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류독감 유전자 자른 닭…바이러스 진화 이길까

곽노필 2023. 10. 1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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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인플루엔자(AI) 피해]바이러스 증식 돕는 유전자 제거한 닭 탄생
10마리 중 9마리, 바이러스 노출돼도 멀쩡
조류 인플루엔자에 저항성을 갖도록 유전자 편집된 닭(오른쪽, 다리에 파란 띠를 두름)과 일반 닭.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유전자 가위 기술을 이용해 조류인플루엔자(조류독감)에 상당한 내성을 갖춘 유전자 편집 닭이 탄생했다.

해마다 전 세계에서 큰 경제적 피해를 입히는 조류독감 바이러스 확산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바이러스의 또다른 적응 진화를 유발할 위험에 대한 우려도 일고 있다.

영국 에든버러대 로슬린연구소와 임페리얼칼리지런던, 퍼브라이트연구소 공동연구진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CRISPR/Cas-9) 기술로 닭 유전자를 편집해 조류 인플루엔자에 저항성을 가진 닭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Nature Communications)에 발표했다.

요 몇년간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조류독감 바이러스는 H5N1이다.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에 걸쳐 야생 조류나 닭과 오리 등의 가금류는 물론 여우, 코요테, 족제비, 바다사자 등 야생 포유류까지 위협하고 있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인간 감염 사례도 나타났다. 과학자들은 이미 종간 장벽을 넘은 점을 들어 이 바이러스가 앞으로 인간 감염력을 높이는 쪽으로 변이를 일으켜 지구촌에 새로운 팬데믹을 촉발시킬 가능성을 우려한다.

조류 인플루엔자 백신이 나와 있긴 하다. 하지만 비용 문제, 불충분한 효과, 내성을 갖춘 더 강력한 바이러스 변이 등장에 대한 우려 등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지는 못하다.

따라서 조류인플루엔자 내성을 갖춘 닭의 탄생은 백신 없이도 바이러스 전파 통로를 차단한다는 점에서 조류독감 확산을 막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특히 유전자는 자손들에게도 전달되기 때문에 유전자 편집 기술은 영구적으로 동물의 질병 저항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감염된 닭에선 새로운 돌연변이 발견

이번 연구에 사용한 유전자 가위 크리스퍼-캐스9(CRISPR/Cas-9)은 특정 위치에 있는 유전자를 제거해 특정 형질이 발현되지 못하도록 하는 분자 도구로, 원하는 위치로 가위를 안내하는 ‘가이드 RNA’와 가위 역할을 하는 효소단백질로 구성돼 있다.

연구진은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닭 세포 안에서 증식하는 데 사용하는 단백질(ANP32A)에 관여하는 닭 유전자에 이 기술을 사용했다.

연구진은 먼저 유전자 가위로 병아리 배아 혈액에서 각각 암컷과 수컷의 원시생식세포(PGC), 즉 난자와 정자의 전구체를 추출해 ANP32A 단백질 유전자를 제거한 뒤 부화시켰다. 이어 병아리가 자란 뒤 암컷과 수컷을 교미시켜 낳은 알에서 태어난 병아리들을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노출시켰다. 실험에는 H5N1보다 독성이 약한 H9N2 바이러스를 사용했다.

그 결과 유전자 편집 닭은 10마리 가운데 9마리가 감염되지 않았다. 감염된 닭 1마리도 바이러스 전염력이 없었다. 반면 유전자 편집을 하지 않은 닭 10마리는 모두 바이러스에 감염됐으며, 다른 닭에게도 바이러스가 전염됐다.

그러나 1000배 더 많은 양의 바이러스를 투여하자 유전자 편집 닭도 절반이 바이러스에 감염됐다. 다만 몸 속의 바이러스양은 일반 닭보다 훨씬 적고 전염력도 약했다. 감염된 유전자 편집 닭과 함께 사육된 일반 닭은 4분의 1만 감염됐고 유전자 편집 닭 중에서는 감염된 것이 없었다.

연구팀은 2년 이상 관찰한 결과 유전자 편집이 닭의 건강과 생식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우려할 만한 점도 발견됐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유전자 편집 닭에서 채취한 바이러스를 살펴본 결과 편집된 ANP32A 단백질을 사용해 증식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몇가지 돌연변이가 일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는 인간 감염력을 높이는 쪽으로 돌연변이가 일어났다.

ANP32 유전자 역할 규명에 기여했던 중국 농업과학원 하얼빈수의학연구소 왕샤오준 박사(바이러스학)은 ‘사이언스’에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숙주 세포가 쳐놓은 장벽 주변에서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연구진은 보도자료에서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완전한 바이러스 저항성이 달성되지 않을 경우 바이러스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진화할 위험이 있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돌연변이를 일으킨 바이러스는 ANP32A 단백질이 전혀 없는 경우에도 같은 계열의 다른 두 단백질(ANP32B, ANP32E)을 사용해 증식할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다만 이 세 가지 단백질이 모두 없는 경우에는 바이러스가 복제되지 못했다.

연구진은 현재 세 가지 단백질에 관여하는 세 가지 유전자를 모두 편집한 닭을 만드는 연구에 돌입했다. 그러나 세 가지 유전자를 모두 제거하면 닭의 성장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현재의 과제는 바이러스 중합효소를 잘 차단하면서도 단백질 생산 기능도 할 수 있는 ANP32 돌연변이를 찾는 것이라고 연구팀은 말한다.

연구진은 20년 후에는 양계장에서 유전자 편집 닭을 사육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픽사베이

백신 대신 숙주 게놈 조작해 질병 퇴치

연구를 이끈 임페리얼칼리지런던의 웬디 바클레이 교수(바이러스학)는 기자회견에서 “이번 연구는 바이러스 저항성을 갖춘 닭을 만들 수 있다는 개념 증명 연구이며 아직 그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세인트주드아동연구병원의 리처드 웨비 박사는 ‘뉴욕타임스’에 “유전자 편집 닭이 아직 개념증명 단계이긴 하지만 잠재력은 엄청나다”고 말했다. 숙주의 게놈을 조작해 감염을 차단하는 새로운 방식의 질병 퇴치법이 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만약 이것이 성공하게 되면 공중보건의 승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완벽한 바이러스 저항성을 갖춘 닭을 만드는데 성공하더도 유전자 편집 닭을 산란용 또는 식용으로 사육하려면 안전성을 확인할 추가 시험과 엄격한 식품 기준에 따른 승인 절차를 통과해야 하는 등 갈 길은 멀다. 유전자 편집 닭에 대한 소비자들의 심리적 거부감을 극복하는 것도 만만찮은 과제다.

논문 제1저자인 로슬린연구소 알레오 이도코-아코 연구원은 20년 후에는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을 표명했다.

*논문 정보

https://doi.org/10.1038/s41467-023-41476-3

Creating resistance to avian influenza infection through genome editing of the ANP32 gene family. Nat Commun (2023).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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