ‘선림고경총서’(전 37권)를 전자책으로 무료 공개하고 30일부터 ‘4일(日) 4야(夜)’ 4만8000배 참회 기도를 갖고 11월 3일엔 추모 다례재를 봉행하는 등 다양한 추모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원택 스님은 “큰스님이 제게 ‘(법정 스님이 계신) 불일암에 다녀오너라’ 말씀하신 순간 제 팔자는 결정됐다”고 했다. 성철 스님의 원고 윤문을 법정 스님에게 부탁하는 심부름을 맡는 것과 동시에 스승을 현양하고 기념하는 일이 운명이 됐다는 뜻이다. “큰스님이 제 나이 오십에 열반하셨는데, 제가 올해 팔순입니다. 이렇게 오래 살 줄 알았다면 더 열심히 살면서 더 잘 모셨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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